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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깨찰빵 (봄봄, @Fallmoon_f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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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비에라는 살면서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개중에서도 영웅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통의 사람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휴런인 누나는 떠나기 전에 나를 붙잡고 한참을 설교했다.

 

네가 이번에 보조하러 가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지?”

, .”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 빛의 전사, 신살자라고. 세계가 사랑하기 때문에 몸소 세계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라고 시험하는 자. 그런 존재니까.”

알고 있어요.”

, 그런 사람 앞에서 지금처럼 삐딱하게 굴다가 우리 사업이 틀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빛의 전사에게는 그에 마땅한 예우를 할 줄 알아야지. 지금부터 그럼 공손한 태도를 익혀 둬야 하는 거야.”

 

피가 섞이지 않은 나의 누이, 누나는 빛의 전사를 던전에서 만났다고 했다. 원래부터 누나는 대개 음식을 만들어 파는 사업을 했으나, 사업에는 별로 재능이 없었다. 그에 따라 모험가 일을 병행하게 되면서 종종 던전을 오가기 시작했으나 거기에서도 별로 운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던전에 함께 들어가기로 한 사람들이 준비를 제대로 해 오지 않은 탓에 본인을 제외한 다른 전원이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했던가.

 

위기에 몰렸던 누나를 구해 준 것은 광휘였다.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언어로 속삭이는 정령들이 전장을 뒤덮을 때 그 너머에 서 있었던 것은 누나가 예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누이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빛의 전사 이야기를 했다. 사람이 쓰러져 광활하게만 보이는 전장, 그 끝의 어두운 문 너머에서 걸어오는 빛과 어둠의 마도사를.

 

그의 곁에는 늘 정령들이 머무른다고 했다. 누나는 백마도사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빛의 전사에게 무슨 말을 속삭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피가 흐르는 상처를 부여잡은 채 빛의 전사가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적을 죽인 뒤 자신을 치료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름이라도 물어보고 통성명이라도 했어야 좋았을 것을 헛소리만 늘어놓았다고 누나는 매번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그래도 어떻게 연락은 성공했네.”

 

과거에 누나가 하던 이야기를 곱씹다 보면 썩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내 머리에 리본이라도 묶을까 말까 망설이듯 천을 들고 서성이며 귀찮게 하던 누이가 손수건으로 이마를 쳤다.

 

갑자기 비꼬고 있어.”

 

나는 부루퉁하게 아프지도 않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니, 비꼬는 게 아니라. 연락 아무한테나 받을 법한 사람은 아니잖아?”

, 그 사람을 모르는 거야. 길가의 행인도 얼마나 잘 도와준다는데?”

 

길가의 행인을 잠깐 도와주고 잊어버리는 것과, 그 행인과 사후 연락을 주고받는 건 다른 층위의 문제가 아닐지. 그러나 일단 누나의 기분을 굳이 망치고 싶진 않았으므로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나중에 아무리 풀어 버릴 예정이라고 해도 길거리까지 복수 목적에서 달아 놓은 장식을 주렁주렁 끌고 나가는 건 사양이었다.

 

어쨌거나 누나는 빛의 전사에게 사후 답례를 하기로 약속했다고 말했었다. 그냥 대충 그러라고 했던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도 수락을 했다는 눈치였다. 이후 누나는 주변을 누비고 다니며 어떤 방식으로 괜찮은 답례를 할 수 있을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던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빛의 전사를 짝사랑하게 된 줄로 오해라도 할 판이었다.

 

누나는 모험가 마을에서 나름대로 답을 찾았다. 우리는 모험이 본업이 아니라 원래 살던 집이 따로 있었으나 대부분은 모험가 거주구에서 지냈다. 근래 모험가들 가운데서는 자신의 개인 집을 개조하여 일종의 무료 사업장으로 만들어 놓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꽃집이라든가, 음식점 같은 것은 부업으로 하겠거니 이해가 갔지만 가끔은 다소 희한한 업체들도 튀어나왔다.

 

모험가 거주구에 답사를 다녀온 누나는 눈을 빛내며 돌아오더니 자신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생겼다고 했다. 아마도 모험가들은 집사라든가 메이드 같은 것을 생각보다 좋아하는 것 같으니, 아마 빛의 전사도 보좌인을 보내 주면 좋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참에 출장 비서 업체 같은 것을 세워 보겠다며 벼르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대체 보좌인을 어디서 구할 참인가 의문을 느꼈다.

 

답은 생각보다 값싸게 나왔다. 누나는 빛의 전사에게 무료 비서로 나를 보내겠다고 했다. 전문가들이 따로 있는 마당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연락을 보낸다고 해도 틀림없이 답장이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과 함께 누나의 편지 쓰기를 구경했다. 개인적으로 모험가들이면 몰라도 빛의 전사가 그런 곳에 갈 것 같진 않았다. 무료 비서 서비스를 체험해 볼 의향이 있다는 답신은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어디 가야 하는지 알지?”

 

뚱뚱한 흰 털의 우체부가 전달한 수락 연락은 오히려 찜찜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이해가 영 되지 않던 것이다. 그러나 출발하기로 한 이상 깊게 생각해 봤자 나만의 손해였다. 누나는 보타이를 매어 옷맵시를 정리하여 주면서 마지막 당부를 늘어놓았다.

 

가는 길에 사고 내거나 어디 이상한 거 치지 말고.”

, .”

대답은 성실하게 해. 가서는 특히.”

 

빛의 전사를 존경하지 않아서 내가 심드렁하게 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나는 그 신살자를 한 번도 대면해 본 적 없었고, 소문으로 처음 접했다. 약한 자에게 다정하다 했고 그에 반해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사람 하나쯤 얼마든지 눌러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사방에 그 능력을 빌려 주고 다니는 것을 보면 소탈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강직한 사람이라면 보좌인 같은 것은 필요 없으리라. 나는 길을 떠날 채비를 마친 채 마음속으로 실패를 일찌감치 애도했다. 누나의 사업이 번창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는 아닐 것이었다. 나야 시간도 남는 김에 다녀오면 될 일이라지만, 어쨌거나 누이가 바라는 결과는 얻을 수 없을 듯 했다.

 

…….”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대단한 환대는 없었다. 나는 한참 동안 누군가의 식사 장면을 바라보아야 했다. 음식을 거의 마시고 있는 그자는 내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우적거리는 소음과 식기의 덜그럭거림이 흡사 짐승이 음식을 섭취할 때와 같은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어쩐지 근방에 빛의 전사가 있냐고 물어볼 분위기도 아니었거니와, 더 사근사근하게 말을 붙일 수 있을 법한 사람도 보이지 않아 나는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식사를 이어 가던 자는 나를 거의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따금 내 쪽으로 돌아가는 토끼의 귀가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드러냈다. 일반적인 토끼들은 청각이 아주 예민하여 사람이 많고 시끄러운 장소에서 잘 견디지 못한다는데 비에라들은 어떨 것인지. 나는 꼬리를 내린 채로 서서 그런 것을 궁금해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일종의 식당이었다. 별실이 각기 따로 마련되어 있는 고급 식당으로 보였는데, 건물 자체도 우아하고 고풍스러워 처음에는 내가 정말 목적지인 음식점에 온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졌을 정도였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은 비교적 살가웠다. 그는 새벽이라는 곳에 소속된 사람들이 예의 건물에 종종 방문하여 음식을 먹고 간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내가 아는 일종의 에오르제아 수호 단체인 새벽과 그가 말하는 단체가 동일한 곳이라면 분명 빛의 전사도 안에 있으리라고 나는 판단했다.

 

직원은 나를 어느 방 앞으로 인도했는데,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긴 테이블과 그 위에 차려진 온갖 음식들, 그리고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 장소에 빛의 전사가 올 것이라고 여겨 한참 동안 기다렸다. 별다른 대응 없이 식사를 이어 가던 자는 한참 뒤 뼈다귀 한 조각을 그릇에 내려놓았다. 뚜렷한 딸그랑 소리에 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 귀찮게도 아, 안 가네.”

 

그는 굉장히 이국적인 어조를 사용했다. 확실하게 근방에서 들어 본 적 없는 말투였다. 나는 그제야 그를 다시 자세히 보았다. 남성 비에라는 거의 본 적이 없었지만 보편적인 외관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나에게 투덜거리는 투로 대꾸한 남자는 비에라의 외양에 대한 기대를 전반적으로 거스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으레 눈처럼 창백하다고 비유되는 피부는, 희기는 했지만 눈송이보다 시체에 빗대어야 적당할 정도로 칙칙했다. 본래 길게 늘어진 눈그늘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에는 눈 밑 주름이 섞여 있어 그의 나이가 아주 젊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암시했다. 배는 드러내되 몸에는 달라붙는 의상은 공단 리본으로 치장되어 화려해 보였으나 전투에 적합할 형태는 아니었다. 그는 비에라보다는 미코테의 평균 키에 가까울 정도로 체구가 작았고 검은 머리카락은 움직임을 따라서 살랑거렸다.

 

?”

 

내가 되물었다. 남성은 전혀 일어나지 않은 채로 나를 응시했다. 그의 새까만 눈을 보고 있자면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단정하게 목줄을 매고 자신이 언제든 찢어 버릴 수 있는 장식을 감내하고 있는 짐승의 눈이었다. 걸친 옷이 얼마나 좋은 것이든, 그를 둘러싼 풍경이 아무리 정돈되어 있든 눈을 통해 보이는 본질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비에라의 특성인지, 아니면 그만의 특성인지 구분할 재간은 없었다.

 

, 어디서, 보낸, 놈이냐고.”

 

그가 다시 물었다. 나는 다시 어리둥절해졌다. 왜 그런 것을 지금 묻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있어도 된다는 언질을 빛의 전사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먹는 내내 그냥 둔 것이 아니었던가? 잘못된 방에 들어오기라도 한 건가? 나는 변명했다.

 

빛의 전사를 만나러 왔습니다.”

, 왜지?”

저희 누나가.”

 

나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남자의 시선이 방 안을 배회했다. 그는 손으로 주변 식기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것은 불안한 자들 특유의 움직임이었으나, 그는 나에게 직접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기보다는 혼잣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기, 길에서, , 울고 있는 녀석, 있었지. 그 녀석이 도, 도움을 요청하러 오, 온 건가? , 가만, 그런데 닮지 아, 않았어. 그럼 내가 구, 굳이 신경, 쓰지 않았, 않았던 그 던전에서의 녀, 녀석이 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하, 항변하러 왔다든가? 아니면 누, 누나라는 녀석이 어, 어느 지역 와, 왕실의 두, 둘째 혹은 처, 첫째 딸이라 계승 작업을 위해 나, 나한테 특별히 여, 연락을 준 걸 수도 이, 있겠지만, 그런 예고는 새, 새벽으로부터도 바, 받은 적이 어, 없는데? 떠오르는 거라고는 며, 며칠 전에 그 펴, 편지가 하나 이, 있긴 했지만 하하나도 다, 닮지 않았어. , 보낸 녀석, 어떻게 생겼더라, 미코테는 아, 아니었는데.”

 

그것은 혼잣말이라기보다는 방언이었다. 상대는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담아 두어야 할 문장을 그대로 입 밖으로 줄줄 내뱉고 있는 모습을 보던 나는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개입하기로 했다.

 

저기. 전해 들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누나라고 하는 휴런 누님을 두고 있습니다. 누님이 빛의 전사에게 보답하고 싶어서 저를 보내셨어요. 그분께서 점심시간에 이 식당에 주로 계신다고 답신하셨다길래 일부러 시간 맞춰서 여기로 왔습니다.”

, 보답으로사람? ?”

, 일반적인 선물을 드리기에는 그렇게 대단한 분한테 쓸모 있을 만한 걸 잘 생각해 내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모험가들이 옆에서 집을 관리해 준다든가 필기하는 보좌인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 같다고 하시더니, 제가 아예 가서 서비스를 제공해 드리라고 하던데요.”

 

나는 눈썹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굳이 왜 보답으로 사람을 보내냐는 말을 한 걸 보면 대충 빛의 전사와 아는 사이긴 할 것 같았다. 아니었더라면 찾는 사람이 아니라고 바로 내보냈을 테니까. 눈앞에 있는 비에라는 의심인지 부담스러움인지 모를 모호한 표정과 함께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툭 내뱉었다.

 

, 돈을, 보내도 되잖, .”

그건 정이 없죠.”

 

내가 대답했다. 비에라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다시금 말을 이었는데, 이번에도 사람을 마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웅얼거려 사실상 혼잣말에 가까웠다.

 

, 빛의 전사와 잘 아는 사이, 인가? , 아닌 것 가, 같던데. , 적어도잘 아는 사이였더라면 서, 선물로 뭘 줘야 하는지는 아, 알았겠지.”

 

나는 미묘하게 불만스러워졌다. 누나의 대처가 솔직히 내 쪽에서도 그렇게 합리적이지는 않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나,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폄하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누나를 비난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는 뜻이었다.

 

정감 있는 선물이 뭐 어때서요? 빛의 전사한테는 마음 없는 싸늘한 선물만 드려야 한다는 말인가요?”

, 돈은 마, 마음 없는 싸, 싸늘한 선물이라니, 돈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보, 볼만 할 발언이군.”

 

나는 얼굴이 벌겋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누나가 아니라 나의 선택 때문이었다면 그냥 가만히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인 가족에 대한 모욕이었다!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풀고는 입꼬리가 잔뜩 내려간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빛의 전사와 아는 사이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이름은 알아 둬야겠다 싶었다. 나중에 두고두고 영웅의 이상한 친구라고 곱씹어 대기 위해서라도.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빛의 전사와 가까우신 분이신가요?”

 

비에라는 읽기 어려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툭 대꾸했다.

 

페르켈렛.”

 

그는 잠시 멈췄다가, 마치 잊어버린 이름표를 목에 거는 것처럼 뒤늦게 덧붙였다.

 

빛의 전, 전사라고들 부, 부르더군.”

 

페르켈렛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냅킨으로 손에 묻은 것을 대강 닦아낸 그는 그것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는 나를 지나쳐 갔다. 분명 그에게 뭐라도 말을 해야 할 터였으나 낭패라는 생각이 들어 제대로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페르켈렛은 옹송그린 자세로 바깥을 한 번 확인했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따, 따라올, 생각인지?”

?”

지금 지, 집에 간다고 해서, 도망, 쳤다고 연락하진, 않을 거다.”

 

새까만 눈에서는 도통 감정이랄 것이 읽히지 않았다. 책망하는 것인지, 아니면 비웃는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정말 공들여 찾아온 나를 가엾게 여기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적어도 인과적으로 그냥 돌아갔을 때 발생할 결과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누나는 분명 내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판단할 테고 빛의 전사는 오늘의 일을 바보 같은 심부름꾼이 벌인 우스운 사건 정도로 여길 터였다.

 

페르켈렛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대단한 사람에게 성질 따위를 냈다는 점에서 오는 여전한 불안이 있었다. 그러나 누나를 슬프게 하고 싶지도 않은 마음이라, 나는 머릿속에서 오가는 온갖 잡생각 따위는 무시하고 문가로 이동했다. 가까운 곳에서 마주해도 페르켈렛의 표정이 잘 읽히지는 않았다. 다만 눈가 주름의 어렴풋한 변화를 통해 그가 흥미로워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디로 갑니까?”

 

내가 짐짓 물었다. 페르켈렛은 대답하는 대신 질문했다.

 

오고 시, 싶지 않아 보, 보이던데?”

그런 얘기는 한 적 없습니다.”

, 앞으로 할 이, 일이 뭔지는알고 있는 거야?”

모릅니다.”

 

페르켈렛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이동했다. 나는 곧 그의 눈에 머무르던 기이한 빛이 픽 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빛의 전사가 중얼거리면서 앞서 나갔다.

 

, 내일, 정오가 되기 전에.”

 

그의 중얼거림은 바깥에서 이어지는 소음에 비해 극히 작았다. 그럼에도 나는 목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는데, 빛의 전사가 내 쪽을 보며 짧은 순간 정확하게 눈을 맞췄던 탓이었다. 그의 입이 움직였다.

 

, 건물, , 앞으로 나와.”

 

그는 곧 치렁치렁한 겉옷을 갈무리하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시 내가 들은 말을 이해하기 위해 서 있었다. 당장 화를 내거나 이것저것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내일 돌아오라? 무엇을 위해서? 적어도 시킬 일이라도 말해 달라 청하기 위해 바깥으로 따라 나갔을 때 페르켈렛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일단 상대가 자리를 뜨고 나자 그제야 억울함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에 사람을 못 알아보고 결례를 저지르기는 했기로서니. 그거 하나 때문에 설마 종일 말도 않고 토라져 있을 셈이란 말인가? 아니면 그냥 이렇게 면박을 주고 세워 놓으면 내가 알아서 돌아갈 줄 알고 시험이라도 하는 것인가? 온갖 가능성이 떠올랐으나 나 같은 일개 바보가 위대한 영웅의 마음이라는 것을 읽어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나는 근처에 숙소를 하나 잡았다. 어차피 영웅의 집에서 신세를 질 수는 없으니 따로 방을 잡기는 해야 했다고 자신을 위로했으나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페르켈렛이라는 인물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본 것은 당연히 이번이 처음이었다. 누나가 차라리 대신 왔으면 이런 식으로 일을 망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더 나빠졌다. 평소 불평을 많이 하는 편이기는 해도 이런 식으로 누이의 부탁을 망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흰 빵과 물만 씹으면서 하루를 보낸 뒤 약속 장소로 나왔을 때, 페르켈렛은 이미 낯선 누군가를 마주하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비에라의 귀가 쫑긋하게 올라갔다가 모로 돌아갔다. 비에라는 아니었으나, 귀의 움직임이 뚜렷한 종족 출신으로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페르켈렛은 지금 나를 맞이할 심적 여유가 딱히 없었지만, 일단 어디에 있는지는 계속 확인하면서 기존의 대화를 이어갈 요량인 것이었다.

 

첫 인상도 망쳤는데 두번째까지 실수할 수는 없었다. 나는 눈치껏 골목 가장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음에도 빛의 전사를 향해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체구도, 종족도 모호한 그 인물은 머리에 검은 후드를 쓰고 있었으며 내가 근처에서 자신이 하는 말을 듣든 말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부탁드립니다.”

 

낯선 자가 말했다. 나는 페르켈렛의 표정이 거의 변화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 일을 부탁하는 것이겠거니 싶었다. 영웅의 얼굴은 굳이 따지자면 귀찮음이나 번거로움을 더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페르켈렛은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더니 내 쪽을 손짓했다. 후드를 쓴 인물이 나를 돌아보았다가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앞으로 몸을 틀었다.

 

대화는 얼마간 이어졌다. 이내 후드를 쓴 인물이 묵례하더니 자리를 떴다. 페르켈렛은 그가 떠나가는 자리를 넘겨다보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일단 오늘만큼은 성실한 모습을 보이자는 각오를 하고 걸음을 뗐다. 점수를 따려 해도 도통 기분 읽기가 어려운 낯이었다. 중년의 나이를 어렴풋이 드러내는 눈가의 주름은 상대의 얼굴에서 유독 뚜렷하지 않았다. 얼굴 근육의 움직임보다는 으레 그 어두운 홍채가 시선을 더 빨리 사로잡는 탓일지도 몰랐다.

 

미래, 시가, 있는 건, , 아니었군.”

 

가까워지자 페르켈렛이 툭 뱉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미래시요?”

 

페르켈렛은 이미 떠난 후드 쓴 자가 있었던 자리를 손가락질했다.

 

저 놈하고 가, 같은 패거나 아, 아니면 미, 미래를 알아서 찾으러 온 건 아, 아닌가 싶었지.”

 

영 이해가 가지 않는 말들이었다. 갑자기 미래시를 이야기할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이었던가? 그는 흡사 자신이 미래를 읽을 줄 아는 예언자이고, 내가 자신과 비슷한 예언자라서 무언가의 위해를 가하거나 대결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내가 귀를 내리고 눈을 굴리면서 그의 말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페르켈렛이 픽 웃었다.

 

, 놀리는 건, 의도는 아니니까. , 평소에도, 그런 태도면, 여기까지는 어, 어떻게 온 거지?”

 

그의 말은 어쩐지 조금씩 더 의뭉스러워지고 있었다. 나는 무슨 뜻이냐고 성질을 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감정을 숨기는 것은 딱히 주특기가 아니었다.

 

마차를 타고 왔습니다.”

 

답변을 들은 페르켈렛은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슬쩍 눈치를 살피는 나를 보고 웃었다가, 이내 아주 오묘한 낯빛을 지어 보였다. 그것은 일종의 우수로 설명될 법한 눈빛이었으나, 그 기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에서 사라졌다. 그는 뒤에 있는 골목을 확인하더니 말없이 손짓했다. 나는 앞서 가는 그를 따라 이동했다.

 

마차, , 말이지. 그런 조, 종류의 삶도 이, 있지.”

 

그는 무엇이 독특한지 모를 그 문장을 한 번 더 중얼거리면서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머리카락 때문인지, 그는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서 거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중얼거렸다.

 

거짓말 하지 않았어요.”

확실히 거, 거짓말, , 실력은, 뒤떨어져.”

…….”

 

페르켈렛은 별다른 말 없이 벽에 등을 댔다. 나의 불만 섞인 침묵이 그에게는 꼭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그야, 실제로 내가 불평을 한다는 게 그에게 어떤 득이나 실이 되진 않을 테니 그렇겠지만. 페르켈렛은 왜 웃었는지 설명해 주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 누나, , 도와줬으니까 그거, 그걸, 갚고 싶다고 해, 했었나.”

.”

, 그럼, , 앞으로, 내가 하는 얘기는 아, 아예 드, 들었다는 걸, 잊어버리도록. , 거짓말, 시도하지 말고, 말하지 아, 않겠다고 약속하면.”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말이 혀 끝에서 끔찍하게 쓰게 느껴지는 것처럼 눈가를 찡그린 채 말을 잇는 것이었다.

 

, 시종으로 써, 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켈렛은 곧바로 이야기하는 대신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시종의 여, 역할, 이라는 게, , 낯설지 아, 않은가 본데.”

, 이것저것 다양한 일을 하면서 지냈거든요.”

 

방금 전까지 페르켈렛에게 불만이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나는 곧바로 열정을 되찾았다. 틀어진 줄 알았던 일이 생각보다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성격이 나쁘고 남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나 싶었던 빛의 전사도 얘기를 나누다 보면 꽤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심지어 시종 역할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칭찬까지 해 주다니!

 

", 이를테면?"

 

내가 시종의 역할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드러내자 페르켈렛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의미를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유의미한 변화는 아니었다. 나는 곱씹었다.

 

"집사 일도 하고요. 오래 전에 재해가 있었을 때 가족을 잃고 누나랑 같이 지내게 됐거든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별 거 다 해 봤죠. 어릴 때는 좀 싫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괜찮아요."

"?"

"그야, 허드렛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별로지만요. 중요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세계에서 나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하고, 거창하게 생각하면 또 아주 나쁠 것도 없어서요."

"."

 

나는 상대의 그 짧은 반응 후 어떠한 부연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페르켈렛은 대화를 이어 가는 대신 영 다른 화제를 꺼냈다.

 

", 던전에 드, 들어가서, , 잃어버린, 보석을 차, 찾아 달라는 녀석들이 며, 며칠 전부터 마, 말을 걸곤 했단 마말이지."

"보석이요? 자기들이 찾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 하여튼, 엄청나게 주, 중요하다고고민해 본다고 하니까 오, 온갖 방식으로 요청을 주, 주더란 말이야. 그게 어, 없으면 재해가 이, 일어난다고 해, 했나. , 반복되길래 네 녀석도그 녀석들하고 하, 한 패 아닌가, 싶어서. , 어제는 그랬다.“

 

없어지면 재해 같은 게 일어날 보석이라고 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내가 윗사람들의 일에 무지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 정도라면 오며가며 들은 소문이라도 있을 텐데 당장은 연상되는 바가 전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웬 잡상인 녀석들이 온종일 귀찮게 하고 있었다면 갑자기 찾아온 나를 보고도 날을 세울 만도 했다. 따지고 보면 전날 페르켈렛이 보인 반응은 딱히 날을 세우는반응조차 아니었다. 나는 일단 페르켈렛의 편을 철저하게 들어 줄 용의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분개하고 보았다.

 

"사기꾼 아닌가요? 굳이 그런 요청까지 들어 줄 필요 없잖아요. 빛의 전사가 얼마나 바쁜데요?“

 

그러나 정작 페르켈렛에게서 나온 응답은 완전히 예상 외의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일단 그걸 차, 찾으러 던전에갈 거다.“

?”

 

누가 봐도 딱히 들어 줄 필요가 없는 요청이었다. 주변에서 귀찮게 구는 간 큰 녀석들이야 아마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통해서 쫓아낼 수도 있을 테고. 내가 아는 빛의 전사는 딱히 그런 별 거 아닌 녀석들에게 휘둘리면서 지낼 존재가 아니었다. 농담을 한 것일지 생각하면서 어리둥절하게 서 있자니 페르켈렛이 다시 골목 바깥으로 발을 옮겼다.

 

중요한 얘, 얘기는, .”

, 잠시만요.”

, 대가인가, 뭔가 하는 그, 그건, , 한 바퀴도는 걸보조, 하는 걸로.”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놓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나는 곧장 상점가로 이동하는 상대를 따라가면서 자꾸만 얼굴을 확인했다. 일전의 경우와는 달리 그는 나를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표정 변화 역시 없었다. 이내 페르켈렛은 구부정한 자세로 도시의 물품 보관함을 찾았다. 창고지기와 대화를 나눈 그는 이내 살짝 사용감이 있는 장비 몇 개를 들고 돌아왔다.

 

챙겨.”

 

그가 방어구를 떠넘겼다. 나는 얼떨떨하게 받아들면서 건네받은 물품들이 비에라의 체형에 딱히 잘 맞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굳이 따지자면 그것은 내가 입기에 더 적합해 보이는 의복이었다. 몸을 반 돌린 페르켈렛의 새까만 눈동자가 가죽 갑옷의 표면에 머물렀다.

 

, 지인들에게 얘얘기만, 하고, 바로, 간다. 채비는 하, 할 줄 알겠지.”

 

그는 황망하게 서 있는 나를 두고 또다시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눈치껏 판단하자면 채비하라, 는 뜻이 방어구를 챙겨 입으라는 뜻이 될 것 같기는 한데. 정작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는지 정하지도 못한 탓에 자리를 뜨기 망설여졌다. 길바닥에서 갈아입어야 하냐고 항변이라도 할까 하던 차였으나,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사이 페르켈렛은 모습을 감춘 뒤였다.

 

숙소에 들렀다가 돌아왔을 때 나는 본래 우리가 있었던 자리에서 낯선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는 검은 머리 비에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당혹감을 온몸으로 표하며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중이었다. 가까워지기 전부터 그가 떠들어 대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다.

 

아니 그런 의뢰는들을 필요가 없다니까요? 다들 이 얘기 들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오래 아, 안 걸리지만. 연락, 잠시 안 닿는다.”

새로 생긴 던전이라고요. 한 번에 여러 명이 들어갈 수 있지도 않고 최대 인원이 세 명이에요. 분석도 안 된 던전에서 무슨 보석을 잃어버려요?”

 

대화하는 페르켈렛이 꼭 이전에 후드를 쓴 사람을 마주할 때와 같이 무뚝뚝한 낯을 하고 있다는 게 다소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에 대화하고 있는 대상은 일단 그의 동료로 추정되는 누군가였다. 심지어 걸치고 있는 옷이나 장신구를 보면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오직 나뿐만이 아니었다. 광장의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가장자리를 따라 걷고 있는 것을 보며 자리를 비켜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 저 녀석.”

 

페르켈렛이 나를 가리켰다. 그대로 몸이 굳었다.

 

저 녀석, , 데려가니까.”

 

척 봐도 강해 보이는 인상의 마법사는 나를 확인했다가 떫은 입 모양을 했다.

 

그냥 민간인이잖아요.”

, 괜찮아.”

정말 안 될 것 같으시면 중간에 나오는 거예요. 온갖 부탁을 다 들어주고 다니셔서 걱정이 많아요, 다들.”

 

페르켈렛은 엉성하게 고개나 끄덕이면서 상대의 길어지는 잔소리를 듣다가 조금 더 지난 뒤에야 풀려났다. 그는 주변 시선은 거의 신경도 쓰지 않고 직행해 주변에서 탈것을 찾았다. 나는 슬쩍 뒤로 다가가 속닥거렸다.

 

누구신가요?”

, 새벽이라고 하는 모, 모임 소속, 이라고 하, 하면, 알아듣나.”

 

당연하게도 이름까지는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직접 속한 인물과 어떤 교류를 한 적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내가 유명인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새벽 소속의 마법사를 두어 번 곁눈질했다.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요.”

 

페르켈렛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나를 보지 않은 채 출발할 채비부터 했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 가끔은부러울 정도군.”

?”

, 정말, 걱정했다면보내지, 않았겠지.”

 

페르켈렛은 그 이상을 부연해 주지 않았으므로, 던전까지 가는 내내 그의 말뜻을 곱씹어 보는 것은 내 몫이 되었다. 분명 그 조소 섞인 부럽다는 표현은 나한테 던져진 것이었는데. 상대와 같은 자보다 내가 더 가진 것이 많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동안 2인용 탈것은 곧 스러져 가는 아주 낡은 유적 앞에 도착했다.

 

도착할 때까지 비에라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나눈 대화만으로도 그에게 충분한 피로감을 준 것 같았다. 그는 어느 시점부터는 거의 손짓과 끄덕거림만으로 의사를 표현했으므로 수신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움직임에 계속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페르켈렛은 동굴 앞에서 내린 뒤 곧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따라 걸음을 옮기던 나는 귀를 긁는 것 같은 소음에 멈칫했다. 목소리 같은 것이 얼핏 들리는 것 같았는데,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언어는 아니었다. 페르켈렛은 그 어떤 반응도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가고만 있었으므로 나는 그것들이 그리 크게 신경쓸 만한 소음이 아니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통로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담쟁이 덩굴이 무성해졌다. 햇빛이 닿지 않아 말라 죽는 것이 당연할 법한 공간임에도 그랬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몇몇 이파리가 옅은 연녹색을 발하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평범한 식물은 아닌 모양이었다. 비에라나 미코테나 야간에 눈이 그리 어두운 민족은 아니었다. 덕분에 우리는 횃불이나 별다른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주변을 충분히 확인하면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따금씩 귀를 건드리던 쇳소리와 웃음소리는 어둠 깊은 곳으로 이동할수록 점점 더 뚜렷해졌다. 마침내 바닥이 둥근 공터 같은 공간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이 소음에 대해 언질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라 페르켈렛이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닿은 탓이었다. 우리가 있는 곳의 벽은 돌로 되어 있었으나, 사방이 빛나는 식물로 뒤덮인 탓에 흡사 어두운 하늘과 같이 푸르스름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을 꺼냈다.

 

", 빛의 전사님."

 

페르켈렛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흐린 빛 속에서 유독 어두워 보였다. 나는 아주 기이한 불안감을 느꼈다.

 

"계속 들리는 이 소리, 뭔가요?"

 

비에라의 귀가 모로 돌아갔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기색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문득 목 뒤가 차가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로 그가 소음에 신경을 쓰지 않는 이유가 듣지 못해서, 였다면? 빛의 전사라면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긴 하겠지만, 일이 다 끝났을 때 내 목도 붙어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 마도사, 였던가."

 

페르켈렛이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같은 순간 주변의 소음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텅 빈 공간에 완벽한 고요가 들이차자 사지를 스치는 냉기가 유독 뚜렷하게 느껴졌다. 나는 페르켈렛의 질문과 소음 사이의 연관성을 찾으려 노력했다.

 

"마도사는 혹시 그런 소리를?"

 

같은 순간 소음이 폭발했다. 까득까득까득까득까득 끼릭끼릭끼릭끼릭 까르르르까르르르까르르르까르르르 달군 바늘이 귓바퀴를 쑤시는 것 같은 속닥속닥속닥속닥 바스락바스락바스락 깔깔깔깔깔 킥킥킥킥킥 우둑우둑우둑 쉬이이이. 나는 정신을 짓이기는 소음 속에서 귀를 붙잡고 비틀거렸다.

 

무엇인가가 공터 중앙에 있었다. 그것은 검고 거대했으며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것이 도저히 신성한 것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그 시선을 필사적으로 무시하려 애쓰면서 고개를 돌렸다. 식은땀이 흡사 살갗을 타고 미끄러지는 파충류의 비늘과 같이 미끄러졌다.

 

던전 탐색 같은 것은 나의 적성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런 것은 더욱이 나에게 익숙한 작업일 수가 없었다. 시야가 번졌다. 제대로 주변을 볼 수가 없었다. 사방의 식물은 불결하고 축축한 벽을 타고 자라며 사방으로 그 옅고 푸르스름한 녹빛을 흩뿌렸다. 소음이 이어졌다. 귀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물러서려 애쓰면서 서둘러 주변을 확인했다.

 

빛의 전사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낯빛이 읽히지 않는 것이야 예사 일이라지만, 이번만큼은 느낌이 달랐다. 그는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검은 형체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나를 보고 있었는데, 동굴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빛이 등을 비추고 있었던 탓에 몸의 앞면은 검은 펜으로 칠해 놓은 것과 같이 새까맸다. 나는 그가 보이는 그 태도가, 동정도 무엇도 아닌 흥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의 반응을 그는 명백히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이 고통을 그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으면서, 도와 주려는 마음 깊은 곳에서의 동정심 없이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의 시선은 흡사 몸 일부가 짓이겨진 채 버둥거리는 벌레를 구경하는 소년의 것과 비슷했다. 나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그의 뒤에서 탑과 같이 솟은 검은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 , 저기."

 

목에서 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나는 페르켈렛이 흡사 밖에서 그러하듯이, 혹은 그보다 뚜렷하게 더듬거렸다. 페르켈렛이, 빛의 전사가, 영웅이 지독하게 낯설었다. 누나가 보았던 사람이 정말 그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질 정도였다. 몸이 떨렸다. 정확히 어느 쪽이 더 공포스러운지 알 수가 없었다. 저 너머에 있는 정체불명의 존재? 혹은 내가 여기에서 죽어간다고 하더라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만 같은 '빛의 전사'?

 

페르켈렛은 검은 덩어리가 팔처럼 보이는 것을 움직이는 순간 동시에 이동했다. 그가 나를 낚아채자마자 거의 동시에 등에서 둔통이 일었다. 나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신음했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냉기가 살갗을 찔렀다. 간신히 주변을 확인했을 때는 나와 페르켈렛이 있던 방향으로 곧게 이어진 직선의 얼음밭이 눈에 띄었다.

 

페르켈렛은 말을 거는 대신 다시 손짓했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르켈렛,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영웅'은 내가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시선을 마주했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주변 허공에서 무언가 흰 것이 부유했다. 페르켈렛은 그것에게 손짓했다가, 이내 들고 있던 지팡이로 메다꽂듯이 팼다.

 

나는 그 작고 흰 것이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것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생명체로 추정되는 덩어리는 돌바닥에서 나뒹굴다가, 이내 휘청거리는 몸짓으로 날아올랐다. 주변에 부서진 조각처럼 보이는 것이 흩뿌려져 발치가 반짝거렸다. 이내ㅇ 주변으로 희고 밝은 빛이 머무는 것을 감지했다. 영웅이 정확히 무엇을 한 것인지 깨닫는 데는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 걸리지 않았다.

 

"치유 마, 마법이, 원래 이런?"

 

내가 드문드문 끊기는 목소리리로 물었을 때 페르켈렛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곧장 낮은 목소리로 영창하는 것을 들었다. 분명 그는 주문을 읊는 순간만큼은 단 한 번도 더듬거리지 않았다. 마치 바깥의 세계에서는 질식해 죽어가던 심해어가 깊은 바닷속 어둠과 죽음으로 점철된 세계에서는 되살아나는 것처럼. 최초부터 자신이 살아 숨쉴 수 있는 종류의 땅은 이런 곳이었다는 듯이.

 

중앙의 검은 덩어리가 팔처럼 보이는 위족을 펼쳤다. 나는 그것 너머에 사람의 인영으로 추정되는 것이 있는 것을 보았다. 언제 먼저 들어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자는 동굴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하며 거의 눈에 안 띄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페르켈렛은 배경에서 움직이는 자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지팡이로 허공을 그었다.

 

허공이 갈라졌다. 상처와 같이 벌어진 틈새에서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나타났다. 작열하는 빛 속에서 나는 그림자를 뭉쳐 놓은 것처럼 보였던 중앙의 어둠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날개를 달고 있었으며 검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흰 얼굴에 칼집처럼 새겨진 눈은 홍채가 없고 공막이 온통 검었으며, 뺨을 타고는 오물처럼 끈적하고 까만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불덩어리가 그것에게 내리꽂혔다. 사방으로 불똥이 튀면서 대적하던 생물이 비명을 질렀다. 흡사 모든 정령의 왕과 같이 아름다웠던 낯짝이 녹아내렸고 옷은 불에 탔다. 사방에 수레바퀴 모양의 문양이 드리워졌다. 영웅은 자기가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나를 한 발 옆으로 끌어왔다. 곧바로 문양이 새겨졌던 자리에서 거꾸로 자라는 고드름과 같이 얼음의 창이 솟구쳤다.

 

페르켈렛은 멈추지 않고 두 번 더 영창했다. 몸부림치는 불덩어리 위로 흡사 후광과 같이 수십 개의 번쩍이는 칼날이 드리워졌다. 그것은 번개였다. 천벌이었다. 나는 멍하니 서서 분명 사람을 닮은 것의 살갗이 찢어지고 내장이 흘러내리며 검은 피가 바닥을 적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액체는 웅덩이처럼 고여 돌을 타고 서서히 번져 나갔다.

 

'그것'이 쓰러지자 몸체는 가루로 변하여 완전히 사라졌다. 핏자국조차 사라지고 나자 더 안쪽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지는 문이 나타났다. 페르켈렛은 문 방향을 건너다보더니 그 근방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를 쫓아가면서 한 발 늦게야 문 바로 옆에 어떤 상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던전의 구조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아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보통 이런 식으로 무언가가 놓여 있다면 보상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 정도야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있다면, 잃어버렸다는 보석이 던전 보상으로 존재하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영웅은 주변을 전혀 확인하지 않고 상자 방향으로 직행했다.

 

우리가 완전히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 누군가가 달려와 궤짝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 자는 안에서 무언가를 낚아채 간 뒤 곧장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페르켈렛이 싸우는 동안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녀석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당혹감에 그가 사라진 자리와 영웅을 번갈아 보고 있으려니, 페르켈렛이 손짓을 했다. 빛이 쏟아지는 문 방향이었다.

 

나는 잠자코 시키는 대로 이동했다. 밝은 곳에 있을 때의 상대는 그렇게까지 무섭지 않았다. 직전에 일어났던 정체불명의 공포심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페르켈렛이 조용하게 나를 지켜보았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온 불안이 분명 나의 생물로서의 생존 본능해서 기인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을 통과해 도착한 곳은 두 번째 방이었다. 통로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의외로 나타난 장소는 동굴 형태가 아니었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일종의 절벽 구조물이었으므로 나는 난간 없는 짧은 직선 길을 건너가면서도 꼬리의 털이 서는 느낌을 받았다. 중앙에는 이미 누군가가 서 있었으며, 그 누군가의 너머에는 다소 익숙한 차림새의 불청객이 자리했다.

 

얼굴을 직접 본 적이야 없었으나 분명했다. 앞서 페르켈렛에게 보석을 찾아 달라고 의뢰했다던 길거리의 그 후드 쓴 작자가 분명했다. 공간이 좁지는 않았으나 탁 트인 하늘에서부터 불어 오는 바람이 그의 옷에 밴 냄새를 실어 옮겼다. 그러므로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우리를 발견하자 짧게 탄성을 질렀다.

 

"역시 빛의 전사, 당신을 여기에서 뵙고 싶었습니다."

 

나는 페르켈렛을 확인했다. 바로 옆에 서 있는 그는 무덤덤한 낯이었다. 중앙에 서 있는 존재는 온 몸이 검고 머리카락은 희었는데, 조각상처럼 보이는 그것은 우리가 바로 직전에 처리한 어둠 덩어리와 명암을 반전한 것 같은 색채를 띠고 있었다. 움직이지는 않는 상태였다. 후드를 쓴 자가 연설했다.

 

"다들 영웅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심도 없이 그 사람이 자신들을 도와 주리라고 생각하지요. 실제로 위대하신 빛의 전사는 자신과 별 관련도 없는 잡일들을 친히 도와 주시지 않습니까? 지금처럼요."

"이봐."

 

페르켈렛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의 사용인으로서 무언가 말을 얹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적어도 페르켈렛이 말을 했던 바에 따르면, 그는 원래는 귀찮게 구는 보석 탈환자 녀석들을 도와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 같았다. 물론 여전히 페르켈렛이 무슨 사유로 이 임무를 받아들였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아 없이 남의 도움 요청이나 들어 주고 다니는 바보로 묘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아무 대가 없이 타인을 돕는 자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저는 생각했습니다. 분명 빛의 전사에게는 어둠이 있다. 그는 명예를 얻어 무언가 달성하려는 것이 있다. 그는 분명 선한 자가 아니며, 내 그 진실을 모두에게 알려 어리석게도 그의 위업에 현혹되지 않게 막고야 말리라."

"그런 사람이."

"그리고 저는 직전에 보았습니다. 동료가 괴로움에 치를 떠는 동안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던 당신을요."

"그런 게 아닙니다. 실제로 도와주셨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페르켈렛이 실제로 나를 도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가 아주 순선한 자라기에는 그 순간 내가 마주할 것이 지나치게 컸던 탓이었다. 빛의 전사에게는 공허가 있었다.

 

"지켜보는 자가 있는 동안에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볼까요. 정령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후드를 쓴 자가 손을 들어올리자 중앙에 서 있던 형상이 입을 벌렸다. 그 안에서 쏟아지는 소음은 내가 들어오면서 들었던 속살거림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아주 뒤늦게야 그것이 정령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곧바로 떠오르는 것은 페르켈렛이 사용한 백마법이었다. 정령의 목소리는 보통 사람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으나, 당장 들어온 던전의 어떤 특수성으로 인해 백마도사가 아닌 자에게도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페르켈렛은 항상 그런 소음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상한 소리에 대해 물었을 때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던 걸까. 그렇다면 뒤이어 그가 보였던 기이한 흥미는 무엇에 대한 것이었던가. 생각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동안 곁에 서 있던 마법사가 팔을 움직였다. 정령에게서 번져 나간 덩굴이 주변을 휘감았고 그것이 닿은 자리가 녹아내렸다.

 

페르켈렛은 미동도 없이 주문을 사용했다. 허공에 수십 개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 힘은 분명 불온한 것이었다. 하늘을 무너뜨릴 것 같은 불덩어리가 마법진에서부터 잉태되듯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정령은 쇳소리 섞인 비명을 지르며 우리에게 돌진했다. 나는 그것의 손톱이 우리에게 닿기 전, 쏟아진 열기가 그것을 짓찧어 죽이는 것을 보았다.

 

거대한 정령은 불 속에서 짓이겨졌다. 정령과 자연으로부터 사랑받는 자는 그 어떤 죄책감의 기미도 없이 그 죽음을 쳐다보다가 당황한 기색으로 물러서는 검은 후드의 불청객에게 접근했다. 불청객은, 우습게도 자신이 명령을 내려 조종하는 정령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삿대질하며 소리를 쳤다.

 

"당신이 뭘 할 수 있어! 당신이 뭘 할 수 있는데! 앞으로 평판이 안전할 줄 알아?“

 

나는 페르켈렛을 뒤쫓아 갔다. 영웅은 대상에게서 살짝 떨어진 거리에 섰다. 그의 귀가 뒤로 돌아갔다. 페르켈렛은 상대가 아닌 나의 움직임을 듣고 있었다. 후드를 쓴 자가 주먹을 말아쥐고 달려들었다. 나는 곧바로 영웅의 앞을 막아서며 낯선 자의 배에 주먹을 메다꽂았다. 그의 공격은 내 뺨을 스치고 떨어졌다.

 

등 뒤에서 강풍이 불었다. 나는 비틀거리다가 문득 나의 손목을 잡는 힘을 느꼈다. 바람이 몰아칠 때 코앞의 대적자는 휘청거렸다. 그의 몸이 뒤로 기울어지는 순간 나는 우리가 이미 공간의 경계면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후드가 반쯤 벗겨지며 놀란 얼굴이 나타났다. 넘어진 자의 모습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바람이 멎었다.

 

, 지겨워도 하지 아,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게 이, 있다.“

 

페르켈렛이 말하면서 팔을 놓았다. 나는 죽음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우연히분 바람의 탓으로 돌려도 될지를 생각하며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페르켈렛이 물러서며 말했다.

 

이젠됐어.“

 

그 말을 할 때, 그는 꼭 동굴보다도 늙은 영혼을 지닌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내가 단 한 순간이라도 페르켈렛이라는 사람을 알았던 적이 있을지 의문을 품었다.

 

, 나한텐개인, , 필요하지않아. 이제 가, 가 봐도 좋아.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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