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깨찰빵 (여름벌레, @angelightb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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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 황궁 앞에서 마차가 멎었다. 조용한 걸음으로 걸어 나온 후크 헤이즐은 마중을 나온 궁인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는 바로 뒤뜰로 향했다. 시간은 낮, 아버지가 신하들과 함께 경연을 진행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감정을 과연 주체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회랑을 지나치자 곧 동궁전의 모습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보송한 한 쌍의 귀가 잠시 쫑긋 선 채 주변의 소리를 가늠했다. 지켜보는 토끼들이 더 없을 것을 확신한 그는 따라오던 나인들을 물렸다.
“적어도 한 시진은 지난 뒤에 오게.”
“알겠습니다, 저하. 그 전에 중전마마께서 찾으시면 어찌 전하리까?”
“몽악제 때 출 춤의 연습을 하고 있다고 전하게.”
두 줄로 따라오던 이들이 흩어지면 붉게 단풍이 든 뜨락에는 후크만이 남았다. 바람이 불면 소매와 함께 발의 솜털들이 흔들렸다. 그는 품에서 은장도를 꺼내 궁의 문을 겨누었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국에서 돌아오는 내내 제대로 잠을 잔 기억이 없었다. 매번 지독한 꿈이 찾아든 탓이었다. 칼을 겨눈 손이 가늘게 떨렸다. 역대 황태자 중 가장 꿈을 제대로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는 편이었다. 축제의 때는 한참 전에 지났고 연습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지시를 받은 궁인들도 알고는 있었을 거였다. 한 발을 내딛으며 몸을 빙글 돌리면 옷자락이 떨어지는 꽃처럼 넓게 펼쳐졌다. 숨이 막혔다. 가을 하늘이 수면이라 제가 잠겨 죽어가는 것만 같았다.
서국으로의 여행은 사실상 연간 행사였다. 매 해 가을이 오면 후크는 유람의 때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서쪽 나라의 황태자 시엘 이드리스는 그의 오랜 친구였다. 듣기로 그들이 태어나기 전 왕들이 일찌감치 혼인을 약조하였다고 했는데, 자식들이 같은 성별로 태어나고 후크의 손위 형제가 궁을 떠난 이제 과거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무용한 일이었다. 그러나 약혼자가 아닌 친구로서의 시엘도 충분히 좋은 아이였다. 태양의 나라에 가면 볕처럼 흰 왕실의 토끼들이 방문객을 맞이했으나 그 중 가장 빛나는 것은 단연컨대 시엘 이드리스였다. 온 세상이 그를 사랑했다.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호감형의 처진 눈매에 노래하는 것 같은 목소리, 맑은 미소는 사신들의 애정 또한 쉽게 얻어냈다.
그래서. 그랬기 때문에. 칼날이 바람을 베었다. 살짝 일그러진 미간, 그러나 표정의 변화는 뚜렷하지 않았다. 땅에서 한 발이 떨어지고 몸이 돌았다. 뜰의 양 옆에 서 있는 붉은 단풍나무들이 걸음 사이로 낙엽을 쏟았다. 칼날이 버석하게 마른 이파리 두 장을 가르면 흐릿한 가을 냄새가 코를 스쳤다. 일찍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서국의 산에 가득 찬 다른 단풍들을 보고 있었을 거였다. 인지하고 있던 바와 같이 시엘이 꼭 친구의 거리만을 유지해 주기만 했어도. 그렇게 가볍게 굴어선 안 되었던 거였다. 여전히 기억이 선명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코끝에 와 닿던 숨, 입가의 털에 닿는 따뜻하고도 촉촉한 감촉. 두 번 빠르게 회전한 뒤 무릎을 굽히고 칼을 앞으로 겨누면 펼쳐졌던 옷자락이 가라앉았다.
“저하, 중전마마께서 행차하셨습니다.”
궁의 담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검무가 끝난 뒤의 일이었다. 후크는 은장도를 칼집에 넣고 손을 모은 채 몸을 돌렸다. 그와 꼭 같이 검은 털을 한 중전이 뜰로 발을 들였다. 검은 보석을 부수어 흩뿌린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머리빗과 떨잠이 부딪히며 작은 짤랑 소리를 냈다. 후크는 숨을 가다듬으며 몸을 숙였다.
“인사드리는 것이 늦어 송구합니다, 어마마마.”
“괜찮습니다, 세자. 여행은 잘 다녀오셨나요?”
찰나의 침묵이 있었다.
“서국은 이전과 같았습니다.”
그건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중전은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저녁이면 제1왕자가 방문한다고 하더군요.”
“형님이 오십니까?”
“네. 다만 세자가 긴 여행을 다녀온 직후니, 힘들다면 보러 나오지 않고 쉬어도 괜찮습니다.”
“나중에 한 번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말과 말 사이에 간격이 자리했다. 그의 어머니도 이번 여행이 평소와 같지만은 않았음을 알아챘을 게 분명했으나 이번만큼은 관련하여 오가는 질문이 없었다. 한 쪽은 기다리고 한 쪽은 감정을 채 정리하지 못한 탓이었다. 중전은 아들을 잠시간 살피다가 간단한 안부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떴다. 후크는 검은 토끼가 궁 앞뜰을 떠나는 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실내로 향했다. 가끔은 춤보다 말이 어려운 순간이 있었다. 침소를 정리한 시종들이 미닫이문의 양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나가 봐도 좋다는 나지막한 지시에 그들이 방을 비웠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후크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주변이 조용한 가운데 반 열린 덧창 너머로 잠자리 두어 마리가 기웃거리다 사라졌다. 시엘 이드리스가 사는 곳에서는 가을에도 붉은 잠자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 후크는 나뭇잎이 속살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먼 땅을 떠올렸다.
가을볕이 부서지는 서국의 들판. 시내를 벗어나면 여름 내내 자란 풀들이 씨앗을 떨어뜨리는 황금색 언덕이 있었다. 경사로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동으로는 서국의 수도가 보이고 서로는 포도가 영그는 너른 과수원이 눈에 드는 것이었다.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긴 소매가 펄럭이는 것을 느끼며 후크는 동국에는 있되 서국에는 없는 곤충들과 서국에는 있되 동국에는 없는 정경을 말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 그는 제 쪽으로 기울어지는 단 하나의 실바람을 느꼈다. 접촉은 찰나였다. 뺨에 와 닿는 젖은 감촉, 온기가 한기로 바뀌는 순간에야 후크는 시엘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얼굴로 치민 열이 홧홧했다. 그 때의 기분은, 그러니까…….
돌아오는 데는 평소보다 사흘이 더 걸렸다. 뜰의 나무가 앙상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출발 시각이 평소보다 보름은 더 일렀기 때문이었다. 오는 내내 날씨는 지독하게 맑았다. 불쾌할 정도였다. 후크는 눈을 깜박이다 완전히 감았다. 피곤했다. 언어들이 머리에서 헤엄치다 잦아들었다. 춤을 추어 그려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귀환 여행 내내 꾸었던 꿈과 같은 꿈을 꾸었다. 환상 속에서 눈을 감았다 뜨면 사방이 왁자했다. 몽악제 날이었다. 시엘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시엘 이드리스가 군중 사이 어딘가에 있으리란 점을 알았다. 처마에 붙은 풍경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자 사람들이 물러나 나아갈 길을 냈다. 건물 그림자에서 벗어나 걸음을 떼면 옷에 붙은 장식이 흩날렸다. 왕족과 신하와 일반 백성들이 모두 그를 보고 있었다. 그간의 일반적인 왕족과는 다르게 검은 털을 한 토끼, 그러나 흰 눈 사이 검은 보석처럼 다정하고 아름다워 사랑받을 왕자.
그는 누에고치처럼 겹겹이 손목을 덮은 옷자락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음악이 시작됐다. 춤을 추면서 후크는 군중 사이에 섞여 선 시엘을 발견했다. 털은 태양빛 아래에서 찬란하게 희었으며 낯에는 평소와 같은 미소가 선명했다. 곁에 선 다른 토끼들이 시엘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냈다. 서국 태자의 주변으로 작달막한 빈 원이 생겼다. 모여 선 이들이 드리운 그림자가 짙어 날이 맑은데도 원 안에서는 냉기가 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두 왕자의 눈길이 만났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후크는 먼저 시선을 떼고 몸을 두 번 돌렸다. 내어 뻗은 손이 앞을 가리켰다가 소매를 물결처럼 끌어 허공에 띄웠다. 다시 시엘이 있던 자리를 보았을 때 흰 토끼가 서 있던 구석은 비어 있었다.
“세자 저하, 왕자마마께서 행차하셨습니다.”
부르는 목소리에 후크는 퍼뜩 눈을 떴다. 그새 누군가 저를 옮겼는지 몸은 이불 속에 있었다. 뜰의 나무가 낙엽을 쏟으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자 귀에 한기가 닿았다. 어쩌다 주변도 정리하지 않고 까무룩 잠들었던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옷매무새를 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기침이 튀었다. 후크가 입가를 문지르고 다소 버석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어오시라 하게.”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위로 젖힌 창에서 바람이 밀려들었다. 가벼운 목례와 함께 방으로 발을 들인 그의 형은 주변을 살피다가 말을 건넸다.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고 들었네,”
“일이 있었습니다.”
“아직 한가을이라고는 하나 밤이 차니 창문을 닫고 이야기하지.”
후크는 무감한 낯으로 상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인을 불렀다.
“여보게.”
“예, 마마.”
“창을 닫아 두고 차를 내 오겠나?”
“알겠나이다.”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이 물러가자 후크는 얼굴을 한 번 문지르고 근처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의 형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애정 어린 시선이 동생 되는 세자의 얼굴에 머물렀다. 틈새에 섞인 애정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한 채, 후크는 다시금 옷차림을 가다듬고 손님을 응시했다. 여염집 여인과 결혼하겠다며 궁을 떠난 가족을 대할 때면 언제나 목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싫은 것 같기도 했고 걱정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방문객 쪽이었다.
“서국에 다녀오는 길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나?”
“나쁘게 대한 이들은 없었습니다.”
“그건 기쁜 일이군. 궁 바깥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세자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들어. 백성들이 모두 자네를 소중히 여기니, 오는 길에 문제가 생겼던 거라면 다들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야.”
후크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뒤늦게 도착한 궁인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탁자에 다과를 차렸다. 궁을 떠난 왕자는 설탕 입힌 사과 조각을 한 입 베어 문 뒤 두 개의 잔에 차를 따랐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어머니께서 대화를 해 보라 하시더군.”
“그렇습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 것 같다 하셨어.”
그러면서 왕자가 입을 움직였다. 그렇게 이어진 단 하나의 질문은 예상 외의 것이라서. 양 손으로 들어 올린 잔에서 찻물이 넘칠 듯 흔들렸다. 후크는 뒤늦게야 일갈했다.
“…아닙니다.”
“그래? 서국에서는 인사로 뺨에 입맞춤을 한다기에 그 문제로 당황하였나 했네.”
“그 문제는 신경 써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렇다면야. 늦은 시간 세자의 시간을 너무 빼앗은 것 같네, 돌아온 날이니 푹 쉬게.”
형이 복도를 건너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크는 조용히 문을 닫고 침대로 돌아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토끼 귀를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한참 바닥을 노려보고 있으면 뒤늦게, 시엘의 행동이 단순한 인사였을 뿐인데 과하게 반응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염려가 이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하필 대화를 하라고 형을 보낸 이유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형은 정인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자리마저 내려놓은 전 세자였다. 보고 있으면 시엘 또한 다정한 체를 하다 훌쩍 자신을 떠나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이다음 가을에 서국을 방문한다고 해도 이번 건에 대해서는 도통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점점 커져 제 귀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이튿날, 후크는 일어난 열에 반나절을 앓았다.
겨울과 여름이 지나는 동안 이따금씩 서국에서도 사신이 왔다. 듣자하니 서국 태자가 근래는 털 없는 얼굴과 머리 옆에 붙은 귀를 하고 다닐 줄 알게 되었다는 모양이었다. 한 번은 사신들이 세자를 위한 편지를 내민 적도 있었다. 간단하게 안부를 묻는 양피지와 함께 도착한 것은 박제된 한 마리의 푸른 나비였다. 후크는 붓을 들고 한동안 고민하다가 나비는 살아 있는 편이 박제된 편보다 좋다고 답장을 썼다. 선물에 대한 감사 인사와 함께. 그는 서신과 잘 말린 백매화 가지를 사신들 편에 함께 딸려 보냈다. 박제된 푸른 나비는 한동안 그의 방에 놓여 있다가 궁의 다른 곳을 장식하기 위한 장식물로 넘어갔다. 그런 물건을 관리하기에는 후크 본인이 지나치게 바빴던 탓이었다. 장식물을 옮기던 날 그는 흰 나비를 받았더라면 더 신경 써서 살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고 있자니 떨어진 곳에서 궁인들이 하는 말이 들렸다.
“참, 어쩌면. 저하를 닮아서 아름답기도 하지!”
“보내신 분께서도 저하를 생각해서 이 나비를 고르신 거 아닐까?”
“근데 그렇담 왜 박제로 보냈담?”
“박제하지 않으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비가 날아가 버렸을 걸!”
이듬해, 결국 후크는 여행길에 올랐다. 한 번 오간 편지에서는 포도밭이 보이는 언덕에서의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았다. 어쩌면 시엘이 당시의 일을 그새 잊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여름이 지나기 전 후크의 고민 상담에 참여했다. 주체가 시엘이라는 점만 쏙 빼고 오간 이야기긴 했지만. 한동안 고민하던 중전은 다시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크는 동의했다. 결정을 내렸는데도 속이 쓰라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서국으로 향하는 사신들의 행렬이 함께했고 왕후가 후크의 옆자리를 맡았다. 왕은 여러 차례 아내에게 안전을 당부했다. 그의 인사는 후크에겐 야박하게도 짧았는데, 그 탓에 왕자는 서둘러 마차에 오르느라 제 뒤에서 오간 미소 섞인 대화를 듣지 못했다.
말들이 저잣거리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너머에서 어떤 아이들이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세자 저하가 지나가셔! 조심히 다녀오세요, 저하! 행렬은 해의 움직임과 함께 이동했다. 도달한 이드리스 국의 가을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동국 방문자들이 궁의 황제와 황후를 만나 인사를 올리는 동안 시엘 이드리스는 한 편에 조용히 서서 침묵을 고수했다. 후크가 찰나의 순간 그를 곁눈질했을 때는 웃었던 것도 같았으나, 눈을 바로 떼어 버린 탓에 분명하지는 않았다. 후크는 무표정한 낯을 유지하며 자꾸 빨라지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늦추려고 노력했다. 시엘과 다시 이전처럼 지내고 싶었다. 희망 사항이 있음에도 오래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한 차례 의식과도 같은 인사가 끝나자 서국의 황후가 부채를 들었다.
“손님들께 방을 내어 드리세요. 참, 동국의 황후시여.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으실까요?”
“물론이지요.”
“그렇다면 정원의 호수에 배를 띄우라 하겠습니다. 정원을 새로 꾸며 호수에서 보는 꽃이 아름다울 겁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재치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기대하지요. 세자도 태자와 함께 잠시 주변을 둘러봄이 어떠한가요?”
또다시 시엘과 후크의 눈이 마주쳤다. 시엘은 털이 보송한 뺨과 쫑긋한 귀를 움직이며 입모양으로 인사했다. 그는 청색과 금색 포인트가 들어간 흰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한 해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치 번민한 것이 후크 헤이즐 혼자뿐인 것처럼. 명을 받은 시종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한 탓에 실내에도 바람이 일었다. 목 언저리를 스치는 바람이 유독 선득하다고 생각하며 후크는 한 발짝 늦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리하겠습니다.”
다시. 동국의 국민들이 후크를 좋아하듯 서국의 국민들 역시 시엘 이드리스를 사랑했다. 흰 토끼와 검은 토끼가 깔끔하게 닦인 길을 따라 걸어갈 때 벽돌집의 주민들은 창을 흘깃거리며 두 왕자를 지켜보곤 했다. 오래 전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서국의 토끼 왕들은 뱀의 가호를 받는다고 했다. 시엘 이드리스는 말 그대로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처럼 보였다. 긴 길을 지나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후크는 그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기실, 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었다.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다며 앞서 가는 흰 뒤통수에는 유감이 없었으나, 여전히 어떤 태도로 그를 대해야 할지 확신이 부족했다. 상대는 깃털 같았다. 가벼움이 싫었다. 그러나 가벼움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면 그 말소리에 얹혀 있던 것마저 날아가 사라질 것 같아서. 서국의 태자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틀어져서는 곤란했다.
이동해 감에 따라 행인의 간격이 빽빽해졌다. 인파를 일정한 걸음으로 파고들어 지나가며 시엘은 곧잘 뒤를 확인했다. 여러 차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는 후크의 옷자락만을 잡았다 놓길 반복했다. 왕자가 지나가자 주민들은 쉽게 지나갈 자리를 냈다. 시엘은 토끼들이 몰려 들어가고 있는 커다란 문 안으로 향하더니 정장을 입은 이에게 뭐라고 말을 건넸다. 사방에서 떠드는 소리 때문에 목소리는 후크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지 않았다. 문을 지키던 이가 미소를 짓고 두 토끼를 들여보냈다. 여전히 잔디가 싱그러운 정원으로 들어서면 중앙에는 긴 버진로드가 자리했고 그 끝에는 단상이 하나 서 있었다. 단상 뒤에서 노신사 하나가 종이를 정리했다. 시엘이 빈 원형 테이블 하나를 잡아 의자에 앉았다.
“이쪽이야, 후크! 다 왔어.”
“여긴 어디야?”
“소백작의 결혼식.”
곁에 앉아 주변을 보면 문가에 서 있던 이가 하객들로부터 축의금을 받는 모습이 보였다. 한 켠에서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연주했다. 하객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후크는 예전과 같은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을 꺼냈다.
“여긴 왜?”
“결혼식은 멋진 행사잖아? 나랑 구경하면 좋지 않아?”
대답하면서 시엘이 몸을 숙였다. 속삭임이 붙었다.
“그리고 신부 드레스가 정말 예쁘거든.”
“벌써 봤어?”
“응! 이 근처 옷가게에서 뭘 만들고 있어서 물어보니까 신부 드레스라면서 보여주던데?”
후크는 잠시 고민했다. 동국에서야 반드시 그런 것은 또 아니었으나, 서국에서는 신부의 옷이 결혼식의 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묻는 것이 무례일까, 아닐까를 고민하던 것도 잠시. 그는 시엘의 시선이 집요하게 얼굴로 따라붙는 것을 느꼈다. 눈이 마주치자 시엘은 고개를 돌렸다. 지나가던 웨이터가 그들 앞에 와인잔을 하나씩 내려놓고 포도 주스를 부었다.
“나는 나랑 결혼하는 사람도 결혼식장에 그런 모습으로 들어왔으면 좋겠어.”
시엘이 말했다. 후크는 한 쪽 귀를 내리고 오른쪽 귀만을 쫑긋 세웠다.
“그런 모습?”
“그냥 취향 얘기야, 그나저나 이 포도 주스 되게 신선한 거 알아?”
음악이 바뀌었다. 결혼식의 시작이었다. 주례사가 시작되고 흰 정장을 걸친 신랑이 입장해 단상 앞에 섰다. 노신사가 신부의 입장을 알리는 순간 하객들이 일제히 정원의 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붉은 레드 카펫 끝에 새까만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서 있었다. 천장 없는 정원에 쏟아지는 햇빛은 찬란해 사방을 희게 물들였고 신부의 모습은 순백 가운데 보석처럼 선명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드레스의 검은 레이스 위로 푸르스름한 빛을 드리웠다. 신부가 걸음을 떼자 하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따라 앞발을 마주치던 후크는 문득 곁에서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옆에 놓인 유리잔의 표면에 흰 토끼의 모습이 비쳤다. 시엘은 턱을 괴고 후크 헤이즐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오케스트라가 트럼펫을 연주했다. 와인이 흔들리면서 유리에 맺힌 상을 지웠다. 부친의 손을 잡고 길 끝까지 도착한 신부의 손을 신랑이 받아 쥐었다. 화동들이 실크 쿠션에 반지를 얹어 들어 올리자 주례사가 시작됐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 우리는 한 쌍의 연인들이 맺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섰습니다……. 사방을 살펴보면 앉아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성인이었다. 어른들 사이에 끼어 과자를 집어먹는 아기 토끼들도 있었지만, 대개 털북숭이 발보다는 부딪히면 큰 소리가 나는 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후크는 뒤늦게 시엘이 모습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던 소식을 떠올렸다. 그도, 저도, 이제는 약관의 나이가 찬 시점이었다. 하다못해 새 약혼 소식이라도 들려 올 때가 되었는데 꼭 그 소식만은 없었다. 신경이 쓰였다. 왜 이런 문제로 마음이 쓰이는지는 도통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신랑은 오늘 신부의 것이 되고 신부는 신랑의 것이 될 것인즉, 이것은 다만 소유의 사랑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까닭은.”
“나 이제 모습 바꿀 수 있어.”
정원에 울리는 주례사 사이로 시엘의 속삭임이 끼어들었다. 후크의 귀가 움찔 흔들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뒤로 몸을 기울여 대답했다.
“얘기 들었어. 언제부터 된 거야?”
“지난 가을부터. 후크는 어때?”
“더 연습해야 돼.”
“후크 변한 모습 보는 것도 기대된다.”
“그러고 보니까 나한테 편지 보냈을 때 답으로 꽃가지보다 좋은 걸로 보낼걸 그랬어. 축하 선물 삼아서.”
“후크가 주는 선물은 다 좋으니까! 그리고 물건 선물보단 나하고 보내는 시간이 더 좋아.”
주례가 이어졌다. 노신사는 신랑과 신부를 앞에 두고 짧은 옛 이야기를 구연했다. 세상에 늑대와 양이 있었던 아주 먼 옛날, 털이 흰 늑대가 검은 양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양들도 검은 양을 사랑했고 늑대들도 흰 늑대를 좋아했지요. 이때는 화친의 시대라, 흰 늑대와 검은 양은 곧 친구가 될 수 있었답니다. 검은 양은 늑대를 친구로서 좋아했지만, 늑대는 달랐어요. 세상은 그를 사랑했지만 그는 검은 양만을 사랑했거든요. 그림자마저 흴 것 같은 동물의 속은 그 무엇보다도 검어서, 그는 검은 양을 볼 때마다 한 입에 집어삼키고 싶은 욕구를 참기 위해 노력해야 했답니다. 이어지는 말을 들으면서 후크는 양 귀를 내리고 잔에 든 것을 들이켰다. 포도밭이 보이는 언덕에 대한 생각 때문에 집중이 어려웠다.
‘화해’가 필요한 상황 같진 않았다. 후크는 시엘을 이전처럼 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시엘은 정말 예전과 같이 후크를 대하는 중이었다. 성급한 접촉도 없었다. 오히려 자제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렇게 되니 오히려 더 한 해 전 자신이 재빠르게 돌아가 버린 건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냥 모른 척 흘리고 싶기도 했지만 어째선지 그게 쉽게 되질 않았다. 다시금, 지나치게 가벼운 것은 싫었다. 가벼운 것들은 흔적만을 남기고 쉽게 날아갔다. 자국을 끌어안는 것은 남겨진 이들이었다. 테이블에 올린 손 뒤로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시엘이 손을 후크의 손 가장자리에 콕 부딪히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결혼식 진행되는 중이잖아.”
“우린 안 보여.”
후크는 시엘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어 눌렀다. 흰 토끼 발이 검은 토끼의 발 위로 한 번 더 올라왔다. 손 사이에 제 손이 끼도록 두면서 후크는 다시금 고민에 빠져들었다.
“신랑은 신부에게 키스하십시오.”
주례가 상념을 깼다. 다시금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놀라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뛴 후크의 몸이 기울어졌다. 으레 넘어지기 전에 할 수 있는 대응이란 한 가지 뿐이었다. 후크는 잔을 도로 테이블에 올려놓는 데는 성공했으나 자신의 몸을 가누는 데는 실패했다. 무게 중심이 깨지는 것을 느끼는 순간 뒤에서 끌어안는 손길이 있었다.
“위험할 뻔 했지?”
시엘이었다. 잠시 굳어 있던 후크가 대답했다.
“고마워.”
기본적으로 동국에서 혼례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는 알았다. 신랑의 가족과 신부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고, 패물을 주고받고, 식을 진행하고, 술을 나눠 마시고. 서국에서는 술을 나눠 마시는 대신 키스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양이었다. 시엘은 후크를 얌전히 세워 앉히고는 그의 잔을 집어 남은 무알콜 포도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자신의 것이라 반박을 하려던 찰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이 다시 바뀌었다. 웨이터들이 지나가며 테이블에 핑거 푸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일부 하객들이 춤곡에 맞춰 몸을 움직이자 시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후크!”
“돌아갈 거야?”
“아직 즐길 게 한참 남았어! 춤도 안 추고 가려는 건 아니지?”
시엘이 후크의 손을 잡아끌었다. 얼떨결에 일어나 따라 들어가고 나면 그새 주단의 가장자리였다. 레드 카펫을 밟으며 시엘이 후크의 몸을 살짝 들어 빙글 돌렸다가 내려놓았다. 빠른 대화가 오갔다. 허리 잡아도 돼? 안 돼. 손 떼고는 춤추기 힘든데. 이번만이야. 후크가 어깨에 손을 올린 뒤에야 시엘이 그의 허리춤에 손을 댔다. 맞잡은 손, 몸이 빙글 돌면 펄럭이는 비단옷이 바람을 머금었다. 음악은 더 경쾌해졌고 몇몇이 춤추는 왕자와 그의 파트너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신부가 자신의 친구들을 향해 부케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꽃다발이 태양을 가리면서 모여 선 아가씨들 사이로 떨어졌다. 틈에서 빠져나온 꽃 한 송이가 시엘의 어깨를 잡은 후크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처음 리드한 것은 시엘이었으나 두 번째 춤이 시작되었을 때 주도권을 잡은 것은 후크였다. 부딪히는 숨, 풍겨 오는 달짝지근한 포도 향기 속에서 후크는 작게 웃었다. 즐거웠다. 그리하여 후크 헤이즐은 시엘 이드리스가 일그러진 사랑만을 아는 부류라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미소 없이는 지독히 무기질한 얼굴이 된다는 점도, 맑은 목소리가 숨기는 냉랭함에 대해서도. 그리고 시엘 역시 자신이 아름다움과 공허의 혼합물이라는 점을 이 순간에 말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었다. 동국의 검은 왕자는 서국의 흰 왕자를 이끌고 꿈을 그리는 춤을 추었다. 도망치듯 시엘을 떠나 궁의 뜰에서 추었던 춤은 칼 대신 파트너를 손에 쥐고 출 때 더 편안하게 이어졌다. 움직임이 빨라지면 숨도 가빠졌다. 시엘이 물었다.
“내년에도 놀러 올 거야?”
“응.”
“역시, 후크도 우리가 인연인 걸 느끼는구나! 몽악제도 구경하러 갈래.”
“걱정하시지 않게 허락 받고 와.”
“지난번에 갔을 때도 결국 다들 좋아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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