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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슬퍼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나니 (세라 베르제리카) |
마법사들은 과학을 몰랐다. 그들은 머글과 유사했지만 강한 마법은 곧잘 기계를 망가뜨리고 두 문명 사이의 경계를 그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혈이나 머글 집안에서 온 아이들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가끔은 마법사들도 저 너머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영향을 받곤 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물 건너 미국에서는 행동주의라는 심리학 분파가 위세를 떨치던 시대였다.
방학식이 끝나고 열차는 달려 승강장에 도착했다. 쌓은 짐가방 위에서 홍차색 올빼미가 높은 소리로 울었다. 세라는 몰려나오는 사람들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가 툭 어깨를 건드렸다. 세라가 고개를 들었다. 저보다 두 뼘은 더 큰 키와 선명한 그리핀도르의 붉은색 교복. 케이트 베르제리카, 그의 언니였다.
“가자, 아빠가 밖에 차 대기시켜 두셨대.” “언니, 이번에 그리핀도르가 제일 기숙사 점수가 낮더라.” “어쩌라고? 빨리 가기나 해.”
베르제리카 가문은 순혈 가문이었으나, 가문의 구성원들은 전반적으로 조용했다. 슬리데린과 래번클로가 제일 많지만 가끔은 후플푸프나 그리핀도르 출신도 나오는 혈통. 그들은 머글들에게 다정한 편이었으며 약한 것들에게 너그러웠다. 그들의 폐쇄성은 다소 특수한 방향에서 기인했는데, 이 특수한 방향이란 그들의 피를 타고 내려오는 재능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들의 집은 승강장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더 정확하게 말해, 그들의 저택은 도시 외곽 평야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끝에 숲과 강이 있는 넓은 평야가 모두 가문의 것이었다. 먼 옛날에는 땅을 빌려 밭으로 일구는 사람들도 존재했다고 했다. 이제는 전설에 가까운 옛이야기였으나.
바퀴가 저택 정문 앞에서 멈췄다. 문을 열고 내리면 철창으로 된 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여인이 팔을 벌렸다.
“어서 오렴. 별 일 없었니?” “엄마!”
케이트가 베르제리카 부인의 팔로 뛰어들었다. 세라는 어깨에 티아를 얹은 채 그 뒤에 얌전히 서서 기다렸다. 베르제리카 부인 뒤에 서 있던 집요정이 손가락을 튕겼다. 남아 있던 짐들이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여인은 집요정이 있는 방향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방 청소는 다 했니?” “예, 부인.” “짐도 갖다 뒀으면 이제 식사라도 하러 가거라.”
케이트가 무언가를 떠들어 대고 있었다. 엄마, 그거 알아? 걔가 나한테 고백했어. 다들 부러워하던 거 있지…. 베르제리카 부인은 딸의 허리에 팔을 감고 집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라는 안경을 한 번 고쳐 쓰고는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부인의 시선은 둘째의 얼굴에 머무르다가 이따금씩 뒤따라오는 막내에게로 넘어가곤 했는데, 세라는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저택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기 전에 티아는 세라의 팔을 놓고 날아가 버렸다. 일전에 샘의 어깨에 앉아 있을 때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더니, 역시 주인이 횃대로는 영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면 3층의 방 창문 안으로 날아 들어가는 깃의 끝이 언뜻 보였다. 앞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고, 세라는 앞서가던 모녀를 빠른 걸음으로 따라 들어갔다.
침묵은 가끔 질문보다 많은 것을 암시했다. 그들이 직접 말을 걸지 않는다고 해서 관심조차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세라는 알았다. 저택의 공기는 버석하게 차가웠고 복도 벽에 줄지어 걸려 있는 초상화들은 온기를 가진 인간을 응시했다. 어떤 액자 밑에는 화병이 있었고 어떤 액자 위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림들은 서로의 영역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으므로, 아마 커튼이 쳐져 있다고 해도 그 액자의 주인은 어딘가에서 사람들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세라는 붉은 벨벳에 잠시 시선을 두다가 마저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베르제리카 부인이 세라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둘째가 자기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은 뒤의 일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직후는 마침 차를 마실 시간대였고, 베르제리카 씨가 다시 밖으로 나간 사이 그들은 집요정들이 준비한 허브차를 마셨다. 빈 그릇이 빠져나가 개수대로 들어가고 스콘이 가득 든 접시가 세라의 앞에 놓였다. 베르제리카 부인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딸을 넘겨다보았다.
“그래서 세라, 얘야. 너는 학교가 어땠니?” “좋았어요. 재밌는 애들도 많았고, 보고 싶었던 것도 많이 봤거든요.” “벌써 연애하는 애들이 생겼어?”
케이트가 물었다. 세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애들끼린 아직! 그래도 첫사랑이 있는 애들이 있던걸. 니나라는 애는 벌써 애인도 있댔어.” “친구는 많이 사귀었니?” “네, 엄마. 참, 이번에 애들이 잠시 놀러 오기로 했어요. 하나는 아마 좀 일찍 올 텐데, 집에서 안 나가고 놀기로 했고, 하나는 헨즐리 집안사람이에요.” “아아, 순혈 가문이로구나.” “네. 그리고 착해요. 제 방에서 놀고 간 다음에 그 애 집으로도 같이 가기로 했는데. 거기서는 또 다른 애랑 같이 놀 건데, 키가 정말 커요. 저하고 책 교환도 하기로 했어요.” “주소도 받아 왔어?”
케이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불쑥 끼어들었다. 세라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응, 언니. 애들 주소 거의 다 받아 왔는걸. 참, 어떤 애가 나한테 꽃다발도 보내 준대.” “벌써?” “아니, 언니. 그런 꽃다발 말고!”
세라는 그러면서 품에 손을 넣었다가 금방 자신이 양피지 뭉치를 가방에 넣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아마 이브닝으로부터 받은, 방학 때 뜯어보기로 한 편지도 거기 있을 것이었다. 케이트와 베르제리카 부인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 중 하나가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던 찰나 작은 종이 울렸다. 케이트가 중얼거렸다.
“티파티 끝났네.” “들어가서 너희 일을 하거라, 얘들아. 집요정들을 귀찮게 굴면 안 돼. 참, 케이트.” “네, 엄마?” “얘기를 좀 더 하고 가자꾸나.”
세라는 느릿하게 의자를 뒤로 뺐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부분의 베르제리카 집안 사람들은 다정했으나, 그들에게는 본질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방음에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3층으로 가는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2층에 도착했을 때 세라는 빈 방의 문을 일부러 열었다 닫았고, 빈 복도에 서서 숨을 죽였다. 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나던 밑에서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별다른 소문은 없었니?” “없었어요. 그냥 여자 화장실에 좀 이상한 낙서가 생겼다는 정도? 쟤 글씨체인 것 같긴 하더라고요.”
잠시간의 침묵.
“역시 로맨스 소설을 읽히는 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었던 것 같지? 책에 적어 둬야겠구나.” “그래도 해가 되진 않았으니까요. 엄마, 셰이드 씨가 내일 미국에서 돌아온대요. 그때 좀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저 애도 이제 어리진 않잖니.”
음성은 더 작아졌고, 세라는 더 길게 엿듣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발소리를 죽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저택은 낡았으나 우아했다. 계단이 삐걱거리는 일은 없었다.
어떤 아이들에게 이야기한 바와 같이, 베르제리카 집안은 범죄로 유명했다. 물론 ‘유명하다’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죄를 저지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순혈 우월주의자들이었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또다른 순혈 우월주의자들이었다. 나머지 집안 구성원들은 그러한 존재가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점을 슬퍼하며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집안에서는 주기적으로 재능의 소유자들이 태어난다는 점이었다. 어떤 집안에서 항상 보석 공예를 하는 사람이 태어나고, 어떤 집안에서 예언자가 태어나듯이.
20세기 중반은 머글들의 세상에서는 행동주의의 시대였다. 머글들은 보상과 처벌로 모든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마음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베르제리카 가문이 순혈 가문으로서 머글들을 어리석고 귀여운 존재로 여기긴 한다지만, 그들도 배워야 할 것을 배울 줄은 알았다. 인간이 개나 물고기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처럼. 그들의 다정은 시혜적이었고 마법사의 우수성은 굳이 증명할 필요도 없이 명백한 것이었다. 머글들 때문에 자존심에 손상을 입을 이유가 없다는 의미였다.
방에 들어와 선 세라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꽂이를 응시했다. 죄다 로맨스 소설이었다. 호그와트에 입학하기 전 세라가 받은 보상의 산물이기도 했다. 집안사람들은 세라의 재능을 억누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많이 배운 아이만이 사랑을 베풀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가족들이 읽힌 것이 로맨스 소설이었다. 재능이 있다고 사랑을 모르지는 않는단 걸 그들이 제대로 깨달은 건 나중의 일이었다.
“흠.”
1층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우울해질 뿐이었으므로, 세라는 좋은 것들을 생각하기로 했다. 방학 기간에 수조에서 키우는 동물이 대체 뭔지 말해 주겠다고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외에도 받을 편지가 많았다. 연락들. 비밀들. 약속.
누군가 노크를 했다.
“들어와.”
여전히 붉은 그리핀도르 망토를 두르고 있던 케이트 베르제리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사랑 많이 받았어?”
그가 선택한 모든 어휘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라는 알았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
“애들이 굳이 그렇게 사랑받으려 애쓸 필요는 없는 거라던데, 언니.” “누가?” “친구들이.” “네가 더 애쓸 필요 없이 잘 했나 보네.”
세라는 잠시 케이트의 표정을 읽었다. 그가 인사를 하고 문을 닫으려던 찰나, 세라가 말을 던졌다.
“왜 사랑받아야 해, 언니?”
닫힌 문 너머에서 케이트가 말했다.
“사랑받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해.” “왜?” “그간 우리 둘이 배운 건 어디로 간 거야, 세라?” “그렇지만 내 친구들은 그거 이상하다고 하던데. 내가 배운 대로 열심히 설명했는데 다들 불행하지 않냐고 했어.” “그 애들이 어려서 그래.” “정말?” “이따 큰언니하고 얘기해.”
밖이 정말로 조용해졌고, 세라는 잠시 문을 응시하다가 침대에 앉았다. 납득할 수 없다면 순순히 변하지도 않을 거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가족들은 그에게 한 가지를 교육했다. 올바른 행동을 하면 보상을 받았고 잘못된 행동을 하면 처벌을 받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들의 교육은 세라의 삶에서 가장 낮은 곳을 다졌다.
네가 남들에게 잔인하게 굴면, 남들은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왜? 아무도 아픈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세라, 너는 아픈 걸 좋아하니? 아니. 다른 사람들도 그래. 남들이 날 사랑하지 않으면 뭐가 나빠? 아무도 널 사랑하지 않으면 너는 살아갈 수 없어, 왜냐면 사람은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는 거거든. 도움을 받기 위해 다정하게 행동하는 거야? 꼭은 아니지만, 보통 돈을 빌려 줘야 받는 것처럼 다정도 내어 줘야 받을 수 있어. 으응. 살아남으려면 사랑받아야 돼. 응.
기반이 뭉그러지고 있었다. 세라는 자신이 받은 질문들을 생각했다. 질문에는 답이 와야 했다. 그는 가족들이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잘못된 자리를 밟을 것에 대한 두려움. 실수와 평판의 추락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정말 피하고 싶다면 답을 제대로 주는 게 좋을 거였다. 친구와 약속한 게 있으니까 범죄는 저지르지 않겠지만, 세라 베르제리카는 선천적 공감 능력 결핍이었으므로.
그에게는 스스로 답을 낼 능력이 없었다. |
2월: 정상성 증명 (세라 베르제리카) |
손님들에게는 차마 하지 못할 고백이었으나, 기어코 정상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어둠의 약물 따위나 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버러지들 사이에서의 우월 의식이었다. 날 때부터 ‘이상하게’ 태어나 수년을 아등바등 애써 온 저는 버젓한 가게도 냈는데, 멀쩡하게 태어났으면서 더 깊은 수렁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모습이란! 세라는 망토를 여몄다.
“참. 딱 드릴만한 약이 하나 있어요.”
마법약 상점 ‘포피’에는 총 세 개의 입구가 있었다. 런던 방면으로 난 문은 다소 허름한 약국의 모습을 띠고 있었는데, 창은 늘 어두워 영업을 하지 않는 가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근처에 병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웬만한 머글들은 약국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유리문을 열고 짧은 통로를 지나면 단박에 화려한 금빛의 실내가 펼쳐지는데도. 물론 만일의 일이라는 게 있었으므로 런던 지점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머글 세계에서 살아가는 마법사들을 위한 필수 물품 정도나 마련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점원의 안내를 따라 눈을 감고 2층으로 올라가면 훨씬 더 큰 공간이 나왔다. 계단 끝에 서서 보면 멀리 창을 통해 부엉이들과 뾰족 모자를 쓴 마법사들이 보이기도 했다. 모여든 사람들을 헤치고 밖으로 나가면 바로 다이애건 앨리였다. 아이들이 건드려도 괜찮은 약들은 진열대에 전시되었고 건드렸다간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것들은 카운터 뒤에 자리했다. ‘1층’과 ‘2층’의 관리를 세라는 온전히 고용한 사람들에게 맡겼다. 2층에서 키우는 마법 생물들의 관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하’, 가장 음침한 마법 상가로 나가는 문이 있는 곳을 온전히 그 혼자서 관리해야 했기 때문에.
세라는 후드를 푹 눌러쓴 손님을 향해 새까만 액체가 든 약병을 흔들어 보였다. 세상의 모든 빛을 먹어 버릴 듯이 새까만 주제에 약은 맹물처럼 묽게 찰랑거렸다.
“살아있는 죽음의 약 기능을 극대화한 제품이랍니다. 그래서 다시, 어디다 쓴다고 하셨죠?” “중요하지 않잖아.” “손님의 만족도는 저희 가게의 자랑인걸요. 사용처에 따라 방식이 달라진답니다.”
혀 차는 소리. 거의 들리지도 않는 속삭임에 세라는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마신 사람이 죽지 않길 바라신다면….” “죽어도 상관없어.” “저런, 손님. 그래도 죽음보다 잔인한 것들이 많잖아요? 자. 이 약을 먹은 사람은 바로 쓰러져 잠들게 된답니다. 해독제를 먹고 한 시간이 지나기 전까진 깨어나지 못하죠. 관이 땅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 입에 이 약물을 부으세요.”
세라는 새빨간 액체가 든 더 종 모양 병을 꺼내들었다. 손님이 테이블에 갈레온 주머니를 떨어뜨렸다. 세라는 손끝으로 주머니를 벌려 든 것을 확인한 뒤 병을 틀어쥔 손을 펼쳤다.
“며칠간 땅 속에만 머무르게 된다면 땅 정령일지라도 조용해질 거예요.”
말을 얹은 세라가 빙그레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손님은 대꾸 없이 약병을 쥐고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자 미소 역시 사라졌다. 세라는 느린 걸음으로 움직여 빗장을 걸고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1층에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던 점원은 발소리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라는 갈레온 주머니를 내밀었다.
“금고에 넣어 둬요. 지난달에 돈 빼내려다 온몸이 퉁퉁 부어서 쓰러진 멍청이처럼 굴진 말고요.”
마침 털옷을 입은 손님 하나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세라는 다시 녹턴 앨리 지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떤 의미에서는 바라던 날들이었다. 자신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세라 베르제리카는 항상 정상의 범위에 들어오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녹턴 앨리에서도 물건을 판다는 점을 제외하면 세라의 생활은 완벽하게 일반인의 궤도에 들어온 상태였다. 공주도, 왕자도, 불을 뿜는 용도 없지만 최소한 결핍이 폭로될 걱정은 없는 삶. 눈이 반쯤 멀어 버리긴 했지만 편지는 패트로누스로 보내면 될 일이었고, 글은 집요정으로 하여금 읽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웬만한 제조법은 자동 깃펜에 의해 기록됐고 대부분은 머릿속에 그대로 남았다. 지하로 돌아온 세라는 낡은 의자에 푹 주저앉으며 눈을 감았다. 지겨웠다. 뭐가 문제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열일곱에 그는 이미 동화의 여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스스로에게 판결을 내린 바 있었다. 눈이 나빠진 이후 불가능한 것에서는 아예 손을 떼는 버릇이 들었으므로, 세라는 천천히 관심을 로맨스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꼭 성애적인 사랑이 필요한 건 아니라는 지적을 수용했고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는 게 뭔지 다시금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론이 이거였다. 3층짜리 마법약 상점.
이제 그를 이상하다고 손가락질할 사람은 드물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그리고 애초에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굳이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할 만한 위인들이 아니었다. 일단 대부분은. 그에게는 돈 없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재력이 있었고, 없는 사람들이 탐하는 마법약 제조 실력도 있었다. 이만하면 완벽히 일반의 세계에 발을 들인 셈이었다. 결핍 때문에 세계에서 배척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사랑 없이도 그는 ‘행복했다.’ 정확히는 행복해야 했다. 로맨스 소설이 끝난 뒤의 주인공들처럼.
“아라니아 액서마이!”
신경질적으로 지팡이를 휘두르자 빗장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창문 너머로 지나가던 행인이 움찔 멈춰 섰다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세라는 코를 훌쩍이고는 근처에서 담요를 끌어다 몸에 덮었다. 아무래도 오는 놈들이 죄 이상한 놈들이니 가구는 불을 맞고 폭발해도 되는 싸구려들로만 꾸려 놓은 상태였다. 망가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 좋았지만 건강에는 나빴던 눈치였다. 근래 그는 항상 감기를 달고 살았다. 앞도 안 보이는 와중에 목까지 아프니 고문이 따로 없는 것이었다. 감기약을 하나 만들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다시금 노크 소리. 세라는 담요를 치우고 다시 지팡이를 휘둘렀다. 부드럽게 빠져나간 빗장이 바닥에 놓였다. 땅딸막한 마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실내로 발을 들였다. 대충 보아도 아이였다. 세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돈을 갖고 오긴 했을까.
“필요한 거라도?” “두꺼비 독을 구하려고 하는데, 이야기도 받는다고 들어서요.” “특정한 이야기만 받는답니다. 뭘 줄 수 있어요?”
작은 마녀가 주위를 살폈다.
“제가 듣기로 마법부에서 겨우살이병의 해독제로 인체 연성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매개로 쓰이는 게 얼음왕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어떤 약초의 뿌리라고….” “지난번에 들은 헛소문이로군요. 최소한 제일 먼저 가져온 사람이었으면 몰라. 가치 없는 이야기는 받지 않는답니다.” “외, 외상으로라도 주세요!”
세라가 눈썹을 올렸다. 작은 마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품에서 동전을 꺼냈다.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였다.
“구, 구해 가지 않으면 제 두꺼비를 죽이겠다고 했어요.”
뭔가 말을 얹으려던 세라는 입을 다물었다. 찰나의 순간 눈이 반짝였다가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좋아. 잔금은 외상으로 하죠.”
녹턴 앨리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규칙이었다. 그런 인정 따위를 보이는 곳이 아니었다. 세라는 손님이 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아마 더 큰 못된 아이들이 애완 두꺼비를 희생양으로 삼아 애를 여기까지 보낸 것일 터였다. 아마 이 꼬마 손님 본인에게 직접 마법을 썼다가는 일이 커질 테니 그렇게는 하지 않을 텐데. 두꺼비는 세라의 기준에선 그렇게 귀한 애완동물도 아니었다. 죽어도 그냥 새 것을 구하면 될 일인데. 말들이 목 언저리에서 머물다 사라졌다. 조언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단, 두꺼비 독을 그 녀석들한테 직접 발라 주고 내가 볼 수 있게 기록까지 해 온다면 돈 대신 그걸 받겠어요.” “네?” “싫어?”
세라는 지팡이를 휘두른 뒤 날아오는 병을 낚아챘다. 마녀가 후드를 더 깊게 눌러 썼다.
“한, 한 시간 뒤에 다시 올게요.”
세라 베르제리카는 대꾸하는 대신 중얼거리며 병에 마법을 걸고는 손님에게 그것을 넘겼다. 푼돈이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작은 마녀는 들리지도 않는 인사를 하고는 도망쳐 사라졌다. 세라는 손끝으로 남은 동전들을 흩었고, 오래 전 밀려들었던 어떤 슬픔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 손님은 독을 사람에게 바르지 못할 거였다.
근래 들어서는 책 대신 극을 구경하러 가기도 하는 편이었다. 한때는 좋아했을 법한 이야기가 근래는 지겹기만 했다. 파멸과 불행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이야기는 그만 보고 싶었다. 세라는 어렴풋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깨달았다. 필요의 방에 간 날부터, 아니, 사랑의 묘약이 목표를 이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날부터 그의 열정은 새로운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혹자는 사랑이라고 부를 것. 그러나 보통의 사랑과는 다소 결이 다른 무언가였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감기약 생각은 날아간 뒤였다. 언젠가 다시 지극한 이타심의 이야기를 보게 될 수 있을까. 극이나 책으로 볼 수 있는 죽은 이야기 말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으로 구경하게 될 수 있을까. 세라는 오래 전 학교에서 보았던 어떤 학생들의 다정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이 불행해져도 그걸 즐길 수 없다는 것. 타인의 슬픔이 그대로 밀려들어오는 삶을 살아낸다는 것.
신기한 삶의 방식이었다. 나름의 방식으로 아름답기까지 했다. 파멸과 추태로 얼룩진 사랑 이야기보다 더. 세라는 담요를 더 단단히 끌어다 덮었다. 정상 사회로의 편입은 그를 완전하게 만들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외부에서 날아 들어왔다 잡힌 혜성은 금성이나 목성과 마찬가지로 태양계에서 맴돌았으나 절대 행성은 되지 못했다. 세라는 자신이 아주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깨달았으며, 동시에 그것과 사랑에 빠졌다. 아주 어릴 적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사랑을 사랑하게 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언젠가 이타심을 이해하고야 말 거였다. 가장 다정한 여주인공들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 언젠가 놓아 버렸던 꿈마저 이룰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 매력적인 이타심의 이야기가 찾아오길 기다렸다. 때는 졸업 후의 어느 하루, 학창 시절이었더라면 새 학기 직전 방학이었을 날이었다. |
3월: 마피아 AU 로그 (세라 베르제리카) |
“네가 나에 대한 것들을 잊어 준다면, ‘우리’가 왔던 곳으로.”
“이제 괜찮아. 나랑 같이 가자.”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세라는 당장 제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닌, 더 오래 전에 알았던 페넬프티아를 생각했다. 배려심과 학습 능력을 둘 다 지능이라 친다면 세라는 한 쪽에만 모든 패를 투자한 부류였다. 본인이 선택해서는 아니고, 본디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상대의 새까만 눈을 응시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 같은 색을 띠는 ‘주제에’ 제 것보다 사려 깊고 다정한 눈. 눈가가 살짝 웃음으로 기울어졌다.
“그런데, 얘, 어디로?”
오만하게도, 세라 베르제리카는, 페넬프티아 A. 비로즈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
페넬프티아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흔들리는 전등. 소음과 함께 빛이 곁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노랗게 비췄다, 이내 느릿하게 멀어지며 둘을 어둠 속에 도로 처박았다.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세라는 페넬프티아의 목에 팔을 감았다. 내내 쓰러져 있긴 했지만 그 웃기지도 않은 대가리 내기가 페넬프티아의 ‘조커 카드’와 함께 끝났다는 점은 확실히 볼 수 있었더랬다. 고개를 숙이면 상대의 뺨에 머리카락이 닿았다. 바스락대는 소음. 그가 속삭였다.
“나만 잊고 끝내기엔 증인이 너무 많지?”
지하실에서 도망친 놈들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다음 순간, 세라는 티아의 손에서 총을 낚아챘다. 상대의 손이 움직였지만 세라의 움직임이 조금, 아주 조금 더 빨랐다. 그가 복도를 향해 총을 갈겼다. 한 발. 제일 늦게 달아나고 있던 놈의 등에서 피가 튀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시체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세라는 상대에게 무기를 도로 건넸다. 흘기는 눈.
“도망치는 비겁자들을 살려 두는 건 ‘우리’ 방법이 아니잖아요? 카포.”
피를 흘리며 방금 전까지 벽에 처박혀 있었던 사람이 할 만한 소리는 아니긴 했다. 그렇지만, 또, 세라라는 인간이 그간 정상적으로 행동했던 적이 있기나 했던가? 페넬프티아가 총 손잡이를 다시 쥐었다. 세라는 떨리는 손에서 총을 낚아채는 것이 생각보다 쉬웠던 것을 생각했다.
“세라.”
가는 목소리. 점멸하려던 정신이 그 목소리에 다시 되돌아왔다. 웃을까. 세라는 생각했다. 하는 말들만 듣고 있자면 지금까지 지하실에 갇혀 있었던 것이 제가 아니라 상대인 것만 같았다. 묻고 싶었다. 무엇이 두려워 그렇게 애원하듯이 말을 한 건지. 기밀의 누설이 두렵다면 혀에 총알을 박아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면 될 일이었다. 물론 세라의 주 업무는 마약 밀거래였으므로, 혀에 구멍이 뚫리면 업무에 지장이 갈 것이 분명했으나 카포의 권한으로 종목만 바꾸게 만들면 해결될 일이었다. 치료가 안 되어 죽어 버리면 더 좋은 거고.
그러나 동시에, 세라는 페넬프티아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는 계열의 것이기에 더 사랑스럽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가 팔을 늘어뜨렸다. 총 쏘는 법을 알았으므로 한 발 쏜 정도로 어깨가 나가진 않았지만, 걸음을 떼기에는 몸이 너덜너덜한 것도 사실이었다. 앓는 소리. 가식적인 징징거림.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아. 가자. 나가는 길에 만나는 녀석들은 다 죽여 버리기, 괜찮지?” “다들 도망친 상황에서의 살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암살이든 잠입이든, 목격자가 싹 다 죽어 버린다면 그것은 성공이 되었다. 굳이 페넬프티아에게 더 많은 짐을 지워 주고 싶지는 않았다. 세라와 함께하고 있는 사람은 지금 당장 제일 완벽했기 때문에. 세라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뗐고, 티아가 그를 부축하며 뒤따랐다. 죽어 버린 남자의 품을 발로 몇 번 짓누르자 빼앗겼던 약물 하나가 굴러 나왔다. 세라는 신음을 참으며 병을 집어 들었다. 닿는 것의 감촉이 손끝에서 찼다. 다시금 시선이 맞부딪혔다.
“그래서 정말 지원이 오는 중일까?”
긴 침묵. 세라는 상대의 얼굴에서 동요를 읽었다. 두려움은 아니었다. 차라리 죄책감에 가까운 것. 그 반응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는 정말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우리가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
답이었다. 세라는 인상을 쓰는 것처럼 웃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병을 던져 놓으면 일은 아마 약물이 알아서 할 거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온에서 가스 형태로 퍼지는 독을 제대로 못 관리한 이 조직 멍청이들 잘못이 될 테지.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가자.” |
4월: 만사형통 (화평) |
"의아해서 묻는 것입니다만. 저들에게는 생각이란 게 있는 것입니까?"
이조 집의 화평! 그가 누구였던가? 이백열 해 묵은 도깨비! 이조 판서가 죄를 지어 '모가지가 날아간' 현 상황에서는 대충 이조 내 권력 3위쯤 되는 작자였다. 사실 또 엄밀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그렇다고 보긴 힘들 수도 있겠지만. 성품이 곧으면서도 온유하기에 아주 오래 전 누군가는 휘어지는 대나무라 하여 그를 곡죽이라는 호로도 불렀더랬다. 그로서는 드물게 '펄펄 뛰는' 상황이었으나 화평은 자신이 썩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하고 있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으레 도깨비라 함은 불을 주로 다루는 영물이라. 개인차는 분명 있겠지만 불을 쓰는 자들은 내면에 뜨거움을 품을 수밖에 없고, 이 정도로 화를 내는 건 아주 절제를 잘 하는 수준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다른 도깨비들이 알면 달갑잖아할 사고방식이겠지만.
"혹여나 듣는 귀가 있을까 두렵소. 꼭 복도에서 얘기를 나눠야만 하는 것이오?"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얘기하는 것을 두고 무슨 책을 잡는단 말입니까?" "듣자하니 저들의 활동 사진이라는 것도 들어왔다던데 말입니다. 이 정도 기록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도...." "들으라 하지요, 우리를 좁쌀만큼이라도 존중한다면 그런 요구 따위는 해선 안 된다는 걸 그들이 정녕 모르겠습니까?"
목소리는 잠잠했으나 불규칙적으로 바닥을 찍던 지팡이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따라오던 대신이 짧게 혀를 차더니 웅얼거리는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떴다. 계속 함께 걸어 봤자 귀찮아지기나 할 것이라고 직감한 모양이었다. 이조 판서가 제 입으로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잡혀간 것이 최근의 일이었다. 소속 부서의 상황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으나 입을 다물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화평은 본디 생각이 굼뜨기로 유명한 치였다. 깊고 길게 생각하면 그럭저럭 걸출한 답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빠르게 판단하는 능력은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옛 성현의 말에 군자는 말이 느리고 행동이 빨라야 한다고 했으니 이 단점은 차라리 장점이 아니겠냐는 게 본인의 주장이긴 했다. 애초에 이조 집의였다. 남들 앞에서 바로바로 말싸움을 할 일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의미였다.
절뚝이던 걸음이 천천히 멎었다. 그새 너무 멀리까지 걸어온 듯 싶었다. 기둥에 어깨를 대고 지팡이를 쥐고 서서 화평은 잠시 하늘을 응시했다. 생각이 굼뜨다 해도 들은 것을 처리할 능력은 되었다. 서역 대사의 동행인 중 하나가 용에게 짓밟혔다고 했다. 그러면 그에 맞는 것이나 요구하면 될 것을. 홍야를 서역으로 데려가 심판 받게 하라느니, 사병을 데려오게 하라느니, 월미도를 측량할 수 있게 하라느니. 나라를 날로 집어삼키겠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애초에 함부로 동행인이 자리를 이탈한 게 문제 아니었던가! 어린아이들도 부모가 호랑이를 조심하여 뜰 안에서만 놀라고 하면 그 말을 들을 줄 알았다. 그런데 대사의 동행인쯤 되는 작자가 제멋대로 움직일 것은 또 무언가! 그가 정말 자의적으로, '실수'로 움직인 거라면 그런 이를 공식적인 자리에 데려온 서역 놈들이 멍청한 것이라는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그렇게까지 무지할 것이던가.
도통 정을 줄 수가 없는 작자들이었다. 화평은 죽음을 애도할 줄 알았으나 애도의 상식적인 범위 역시 알았다. 급격한 변화가 시작되면 늘 놓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급류에 휩쓸린 배가 쉬이 뒤집어지고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아이의 손을 놓치기 쉬운 것처럼. 당장 내어 준다 해도 서역 놈들의 속셈에 휘말리는 것이 될 것이요 내어 주지 않는대도 그것을 빌미로 공격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어느 쪽이든 부정적이라면 최소한 버텨는 보는 것이 낫지 않겠던가. 전쟁에 있어 성을 공격하겠다는 선전 포고가 들어온다면 일단 막아야지, 성문을 열어주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화평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젖은 바람이 불고 있었고, 그는 어쩌면 비가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발소리가 들렸다. 묻는 말들.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잠시 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그는 밖을 응시하면서 부드럽게 대답했다. 황제가 서역의 문물을 그토록 좋아하니 제가 척화파라는 사실을 굳이 온 몸으로 표출하고 다닐 필요는 없겠다는 판단이 그제야 선 것이었다. 물론 개화파의 입장을 아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방식이 장기적으로는 더 어리석은 선택이 될 거라고 믿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런 변화는 달갑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그들의 세상에서 안온하였고, 외세만 없어진다면 계속 만사가 형통할 것이었다. 활동 사진 같은 기이한 문물이야 한 번 알아봐야 나중에 그들의 문화를 가늠잡고 공격을 하는 데 쓸 수 있긴 하겠지만서도. 그 이상은 싫었다. 도박은 늘 재앙을 낳았다. 더 이상 노름판의 엽전이고 싶지는 않았다. 화평을 소유한 자는 필시 불행해진다더라. 이제는 발을 뺀 어느 판에서 떠도는 소문을 곱씹으며 그는 몸을 돌렸다. |
5월: 평민파 (화평) |
"도박은 그만둔 줄 알았더니?" "중간에 끼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 섭섭치 않겠습니까? 술은 사람을 해이하게 만들고, 담배는 연기가 새니 노름이 제일이지요."
돌아가는 통. 긴 종이 막대들이 달그락대며 돌아갔다. 원래 투전은 여러 사람이 하는 것이었다. 특히 진행하는 사람 없이 단 둘이 하게 된다면 사기 행각이 벌어지기 십상이었고, 돈을 잃은 사람이 납득하지 못할 가능성도 컸다. 주막의 방 안에서 하평과 마주 앉아 대화하던 마을 이방은 영 신경 쓰이는 게 있는 양 화평을 응시했다. 화평은 무표정한 낯으로 패를 섞다가 잠깐 시선을 마주쳤다. 드러나는 표정은 없었다. 그가 통을 내밀었다.
"뽑아 보시지요."
근래 외국에서 프래잉-가도인지 플레잉 카드인지 모를 것이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화투 패가 들어왔다 하여 인기를 끌고 있었으나 이백 년 가량을 산 화평에게는 투전패가 훨씬 익숙했다. 오래 전 사당패와 함께 저자를 떠돌아다닐 적 참여했던 노름판에서는 근래 도는 것보다 훨씬 투박한 도구들이 쓰였더랬다. 투전의 규칙과 프래잉-가도의 규칙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소한 차이라면, 투전은 종이조각이 아니라 한 쪽에 글자가 적힌 80개의 기름 먹인 패를 쓴다는 점 정도였다. 화평이 섞은 패를 이방이 뽑아 분배했다.
화평은 본디 노름을 싫어했다. 싫어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갑자기 비싼 돈을 얻어 챙기게 된 사람들은 십중팔구 불행해졌다. 돈을 다루는 방법을 모르거나 시기와 질투를 사서였다. 노름판에서 도깨비 화평은 오랫동안 사당패의 사기꾼들과 함께 활동했다. 방식은 간단했다. 밤에 도박을 하며 꾼들은 어중이 떠중이에게 맨 처음에 져 주곤 했는데, 이때 이 '어중이떠중이'가 받아가는 것이 다름아닌 화평의 본체였다. 본체를 그런 식으로 굴려먹으면 곤란하긴 하다지만 애초에 모두가 손모가지 하나쯤 날아갈 것을 감수하고 하는 판에서 무르기도 힘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판에서 최종적으로 화평을 챙겨 쥔 어리숙한 사람이 돈을 펑펑 쓰며 몇 번 패배하고 나면, 판을 끝내고 새벽이 되었을 때 그의 주머니에서 화평의 본체를 탈출시키는 식이었다. 살아서 뛰어다닐 줄 아는 돈이었으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당패의 사람들은 작업이 끝나면 빠르게 지역을 떴다. 어둠 속에서 하여 그들의 얼굴은 오래도록 알려지지 않았으니 화평을 '소유'한 꾼을 기어코 찾아온 자가 집에 불을 질러 그들을 태워 죽이려 들기 전까지 화평은 자신이 지나쳐 간 것들의 운명을 알지 못했다. 하여, 조정의 자리를 차지한 후부터는 오히려 필사적으로 반듯하고 강직한 길만을 걸으려 애썼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름에도 쓸 만한 구석이 있다는 점을 그는 인정했다. 바둑이나 장기가 그러하듯이, 길바닥의 돈놀이에도 미학이 있었고 오가는 패들은 더 깊은 의미를 쉽게 은유했다.
"얼마를 거시겠습니까?" "한 닢 걸어두지."
동당치기든, 아니면 다른 놀이든, 보통 본격적인 진행은 돈을 걸면서부터 시작됐다. 화평은 답하는 대신 판돈을 올려 밀어놓으면서 다른 화제를 꺼내들었다.
"영서의 현 상황에 대해서는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엽전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 상대가 답했다.
"버사 대사의 국가와 단독 조약을 맺는 건에 대한 것 말씀이시군."
중앙에서 보내는 사또와 마을 이방의 관계는 복잡했다. 이방들은 향촌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물로, 중앙에서 보낸 사람들이 바뀌는 동안에도 자리를 유지하며 마을에 대한 정보를 쌓아 나갔다. 평민과 가장 가까운 중간 계층이 그들이었으며, 평민 출신 관료들과 제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도 보통 그들이었다. 정치를 할 적에 대표자를 뽑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개별 사람 하나 하나를 설득하여 들어가는 것보다 품이 적게 들었을 뿐만 아니라, 발언권이 강한 사람인 경우 금방 그가 통솔하는, 혹은 발이 이어져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금방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도박을 좋아하는 자들은 비슷한 부류의 꾼들과 쉽게 어우러졌다. 도박판에서 어울리는 자들은 이야기를 곧잘 옮겼고, 집에만 있는 자들보다는 목소리가 컸으며, 대체로 인맥도 꽤 넓었다. 투전이라는 것이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즐기는 취미는 아니었으므로. 특히 중간 계급쯤이 되어 길바닥의 놀이를 한다는 것은 그러지 않는 자들보다 배 곯는 사람들과 더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화평의 손가락이 바닥을 두드렸다.
"보통 어느 정도는 조약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전쟁은 피하는 게 좋으니까 말일세." "같은 입장입니다. 흘리는 피는 적은 쪽이 좋지요."
다시금 움직이는 돈.
"다만 가장 쉬워 보이는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언급해야겠습니다." "생각하지 않았는 줄 아는가?"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평민들이 결코 윗사람들보다 어리석진 않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상대가 되묻는 듯한 콧소리를 냈다. 화평이 말을 이었다.
"배움은 짧을 수 있지만 그게 꼭 어리석다는 뜻은 되지 못하지요. 백성들이 없으면 나라가 없고 하여 백성의 목숨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가?" "…중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닥을 따라 움직이던 돈의 흐름이 잠깐 멎었다.
"나라가 중립국이 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지요. 하나는 저희가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얻는 것입니다. 당장 취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지요. 단순히 강한 것이 아니라 강해 '보이는'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만, 저희가 실로 강성해 보였더라면 저들도 조약 따위를 제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상대가 돈을 밀어놓았다. 화평은 제 패를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저희를 탐나는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이제이지요. 양 측이 저희를 소유하고 싶어하게 만들되, 우리의 땅에서 패권 싸움을 하는 대신 그들끼리 싸워 자멸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아주 싸움까지는 가지 않고 계속 신경전만 벌이면 더 좋을 텝니다."
그는 잠시 자신 수중의 돈을 확인했다. 상대가 갖고 있던 돈을 더 밀어놓았다. 화평이 말했다.
"이쪽은 부족하군요. 그렇다면 저를 걸지요." "본인을?" "네."
이방은 무언가를 생각하나 싶더니 쯧 소리를 내고 패를 내려 던졌다. 포기 신호였다. 화평은 웃으면서 제 패를 내놓았다. 황이었다. 제일 낮고 초라한 패. 그는 동전들을 쓸어 오며 어이 없다는 눈의 이방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치에 있어서도 쉽게 내어 줘서는 곤란합니다. 버사 대사의 말처럼 굴었다가는 그들이 우리를 쉽게 보겠지요. 잃는 것만 많아지고 착취당하는 것은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그래, 집의께서 생각하기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단독 조약은 거절합시다. 더 약소하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조약이라면 동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약한 것들을 위해 행동하겠어요. 때가 되었을 때 제게 지지를 주세요." |
6월: 이렇게 하면 저를 좋아해 주실까요? (유은설) |
범생이란 무엇인가? "선생님, 방학 숙제 말씀 안 해 주셨어요." 범생이. 명사. 은어. '모범생.' 얕잡아 이르는 어감이 있음. 사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그러하였으나, 깊게 들어가면 퍽 다채로운 의미를 지니는 단어였다. 그 단어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을 뜻하기도 했고, 똑똑한 아이에 대한 질투를 반영하기도 했으며, 사회성이 없어 보이는 아이에 대한 조롱을 돌려서 전할 때도 있었고, 가끔은 노력하는 꼴불견들을 지칭하여 튀어나오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은설이 '똑똑한 아이' 축에는 들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본질적으로 무식한 사람이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얻어 내려면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혹자는 사회가, 그리고 조직이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천재와 노력하는 둔재가 있다면 틀림없이 그러니까 후자가 빛을 받을 거라고. 행복해지고 싶다면 애쓰라고. 명언집과 학습용 방송들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기만했다. 유은설은 범생이었다. 그의 등수는 대부분의 경우 교내 10위권 내에 들었으나, 단 한 번도 1등은 한 적이 없었고 가끔은 2등마저 놓치곤 했다. 그리고 은설은 자신이 만점을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얄팍한 이유로 노력하길 그만 둘 거였다면 초등학교 시절 다른 아이들에게 질타를 받았을 때 일찌감치 공부를 때려쳤어야 했다. 게다가 신록고는 그가 다닌 초등학교나 중학교보다 훨씬 환경이 양호했다. 귀신 들린 학교라는 소리를 들어도 집보다 나았고 다른 학교보다 좋았다. 일찌감치 장하읍으로 이사를 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괴롭히는 아이들도 적었고 마을이 작아서인지 '지나치게' 부유한 아이들도 드물었다. 은설로서는 동창과 부모에게 공격받을 일이 감소했으니 좋고, 은설의 부모로서는 학부모 모임에서 상대적 열등감을 느끼고 맏딸에게 스트레스를 쏟아낼 일이 줄어들었으니 좋은 일이었다. 따라서 이 '최고의 환경' 속에서 유은설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일주일 갖고 무슨 방학 숙제냐, 초등학생도 아니고. 공부 잘 해 올 거지?" "네에."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부모와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7일의 방학은 지나치게 길었다. 은설은 최대한 느리게 가방을 쌌다. 틀림없이 7일 내로 어머니나 아버지 측에서 딸의 존재를 감당하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는 날이 생길 것이었다. 그들의 집은 세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도시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살던 집은 장하읍에 있는 집보다 훨씬 비좁고 축축했는데, 당연히 욕을 먹거나 얻어맞는 일이 근래보다도 훨씬 많았었다. 왜 혼이 났는지를 돌이켜 보면 어머니한테 혼났을 때의 이유와 아버지에게 한 소리를 들었을 때의 원인이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훈육 방침이 일관적이지 않았단 의미였다. 어머니는 항상 공부를 잘 해야지만 자신들처럼 살지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실망했다는 말을 자주 썼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매를 들었다. 떨어진 성적, 못한 발표, 교사로부터 전달받지 못한 칭찬, 찌는 살. 아버지의 경우 설명이 많지 않았다. 그는 밖에 나갈 때는 늘 말쑥한 차림을 유지했는데, 은설로 인해 자존심이 망가졌다고 생각할 때 매를 들었다. 부유한 그의 급우들, 청소부나 택배 배달원에게 보내는 '지나치게' 친절한 인사, 의견의 충돌, 밖에서 듣는 무당 집안과 관련된 이야기. 그들은 딸이 완벽하고 고고하기를 희망했고 은설은 끔찍할 정도로 불완전했다. 그나마 학교에 있을 때는 성적만 잘 받으면 그들 둘의 희망사항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었지만 집에 가면 또 상황이 바뀔 것이었다. 비가 내렸다. 창 밖으로 시선이 이동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져 밖이 하얗게 되면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문득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방학식은 끝난 뒤였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교실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은설은 우산을 같이 쓸 만한 사람이 없으리란 것을 알았다. 있어도 문제였다. '진짜' 방학 기간 동안 집에서 볼 책을 챙겨 가야 하는데, 두 사람이 한 우산을 썼다가는 사람이 젖거나 책이 젖거나 둘 중 하나의 문제는 생기고 말 거였다. 도와 준 친구보고 젖으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제 옷에 물이 너무 많이 묻으면 집에 있는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거였다. 가족들은 반지하의 습한 공기에 질려 있었고 비슷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들을 꺼렸다. 젖은 옷, 젖은 종이, 벽지에 스미는 빗물 같은 것들. 그렇다고 해서 연락을 하면 또 데리러 와 주진 않을 게 분명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의미였다. "잘 됐지, 뭐." 혼잣말이 나왔다. 가방 지퍼가 쭉 소리를 내며 잠겼다. 짐을 들고 나올 때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교사의 모습이 보였다. 은설은 재빨리 교실 벽 뒤에 웅크려 숨었다. 범생이와 문제아는 본질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공유했다. 어느 쪽이든 사랑받고 싶어 행동한다는 점에서는 같았기 때문에. 다만 문제아의 경우 사람들이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이라도 한다면, 범생이의 경우 아이에게 관심을 덜 둔다는 점이 차이였다. 교사가 잠깐 멈췄다가 이내 다시 이동했다. 아마 땋은 머리카락을 보고 잘못 보았겠거니 하고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발소리가 멀어졌고, 그는 고개를 길게 빼고 밖을 확인했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몸을 물리는 순간 뒷문에서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퍼뜩 놀라 돌아보았을 때 문가에 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뒷문이 실처럼 가늘게 열려 있었다. 주번이 잠그질 않은 걸까, 의아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순간 틈이 탁 소리와 함께 닫혔다. 원래 비가 오는 날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굽어드는 복도 쪽에 있는 창들은 바람이 강하게 불 때 으레 짐승 같은 울음소리로 울었고 새어 들어온 바람은 먼지 쌓인 커튼을 흔들곤 했다. 이번 건도 그런 현상 중 하나일 것이었다. 은설은 뒷문을 고쳐 닫았고, 앞문으로 나와 완전히 문을 잠갔다. 멀리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경비원의 모습이 보였다. 아래층을 확인하는 눈치였다. 위에서부터 확인을 하고 내려온 거라면 아마 뭔가를 잊었다는 것을 깨닫고 2학년 복도로 들어올 거였다. 계단을 따라 다니는 건 위험했다. 은설은 연결 통로를 넘어 동편의 도서실로 향했다. 그의 어머니는 도둑이었다. 실력이 유전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기술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을 자식에게 가르치곤 했고 따라서 은설 역시 잠긴 문을 여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닫힌 도서실 안은 어둑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할 것도 없겠다, 틀림없이 잘못 꽂힌 책들이 있을 도서실 내부나 정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책꽂이가 많으니 누가 들어와도 단박에 그를 발견하지는 못 할 거였다. 문득 문가에서 다시 드르륵, 하고 미닫이문 밀리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정말 많이 부는 모양이라고 은설은 생각했다. 학교가 귀신 들린 학교 소리를 듣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으레 학교마다 괴담은 있기 마련 아니었던가! 중학교에도, 초등학교에도 괴담은 존재했다. 유독 다치는 학생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아마 그건 신록고 건설 과정에서 부실공사나 비리가 있어서 생긴 문제일 게 분명했다. 굿을 해서 해결했다곤 해도 사실은 그냥 그 과정에서 교내 시설 정비를 해서 문제가 해결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어릴 때 항상 귀신 보는 애 소리를 들었던 사람으로서 딱히 그 소문을 믿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어딘가에서 문이 여닫혔다. 그는 이번엔 소리를 무시했다. 비는 그치지 않았고 역시 잘못 들어간 책들은 많았다. 얼마쯤 같은 작업을 반복했을까, 문득 멀리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이 책등을 따라 떨어졌다. 이 시간에 학교에 있는 사람이 더 있단 말인가? 경비가 돌아다닐 텐데, 저렇게 당당하게 연주를 해도 되는 것이었던가? 소리는 음악실 방향에서 나고 있었다. 은설은 도서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3층에서는 음악실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탔다. 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이동하는 것은 익숙했다. 복도의 창을 통해 내다보면 멀찍이 음악실이 보였다. 피아노 앞에 사람이 있는지 어떤지는 여전히 확인하기 힘들었다. |
7월: 여름에는 소나기가 온다 (유은설) |
전날 하루 종일 내린 비에 운동장은 여전히 질퍽거렸다. 그나마 마른 땅이 있는 곳에서 남자아이들은 공을 찰 준비를 했다. 구석에서 무언가 속닥거리던 여자애들은 결국 피구를 한 판 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분필 가루가 쏟아져 나오는 작은 철통 끌개로 직사각형들을 그리던 그들은 축구공이 날아들자 운동장 반대편을 향해 짜증을 했다. 체육 교사는 남자애들과 함께 뛰고 있었다. 수행평가가 없는 날 그는 보통 아이들의 체육복 검사가 끝나면 어딘가로 가서 좋아하는 활동을 했고, 가끔은 어울려서 운동을 했다. 그 무리 중 그 누구도 은설과는 관련이 없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서는 밑동이 가는 나무들이 자랐고 사이사이로는 낡은 벤치들이 위치했다. 은설은 약간 거뭇한 물기가 남아 있는 의자를 하나 골라 잡았다. 하얗게 떠 가는 뭉게 구름 아래, 모래사장처럼 반짝이는 흙바닥 너머로 높은 돌계단들이 보였다. 공놀이에 관심이 없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거기 앉아 떠들곤 했다. 이따금씩 작달막한 얼굴들이 제 방향을 보는 것도 같았다.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수상쩍다는 시선은 그대로 받을 것이었으므로. 대충 저를 보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말고사도 끝났는데 체육 시간에 교과서를 펴는 꼴이 이상하다는 거겠지! 물론 은설 본인도 중학교 3학년의 여름 방학 직전을 이런 식으로 보내는 게 재미 없는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다. 그는 또래들의 가십거리를 늘려 주기로 결정했고 어김없이 책을 펴 무릎에 올려놓았다. 수학 문제집이었다. 신록고가 있는 마을로 전학을 오기 직전 해에는 도둑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도시 안에도 작은 마을 공동체는 있기 마련이었으므로 반상회에서는 단체로 잠금 장치를 사자는 이야기가 오갔고 학부모들은 하교 시간의 자녀들이 걱정된다는 말을 나누었다. 은설은 술렁거림을 엘리베이터에서, 복도에서 떠드는 아이들을 통해, 그리고 아파트에 붙은 공문으로 확인했다. 학교에도 도둑이 들어 교무실의 지갑들을 누군가가 털어 갔다고 했고, 가방 속에 있었던 물품들을 잃어버린 아이들도 몇 있는 듯 했다. 어느 아파트 CCTV에는 왜소한 체구의 강도 모습이 찍혔다. 초등학생들이나 중학생들은 보통 동기의 물건을 빌린 뒤엔 아주 개털을 만들어 놓은 뒤에야 돌려 주곤 했는데, 동시에 그들은 역설적으로 도둑의 존재에는 끔찍하게 민감했다. 물건의 소유 개념에 대해 민감하면서 왜 남의 물건은 그렇게 험하게 쓰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 근데 지금 뭐 의심스러워. 보통 선생님들 지갑은 들고 가도 애들 지갑도 털고 그러나?" "도둑이 다 갖고 가지, 그럼!" "아니, 생각을 해 봐. 지난 번에 채림이가 용돈 받았다고 자랑하고 딱 다음 날에 뜯겼잖아. 그럼 그걸 아는 새끼가 가져갔단 거 아냐." "그럼 지금 도둑이 두 명이야?" "아, 씨발." 은설은 그런 대화들을 들으면서 보통 정물처럼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포지션이었다. 쉽게 말을 얹을 수 없는 소재였고, 말을 얹을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가 쉬는 시간 내내 혼자 공부나 하고 있는 건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으므로 다른 아이들은 가끔 그를 보았다가도 도로 자신들의 대화로 복귀했다. 그런 말들을 듣다가 딱 반지하 방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절도에 대한 이야기가 딱 끊겨 버리는 것이었다. 반상회장이 자물쇠의 공동 구매를 촉구하긴 했으나 유 씨 가족은 엄밀히 말하면 집 주인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현관문은 변함없이 낡은 상태를 유지했다. 대신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들의 질이 바뀌었다. 값싼 부위들이 대부분이긴 해도 고기 반찬이 더 자주 나오는 식이었다. 은설의 아버지는 늘 식사를 한 뒤엔 술을 마셔야 한다고 저녁 늦게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말리지 않았다. 운동장 나무 밑의 벤치에 혼자 앉아 있다 보면 무성하게 자란 이파리 사이로 학교 꼭대기에 붙은 시계의 모습이 보였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15분쯤 남은 듯 했다. 명색이 체육 시간이었고, 이따금씩 지나가는 체육 교사가 운동을 좀 하라고 떠들어 대던 걸 떠올리면 뭔가 뛰는 활동을 하나쯤 하고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을 것 같긴 한데. 그는 대부분의 동급생들이 저를 운동 못 하는 아이로 알고 있다는 점을 알았다. 실제로 그네들 앞에서 뛰는 모습은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렇게 믿을 거라면 굳이 낯선 모습을 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이었다. 당장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을 때 그게 어떤 식으로 인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은설아."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거는 것에 그는 퍼뜩 놀라 몸을 움츠렸다. 돌아봤을 때 서 있는 사람은 조별 과제를 같이 하는 동기였다. "응?" "나, 이따 수업 때 쓸 도화지를 안 가져왔는데 어떡하지?" 어쩌자는 소리인지는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상대야 미술 수업쯤은 점수가 좀 깎인다고 해도 신경을 쓰지 않는 위인이었고, 아마 그냥 종이에 돈을 쓰고 싶지 않았을 거였다. 아니면 까먹은 것을 굳이 사러 나가고 싶지 않았던 거든가. 점수 깎이는 데 제일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 알아서 해 보라는 신호였다. 은설은 가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맞은편 벤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는 거 있는지 찾아볼게." 조용했고 바람은 산들거렸으며 이상하게 불안감은 적었다. 상대의 의도를 알아도 썩 내치고픈 마음은 들지 않을 정도로. 동기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피구에 자리 남는데 너도 낄래? 그가 물었고, 은설은 아주 짧게 생각하다가 참고서를 덮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먼저 가던 아이가 운동장 건너편을 향해 소리쳤다. 야! 대타 구했어! 문득 꿈에서 깨어나듯이 은설은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새파랗던 하늘이 까맣게 덮이며 천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있는 곳이 운동장의 벤치도 아니고, 오래 전에 다니던 중학교도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신록고 2학년...아마도 신록고 2학년의 학생이었다. 중학생은 분명 아니었다. 보였던 것이 꿈이었는지 환각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제 멍청한 회상이었는지는 불분명했다. 그가 아는 것은 그 날 점심 시간 문구점에 잠시 다녀온 이후 이어졌던 사건의 결말 정도였다. 그의 부모는 아이를 쥐어팰 때 욕을 심하게 하지 않았다. 보통 그들이 서로를 만나는 시간이 저녁 시간대이기 때문이었는데, 바퀴벌레들이 인간의 눈에 띄지 않기를 희망하듯이 그들 가족 또한 이웃집의 민원을 듣는 것을 지독히도 꺼려 했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대들면 더 맞았고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알면서 그러는 머저리가 어디 있냐는 식으로 욕을 먹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므로, 은설은 폭력이 시작될 때 보통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어느 정도 맞다 보면 맷집이 생기는 편이었다. 그 날 저녁 그의 아버지는 은설이 함부로 천 원을 더 썼다는 사실이 '속상한' 것 같아 보였다. 그의 부모는 그 푼돈 때문에 악착같이 모으는데 왜 불필요하게 돈을 더 쓰냐는 문제였다. 비슷한 상황에서 물건을 사지 않아 과제 점수가 깎였을 때도 똑같이 화를 냈으니 아마도 밖에서 다른 일이 더 있었겠거니 했다. 다만 얼굴을 맞는 일은 없었다. 그건 너무 눈에 띄는 자리였다. 그건 그러니까, 아주 평범한 날이었다. 특별한 것이 없었고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차라리 즐거운 날이었다. 날이 정말로, 정말로 좋았으니까. 피구 게임에서 이기긴 했던 걸로 기억했다. 체육대회가 조금만 더 늦었으면 그를 피구 종목에 넣었을 거라고 몇몇은 이야기했다. 은설은 곁에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오래 전 먼 벤치에 앉아 있던 다른 아이들을 회상했다. 하필 그 날의 꿈을 꾼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
8월: 여름은 언제나 흐림 뒤 맑음 (유은설) |
천천히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은설은 복도 구석에서 고개를 들었다. 삿된 것들은 이미 죽은 것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다른 '멀쩡한' 아이들은 교장실에 머물지 않으면 쫓기게 되었지만, 저 같은 부류는 어디에 있든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피했다. 그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종잡을 수 없었을 뿐더러, 계속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어떤 부정적인 의미를 전달할까 두려웠다. 누군가를 죽이고 살아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생에 대한 의지가 그렇게 강하지도, 의도적으로 그런 행동을 할 만큼 당당하지도 못했다. 나가서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라도 있었더라면 태도가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바깥에 온전히 행복한 기억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족들이 이사를 가지 않고 머물렀을지 어쨌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와 다른 동기들의 기억이야 왜곡되어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을 일어난 일이라고 믿었다지만, 현실로 나갔을 때 그 왜곡이 '진짜'가 될지 아니면 환상으로 남을지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살아 나갔을 때 반겨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가족들은 이사를 떠나고 교실에는 그의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아 산 사람은 되었지만 여전히 중간에 끼인 사람처럼 살아가게 될지도 몰랐다. 만에 하나 정말 그런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것보다는 현실에 더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는 다른 아이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기회를 주는 게 낫지 않을까. 먼 곳에서 피아노 선율이 들렸다. 비가 그친 뒤 나뭇잎에서 물방울이 굴러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 주변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 피아노 연주가 날 수 있는 소리의 전부인 것처럼. 바닥에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은설은 문득 해가 떴다는 점을 깨달았다. 작고 검은 것들이 시야의 가장자리를 타고 기어가듯 움직였다. 불안감이 정신을 잠식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귀신이니 악령이니 하는 것들은 저를 쫓을 수 없는데. 그는 건너편에 있는 교장실 문을 확인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느린 걸음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굳이 살아 있는 아이들이 괜찮은지 확인하러 가 봤자 눈총만 받게 될 거였다. '알았다.' "얘들아?" 답이 없었고, 은설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어둑하니 차가운 실내가 그를 반겼다. 문틈새로 들이치는 볕을 보며 잠시 안을 응시하던 은설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다시 둘러봐도 사람이 없었다. 애초에 안이 교장실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펼쳐진 책상들, 단단하게 닫힌 창문. 칠판. 흐릿하게 풍기는 텁텁한 나무 냄새. 교실이었다. 잠시 인상을 쓴 그는 몸을 돌렸다.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나타난 것은 또다른 교실이었다. "……." 심장이 엇박으로 뛰었다. 살아 나갈 수 없다는 지점은 괜찮았다. 혼자 남는 것은 상황이 달랐다. 정말 아무도 없단 말인가? 또다시 미로가 시작된 건가? 다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상태에서 거리를 두는 것과 고립되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아무리 눈총을 받을 것이 두려워도 혼자는 싫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고 뛰쳐들듯 다음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고층 창문이 눈에 띄었다. 빠른 걸음으로 창문에 다가가면 걷히는 까만 구름들 사이로 잿불처럼 흘러나온 볕이 빈 운동장에 얼룩을 드리웠다. 은설은 다시 방향을 틀어 밖으로 나갔다. 일전에도 이런 식으로 계속 돌아다니다 우를 만났던 기억이 있었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나타날 거였다. 그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심장은 계속 빠르게 뛰었다. '기억' 속에서 다예는 교과 정리를 잘 하는 애였으므로 어쩌면 지금도 상황을 정리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화가 많은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다정한 애니까 혁을 맞닥뜨린다고 해도 별다른 소리를 듣진 않을 거였다. 다른 '죽은' 아이들도 대면하는 것이 두렵지만은 않았다. 호연, 우진, 준한.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휘서가 피아노실 근처에 있는지도 몰랐다. 조용하긴 해도 알고 보면 활달한 애니까 혜원도 나가는 길을 뚫고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아직 '사람'인 아이들의 경우에는 만나고 싶다고 진심으로 빌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유한의 경우엔 여전히 맞닥뜨렸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리 같은 경우 괜히 같이 나간다고 무리할 수도 있어 두려웠다. 성룡이, 시아, 다원이. 얼마간 갔을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자 복도가 나타났다. 은설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 이어지려던 말이 끊겼다. 흐린 빛이 도는 복도 끝에서 손과 피와 그림자가 한 데 엉겨붙은 것 같은 거대한 구가 기어오고 있었다. 귓전에서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짧은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왜? 대체 왜? 괴물은 주변을 긁어 대며 미끄러지듯 기어들었고 은설은 본능적으로 문을 닫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창문에 핏자국이 번졌다가 사라졌다. 은설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끝이 헝클어진 땋은 머리가 어깨 앞으로 밀어 떨어졌다. 교실 문틀을 밀어 닫은 손이 하얗게 질린 채로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저를 잡으러 기어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왜? 어차피 죽은 채로 머물 인간을 왜? 등 뒤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여기 있어. 여자아이가 속삭였다. 가지 말고 나랑 놀아. 남자아이가 웃었다. 은설은 문을 열어젖히고 다시 내닫기 시작했다. 다른 층의 다른 복도였다. 익숙한 2학년 팻말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들이 뒤를 쫓았다. 은설은 달렸다. 달리기에 있어서는 사실 자신이 있었으니까. 언제나. 어느 순간부터 음악 소리가 흐려졌고, 빗소리처럼 끊겼다. 서편에서 내달려 본관으로, 본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간 끝에는 중앙 현관이 있었다. 문을 밀치며 밖으로 나가려던 걸음이 우뚝 멎었다. 뒤늦게야 이성이 돌아온 탓이었다. 은설은 계단이 있는 방향을 잠시 응시했다. 다른 아이들은 뒤늦게 오는지, 아니면 먼저 갔는지 여전히 눈에 띄지 않았다. 다시 보고 싶었다. 그러나 저는 '마땅히 죽어야만 할' 것들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어차피 밖으로 나가지 못할 인간이 아니었던가? 여기서 발을 내딛는다고 해 봤자 어차피 다른 곳으로 튕겨져 나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근거 없는 믿음이었다. 그렇지만 애초에 이 학교에 말이 되는 게 지금 뭐가 있던가? 아득한 곳에서 다시 다리 많은 것이 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움찔 굳는 어깨, 그는 중앙 현관의 유리문에 등을 댔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다른 아이들이 내려오는 것을 확인이나 하는 편이 나을 거였다. 나을 텐데.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혼자 남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이 죽어 저와 함께 머물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더럽고 불쾌한 생이라도 살고 싶었고, 어쩌면, 이렇게 비루하고 질척한 공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단 차라리 다정한 아이들이 살아 있을 현실에서 죽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했다. 유은설은 자신이 다른 아이들의 숨을 빼앗을 정도로 그들과 오래 어울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갈취했어야 나갈 수도 있었다. 괜한 희망을 품어 봤자 후회하게 될 뿐이었다. 다리 많은 것이 더 가까운 곳에서 움직였다. 은설은 문을 등으로 밀었다. 유리문은 열렸으나 몸은 허공에 걸렸다. 학교 내부를 응시하던 그가 주먹으로 허공을 쳤다. 무언가 단단한 것에 손이 부딪혔다. 은설은 다시 한 번 같은 자리를 내리쳤다. "열어." 평생에 걸쳐 거부했다지만, 그는 도둑의 딸이었다. "...열어." 누가 뭐라고 해도 학교의 그 누구보다 잠긴 문은 더 잘 열 수 있는 치. 하지 않을 뿐 숨겨진 것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위인. 무당들의 딸. 남은 평생을 가난하고 부정하게 살지라도 당장 마주한 이 순간은 그의 마음대로 되어야만 했다. "열어!" 마지막으로 내리치는 순간 얼얼해진 주먹이 무언가를 통과했다. 은설은 넘어질 듯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젖은 공기가 귓전을 스쳤다. 그는 몸을 돌렸다. 아주 오랜만에 마주한 바깥에서는 비 냄새가 났다. |
9월: AU 로그 (정서하) |
어떤 순간에 그는 마법사였다. 마법사라고 떵떵거리고 다닐 정도로 대단치는 못해도 태어날 적부터 모습을 바꿀 줄 알았고 간단한 치유 마법을 썼다. 본모습이 싫어 들어간 설원의 가장 깊은 구석에서 누군가를 만났고 어떤 겨울이 봄보다 따뜻하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그는 마녀였고 K는 플라스크 안의 난쟁이였다. 황실의 천덕꾸러기 황후와 근위병이었던 적도 있는데, 그 다음에는 한 쪽만 기억을 안은 채 마술사와 소환한 영령으로 다시 만났더랬다. 때로는 그가 수녀, K가 악마였고 또 다른 때에는 K가 신부, 그가 악마였다. 주인과 개로 만난 적도, 역할을 바꾸어 주인과 메이드로서 만난 적도 있었다. 인어와 사람, 마법소녀와 마법청년, 그리고 되짚어 가기도 힘든 어떤 반복들.
몇 번의 실패가 있었는지를 따진다면 지금까지는 크게 두 번을 짚을 수 있을 거였다. K가 조직원, 그가 스트리머였을 때 그들은 동반 자살을 했다. 만난 것을 후회했다.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다음 생에 보지 말자는 인사였고, 인사는 현실이 되지 못했다. 인간도 아닌 아득한 신격이었을 때 K는 그를 오랫동안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한 뒤에는 맹세로 죽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K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 기억들을 안은, 그를 닮은 오류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 K에게 후회할 거라고 했다. 이미 실패한 적이 있다고. 그러니까 이번에도 후회할 거라고.
윤회에 대한 작품에서 자주 쓰이는 유명한 소재가 하나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환생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존재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대신 세계의 선을 넘나들었고 기억은 존재를 따라가지 못했다. 언젠가 그들에게는 아이가 있었고 또 언젠가 K는 망한 세상에서 반 시체가 되었는데, 그 어떠한 기억도 며칠 전 K와 헤어진 정서하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스물여덟 살에서 스물아홉으로 넘어가던 겨울, 그들은 세 번째 실패를 했다.
“네…일찍 출근할게요. 네.”
정서하는 물론 스트리밍을 했지만 주말에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했다. 크리스마스에 내리던 눈은 그 다음 날에도 지독하게 쏟아졌다. 며칠 정도 예전 룸메이트의 집에서 지내기로 결정된 차였는데, K의 집에서 출퇴근할 때보다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릴 모양이었다. 그는 팬케이크 담당이었다. 늦어서는 곤란했다. 눈이 죽도록 오니 아마 손님도 그렇게 많진 않겠지만. 그는 이동하면서 K의 바 근처를 경유하기로 결정했다. 괜히 낯선 길을 타는 것보다 익숙한 길을 지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나자 괜한 욕심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위치 잘 잡아요!”
내리기 전에 문이 닫혔고 기사가 한 마디를 했다. 정서하는 문 옆으로 이동하고는 기사가 있는 방향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차는 한참을 느리게 달려 익숙한 정거장에서 섰다. 그가 꾸역꾸역 몸을 내리자 뒤에서 문이 닫혔다. 바퀴 달린 것을 끌고 오르내리는 것은 언제나 까다로운 일이었다. 대로변은 깔끔했지만 가게들이 있는 골목은 여전히 눈밭이었다. 서너 줄의 발자국이 있는 거리 위로 긴 한 쌍의 곡선이 생겨났다.
멀찍이 앞이 깨끗한 가게 하나가 보였다. 간판을 보기 전에도 찾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눈이 들러붙은 장갑을 벗어 털고 고쳐 끼었다. 뺨과 살짝 드러난 손목을 스치는 바람이 칼날처럼 찼다. 가까워지자 창 너머로 바 내의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너무 이른 아침이었다. K가 있을 리 없었다. 정서하는 잠시 눈이 쓸려 나간 구역에 서서 창 너머를 응시했다. 문득, 너무 오래 서 있으면 들킬 것 같다는 불안감이 일었다.
정서하는 눈이 녹은 뒤에도 주말 출근을 할 때 매번 같은 거리를 경유했다. 보고 싶었던 사람을 제대로 맞닥뜨린 적은 없었다. 일부러 몇 초 정도만 바라보고 떠난 탓도 있을 거였다. 그는 그 사실에서 안도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
10월 |
진짜 충격적인데 없는 것 같음 ... ...이래서 11월에 글이 이렇게 망가졌나? ... ...10월 말에 멘션용 로그 친 거 빼고 없는듯? 심지어 커미션도 9월 11월임 ... ... ... ... |
11월: 비늘과 살과 뼈 (아티라 마하) |
소생 마법이 육체를 회복시키는게 아니라 몸을 떠난 영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마법이라면, 아직 살아있는 몸에는 마법이 안 통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소생 마법을 개량해서 치유 마법으로 쓰겠다고? 죄책감…이라면. 소생 마법을 사용하면서 그것과는 다른 맥락으로 충분히 느끼고 있는 중이니까. 아티라는 내가 완전히 죽은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구나. 그 전에 살려냈으니까? 소생에 큰 부작용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아티라라면 솔직하게 얘기해줄 것 같아서.
아티라 마하는 던전 탐사 무리 중 최초로 소생 마법을 사용한 사람이었다. 두 번째 소생은 아티라 본인에게 행해졌다. 그는 이후 전투 중 두 번, 전투가 종료된 후 총 여섯 번의 소생을 실시했다. 케이크 조각도 열 번을 잘리면 뭉개지기 마련이었다. 최초의 순간에 그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고, 다음에는 안이해졌으며, 이후에는 다급해졌고, 마지막으로는 불안해졌다. 처음부터 소생이 정상적인 마법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애써 시선을 돌리고 있었던 참이었다. 간절한 사람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나 기록은 마법을 저주라고 불렀고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기이한 환영을 보았다.
그는 하이비츠의 마법사였고, 알카다의 정령술사였으며, 오래 몸담은 길드원들을 살려 내야 할 의무를 지닌 길드원이었다. 다섯 해 전 던전의 기이한 마법으로 인해 길드가 사실상 와해되었다고는 해도 노움은 여전히 자신을 길드 소속으로 인지했다. 상충되는 증거와 희망은 영혼을 마모시켰다. 소생과 같은 부류의 주문은 이치를 뒤엎은 주문이었다. 강의 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고 불로 물을 끄면서 대가가 없기를 바라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티라는 끊임없이 자신이 예측 가능한 방향에서 대가가 오기를 기대했다. 염원했다.
소생마법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하고 계신 거예요? 현재 가장 중요한 건 '소생'마법이고. 더, 던전의 벽이 네 바, 바람 마법만큼, 다른 해는, 해는 끼치지 않기만 바랄 뿐이야. ……. 빈말로도 좋아한다고는 못하겠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인 건 통감하고 있지. ……. 소생이 던전 밖에서도 될 진 모르겠지만. 그냥 기분 나쁜 잠에서 깬 기분이야. ……. 그것은 헛된 노력으로 끝날 것이다. ……. 내가 한 짓에 문제가 생기면 내 모든 걸 걸고 책임지도록 하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에게 소생을 쓰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잖아?
또한 엄밀히 말해 ‘아티라 마하’는 육신을 지닌 노움이 아니라 수첩이었다. 그의 기억은 불완전했다. 공고를 보았을 때, 새로 나타난 던전 탐사에는 대략 삼 년 정도가 걸릴 것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년에서 삼 년, 그의 기억이 허락하는 기한이 딱 그 정도였기 때문에 지원한 것이었다. 그보다는 수첩이 더 많은 것을 기억했다. 삼 년짜리 생보다 더 긴 기간 동안 아티라는 기억이 존재를 정의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설령 소생이 정말 저주라서 술자의 육신에 타격이 온다고 하더라도 ‘아티라 마하’는 괜찮을 것이었다.
몸이 무너져도 진짜 아티라 마하는 누군가의 손을 타고 옛 동료들에게 돌아가 그들을 살릴 거였다. 실제로 베리에게도 부탁해 놓은 것이 있었다. 해나 또한 그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으므로 아마 외면하지는 않을 거였다. 로제타는 그에게 행운을 빌었고, 달론테는 일이 끝나고 알카다에 오라는 말에 동의했으며, 칸은 털을 만져도 된다고 했다. 소생 술식에 대한 대화를 나눈 사람들도 많았고, 그저 친절한 이들도 많았다. 아티라는 동료가 아니게 된 뒤에도 한 번쯤은 친절에 기대도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미아는 원래 물건 배달을 곧잘 하는 편이었으니 의뢰하고 간다면 들어 줄 것 같았고, 멜리테도 이후 요리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으니 이 '아티라 마하'에게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일 터였다. 맥스 또한 스스로를 친구로 칭했고, 클라우디아 역시 좋은 결과를 기원해 준 바 있었다. 막시는 그와 같은 알카다 노움이었으며, 아론은 소금 사막을 보여주겠다고 했으므로 수첩을 적어도 거기까지는 가지고 가 줄 것 같았다. 파루는 소소한 부탁을 곧잘 들어 줄 정도로 다정했다. 감회가 어때? ……. 일어나……. 처음에는 네가 살렸는데. 이렇게 보니까 감회가 새롭네, 꼬맹아. 너 이런 식으로 보는 거 슬슬 지긋지긋해. ……. 어차피 지금 이렇게 말해 봤자 들리지도 않지? 셋 중에 어떻게 나밖에 안 남겨 둘 수가 있어? ……. …….
아티라는 물에 젖어 번져 버린 페이지들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조심스레 젖은 페이지들을 넘겼다. 얼룩이 짙은 부분도 있고 흐린 부분도 있었다. 손가락이 구부려졌다. 움직임이 빨라졌다. 달라붙은 종이들이 찢어질 듯 가냘프게 나풀거렸다. 어떤 기억들은 아직 머릿속에 있었으나 그의 기억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둥 천재 마법사라는 둥 떠들어 댄 것은 그의 본질이 종이에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혹자는 종이 위의 본질이 지나치게 나약하다고 했다. 충분하지 않다고. 불완전하다고.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수용하더라도, 분명 필기는 아티라 마하의 모든 것이었다.
여관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더 이상 기억할 수 없었다. 아티라는 망가진 수첩을 시신처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흐린 시선이 책 귀퉁이에서 막사 귀퉁이로 옮겨 갔다가 등불 위로 떨어졌다. 사람도 망가뜨릴 수 있는 공격을 수첩이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 믿은 게 어리석었던 거였다. 흩어진 정보를 다시 모으려면 한참이 걸릴 거였다. 어쩌면 또다시 서너 해가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얼마 안 남은 스킬라의 고기를 내던졌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이렇게까지 냉소적이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
12월: 피티아 (아티라 마하) |
황제에게 나의 궁전이 무너졌다고 전하라. 태양에게는 이제 성소도 월계수 나무도 예언의 샘도 없나니, 그 물은 말라붙었느니라. 아티라 마하는 자신의 운명을 안다.
짧은 삶은 직진하는 성격을 지닌 사람들의 숙명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험에 곧잘 맞선다는 뜻이며 무모함으로 위험을 마주하는 사람들 앞에는 으레 낭떠러지가 놓인다. 아티라 마하의 생은 필연 짧을 것이다. 짧게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오래 살고자 하는 노력도 없는 탓이다. 그도 운명이 냉정하다는 것을 안다. 빨리 죽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는 길고 얇은 생이, 오래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조금은 더 긴 삶이 주어질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냥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 수 있는 족속이 또 아닌 것이다.
언제나 현재만을 보고 사는 치다. 과거는 주어지지 않았고 미래는 흐릿하여 손에 쥔 것이라고는 지금 당장과 예측한 미래와 삼 년 전의 과거밖에 없어서. 그래서 일견 멍청해 보이더라도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나아간다. 죽어도 희망을 찾고 안 된다고 해도 된다고 우기고 늘 저 좋을 대로만 살 수 있는 것처럼…그러나 운명은 반드시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알카다의 노움은 이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도리어 온갖 모순을 말하는 것이다. 소생 마법에 문제가 없다고 얘기하면서 다른 사람이 소생 마법을 익히는 것은 꺼린다. 스스로가 똑똑하다 우기면서 종종 답 없는 소리를 한다. 말은 바람이요 감정은 속내기 때문이다.
사람이 적은 복도를 지나며 그는 나갈 길을 찾는다. 쉽지는 않다. 문 틈새로 보이는 인파가 발길을 돌리게 만든다. 그들이 저의 얼굴을 알지 어쩔지는 몰라도 유명 인사들이 누워 있는 곳에서 나온 것을 쉽게 보내 주지는 않을 테다. 복도를 따라 걸음을 떼다 보면 이따금씩 시선을 주는 이들이 있다. 후드라도 갖고 올 것을 어리석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늦은 일이다.
열린 창을 찾으며 그는 예언을 생각한다. 정령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라지만, 평생 돌과 물과 바람과 불에 깃든 목소리를 들으며 살아 온 그는 자연의 말소리를 신뢰할 수 있음을 안다. 운디네는 한 달을 살지 못해도 강은 천 년을 흐르는 존재니까. 알카다의 노움들은 본디 정령을 신처럼 믿고 따라야 하니까. 빈 방의 의자를 끌어다 창문 앞에 놓고 높은 창틀 위로 기어 올라가며 그는 가방을 고쳐 멘다. 입에 등불을 물고 뛰어오르면 착지에는 어려움이 없다. 창 너머의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아티라는 자신이 물었던 것을 곱씹는다.
팔 할의 확률로 제 문제가 악화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다음 삼 년 차에는 제가 더 망가져 있을까요? 그렇지 않아. 그럼 몇 년 뒤에 이게 더 악화될까요? 11년. 그 때는 몇 년을 기억할 수 있나요? 1년.
다들 깨어난 직후 조용한 구석에서 나눈 문답. 속삭임은 작아 그 누구에게도 분명한 말은 들리지 않았을 테다. 기억의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에는 두 가지 가설이 있다. 체내의 마력에 문제가 생겨 낡은 집에 누수가 생기듯 마력이 잘못된 곳으로 넘쳐흘러 이상을 일으킨다, 는 것이 가설 중 하나. 지금까지는 삼 년 이상 묵은 낡은 기억들부터 사라졌지만 처리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심화될 것이다. 마법을 적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늘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가?
모든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가 올까요? 응. 그건 죽음인가요? 응.
입에 문 등불이 흔들린다. 안에 놓인 정령석들이 잘그락거린다. 불의 정령도 있고, 물의 정령도 있고, 흙의 정령도 있고, 바람의 정령도 있다. 그 사이에는 오래 전 누군가에게 받은 보석도 놓여 있을 것이다. 아티라는 앞발로 창문을 밀어 연다. 건물의 높이는 까마득하게 높다. 잘못 떨어지면 죽을 것이다. 알면서도 틈으로 비집고 나간다. 오늘 죽지 않을 것임을 아는 탓이고 오직 미지에만 두려움을 느끼는 탓이다.
……언제? 41년 뒤. …그 전의 변수가 있다면, 몇 년 차에 오나요? 28년. 긍정적인 방향일까요. 아니. 알겠어요.
아티라 마하는 백 살이 되기 전에 죽을 것이다. 짧아진 기억은 그를 더 무모한 작자로 만들 것이다. 백 년을 살면서도 한 철 사는 벌레 같은 기억으로 연명할 테니까. 종이로 된 기록은 나약할 테니까. 답을 구하겠다고 던전에나 기어 들어갔다가 중요한 정보를 기억하지 못해 그 때야말로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를 일이다. 때가 되기 전에 어떤 약속은 지킬 수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약속은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실망시키고 말 테다. 그 사실을 곱씹으면서, 아티라 마하는 창틀을 밟고 선다.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털 사이로 스며든다.
지평선에 집들이 있다.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바로 자신이 구하려고 했던 누군가에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심장이 뛴다. 불안감이다. 시도는 가능할 것이다. 혼수상태라는 건 어쩌면 영혼이 육신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어서 발생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고 누군가가 그랬으니까. 서둘러야 한다. 너무 늦게 가면 떠나 버릴지도 모르니까. 한참을 보지만 뛰어내리지는 못한다. 조금은 기다려도 되겠거니 한다. 한낮의 태양에겐 완벽을 도와 줄 권능이 없으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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