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깨찰빵 (여름벌레, @angelightb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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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틀어졌는지. 후크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누르며 대련장을 응시했다. 굳이 따지자면 능력을 써서 또 기억을 잃은 것이 화근이었다. 물론 그는 이제 자신이 보내야만 하는 것들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평소엔 부작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 죽음과 승리의 알력다툼이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기나 했던가? 최근의 주 임무는 여전히 시엘 원수의 산책에 어울리는 것이었으나, 항상 편한 일만 고집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시엘이 병석에서 일어난 지 겨우 반나절이 넘었을 무렵이었다. 대개 맡는 일의 특성상 시엘이 침대에 머무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비었다. 그들의 부대는 실상 한 사람에게 거의 모든 일을 맡겼으므로, 당사자가 완전히 앓아눕게 되면 공석을 메우는 데 상당한 자원이 들어갔다. 부관직을 맡은 이가 바뀐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이드리스 원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명실상부 후크였다.
그러니까. 후크는 맞은편에서 몸을 풀고 있는 연인을 건너다봤다. 본래는 그와 함께한 소중한 기억을 한 톨도 잃어버릴 계획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당장 현재를 사는 애인이 아픈 마당에 과거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던가! 그를 대신해 간단한 임무에 나간 것은 운명에 의한 강요의 산물이었다. 부상은 없었지만 손상은 있었다. 혹자는 S급조차 죽어 나가는 판국에 산책 임무만 잊어버리고 끝난 게 천운이라고 했을 터였다. 그러나 당장의 대련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손발은 풀어 뒀어?”
“벌써 대련부터 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원수님.”
“패널티도 끝났으니 괜찮지.”
공석에서의 대화라기엔 애매했고 사석이라기에도 모호했다. 그들이 서 있는 벙커 내의 대련장은 부대 내 공용 공간이었는데, 때가 저녁 열 시 경으로 비교적 늦어 들어오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직전까지 ‘산책’을 한 내부 통로에서도 마주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높은 확률로 중간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을 눈치였다. 그래도 둘만의 벙커는 아니니까. 후크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기로 했다.
“대련보다는 산책이 몸풀기에 좋지 않겠습니까?”
“나도 아직 현역일세, 중령.”
공적인 어투로 문장을 바꾼 시엘의 목소리 너머에는 어떤 다른 의미가 묻혀 있는 것 같았다. 목이 멘 억눌린 음성. 무시당한다고 여겨 꺼낸 말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상실하기 직전 매달리는 사람의 언어에 가까운. 특정한 흔들림. 명확히 짚어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엘은 예의 그 천사 같은 미소를 바로 지어 보였다. 후크는 자신의 손목을 가볍게 돌린 뒤 몇 발짝 떨어져 있는 위치의 문을 닫았다. 틈새로 보였던 복도는 끝에서 유령이 나올 것처럼 침침했다. 젖은 공기. 시엘이 걷기보다는 대련을 하고 싶다고 말을 돌리게 만든 비 온 날 특유의 무게감이 지하까지도 퍼진 상태였다.
후크는 자신의 장비를 한 번 확인한 뒤 시엘의 장비 상태를 점검했다. 총과 같은 공격적인 무기는 쓸 계획이 없었지만 간단한 호신용 도구는 사용할 예정이었다. 아무리 강약 조절을 하더라도 다치지 않으려면 확인이 필요했다. 시엘은 가만히 서서 기다렸으나 별다른 말을 얹지도 않았다. 대련장은 두 사람이 점유하기에는 상당히 컸다. 웬만한 이능력에는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벽면이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한 쌍의 발소리를 메아리로 증폭시켰다. 몸을 돌린 후크는 시엘을 마주한 채 막대를 검처럼 들었다. 떨어진 곳에서 순백색의 큰 점처럼 보이는 상관은 굳이 철저하게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신호는 무음이었다. 몸을 숙인 채 직선으로 달려든 후크는 막대를 횡으로 그었다. 바깥으로 쳐내듯 이는 바람, 동시에 시엘이 땅을 박찼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나가는 찰나 후크는 무기를 휘두른 방향으로 몸을 틀며 팔을 들었다. 청명한 소음. 한 쌍의 봉이 교차한 채 대치했다. 후크는 빠르게 한 손을 미끄러뜨려 막대의 다른 쪽 끝을 지탱했다. 검처럼 든 막대를 내리누르는 시엘의 눈에 그의 얼굴이 담겼다. 청명하면서도 기묘하리만치 공허한 눈동자. 수면에 세계가 비치는 맑은 물에 정작 고기가 살지 않는 것과 매한가지 꼴이었다. 내리누르는 것들끼리 스치는 불협화음, 다음 순간 시엘이 한 손을 거꾸로 틀어 막대 중간을 쥐었다. 후크가 몸을 트는 찰나 상대의 무기 끝이 배가 있던 공간을 찍었다.
그리고 찰나는 모든 것이어서. 시엘의 손에서 막대가 미끄러졌다. 순식간에 그의 팔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후크의 무기가 그가 쥔 것을 바깥으로 내리친 탓이었다. 연이어 봉의 중앙을 시엘의 목을 향해 들어 올리려던 후크는 자신의 손에서 정체불명의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을 인식했다. 그것이 모래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것은 직후의 일이었다. 나무로 된 막대가 물과 섬유질로 분쇄되고 있었다. 찰나 후크의 눈에서도 평정이 깨졌다. 시엘이 주먹을 날렸고 후크는 몸을 숙이며 옆구리를 향해 손날을 휘둘렀다. 통증과 함께 신경계에서 이는 불꽃, 연이어 그는 발뒤꿈치로 바닥을 밀어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뒤로 미끄러지는 몸. 정강이가 욱신거렸다. 주먹질하는 시늉을 하며 자세를 잡은 상대가 무릎을 올려친 탓이었다.
“원수, 이게 상식적인 행동입니까?”
“안될 거 있나?”
시엘이 옆구리를 붙잡은 채로 웃었다. 이어지는 말들은 그의 선제공격으로 흩어졌다.
“난 네가 이제 기억을 소중하게 생각할 거라고 믿었어! 믿음도 의미가 없는 이제 상식이 무슨 소용이지?”
근처에는 막대 하나가 여전히 떨어져 있었으나 이드리스 원수는 더는 무기를 쓰려 들지 않았다. 후크는 머리 위로 주먹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팔목을 잡고 팔꿈치를 들이박았다. 다시금 격통. 목과 등 사이였다. 후크는 곧바로 몸을 돌려 상대의 옆으로 빠지면서 발을 걸었다. 시엘의 몸이 기울어지는 순간 후크는 본능적으로 상대를 잡으러 들었다. 가까워지는 순간 흰 장갑이 검은 소매를 쥐었다. 몸이 바싹 붙었다. 신발이 바닥에 끌리는 날카로운 소음.
“이런 식일 거면 이 모든 짓에 무슨 의미가 있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파견 다녀오면서 무슨 기억을 잃어버렸는지 모를 것 같아?”
바깥, 흐린 포화의 소리. 튀어나온 목소리는 그보다 컸다.
“빌어먹을, 나도 네가 죽는 꼴 보기 싫어!”
전쟁에서 개인은 부품이었다. 바깥에서 폭격 소리가 이어졌다. 아득하고도 먹먹해 다른 세계에서부터 날아든 것 같은 음색. 눈이 마주쳤다. 후크가 천천히 발음했다.
“시엘에 대한 기억이 날아간 게 아니야.”
시엘 나다니엘 이드리스가 영원히 부대의 연승을 책임져야 한다면, 그는 전쟁이 끝나기 전 반드시 소모된다. 후크 블랙 헤이즐이 그를 대신한다면 그는 필연으로 사망한다. 그것은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죽어갈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 사실이었다. 인간마저 분해할 수 있는 원수도 단 한 사람만큼은 분쇄하지 못했다. 손이 팔에서 어깨로 옮겨 갔다. 후크를 부드럽게 당긴 시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포개지는 입술, 찰나 당황해 커졌던 후크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것은 친애였다. 갈망이었고 우울이었다. 입술 안쪽을 쓸어 만지듯 적신 혀가 잇몸을 따라 미끄러져 순식간에 깊은 자리의 살을 짚었다. 목 안에서 이는 불분명한 웅얼거림. 시엘이 조금 더 팔을 당겼고 후크는 그의 목을 안았다. 안으로 들어온 혀가 입천장 깊은 자리의 부드럽고 연한 살을 쓸었다가 혀뿌리를 건드렸다. 떨리는 몸, 후크는 들어온 것을 부드럽게 감아 빨았다. 혀를 비비듯 안으로 당기면 젤리 같은 것을 삼킬 때처럼 뭉근하니 말캉한 감각이 일었다. 물소리. 은밀한 자리를 헤집듯이 문지른 혀가 입천장을 따라 느리게 빠져나갈 때 그는 몸을 떨었고 연이어 빠져나가는 것을 따라 입술의 선을 넘었다.
오래도록 세계에는 비가 내릴 것이었다. 물로 이루어진 것들. 눈물로 된 것들. 재와 파편으로 이루어진 어떠한 흔적들. 심장이 짓이겨지는 감각이 이는 날에도 생은 이어졌고 숨은 끊기지 않아 연인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 시엘의 입안으로 침입하여 들어간 입맞춤은 사람들 앞에서 후크가 사용하는 말들보다는 온난했고, 동시에 조금은 서툴렀다. 혀가 상대의 움직임을 좇아 쫓으면 부은 살과 살 사이가 비벼지며 입술이 젖었다. 눈꺼풀의 떨림, 열 섞인 숨이 뺨을 스쳤다. 시엘이 후크의 목을 매만지며 입을 떼어내는 찰나 가는 타액이 사이를 이었다가 끊겼다. 후크는 이마를 댔다. 속삭임, 이어진 말은 그 어떠한 역사서에도 실리지 않을 말이었으되 그것만으로도 당장은 충분했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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