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부터는 상반기 / 하반기 나눠서 정리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부분 캡쳐 방식으로 올려 두었습니다만 옛날 글이란 정말 끔찍한 것이로군요....
2012 (10/16)

2013 (8/4)

2014 (12/6)

2015 (10/5)

2016 (11/20)
여기서부터 접은글로 들어갑니다.
2017 (12/30)
2018 (11/21)
신의 형상
타조가 어설픈 걸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들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구의 한쪽 면을 넘고 있었다. 연구원이 속력을 내 앞서 가기 시작하자 타조를 탄 신이 헛기침을 했다.
“너희는 사막에서 너무 빨리 가려고 하면 안 돼.”
연구원은 대꾸 없이 신을 올려다보았고, 곧 인상을 쓰면서 시선을 돌렸다. 신의 머리색 때문이었다. 음지에서 자줏빛을 띠는 그의 머리카락은 햇빛만 받았다 하면 쨍한 마젠타 빛으로 반짝였다. 대부분의 도시 거주민들은 그런 식으로 머리를 염색하지 않았다. 백 년쯤 전에나 유행했을 머리 스타일이었다. 신이 다시 말했다.
"사막에서 오래 살 수 있게 설계된 게 아니거든."
"그래요."
연구원이 툭 대꾸했다. 판테온이 어디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신은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만을 쉽게 떠올렸다. 물론 그의 권능은 애초에 길찾기가 아니라, 삶과 죽음에 관련된 것이었으므로 이런 것들만 잘 아는 게 당연하긴 했다. 그 분야에 대해선 굳이 알고 싶지 않으니 문제였지. 신은 또다시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고 연구원은 입을 다물었다.
여름과 겨울마다 급격하게 변하는 기온은 도시를 제외한 모든 곳의 사막화를 낳았다. 옛날을 그리워하는 주민들은 신들이 있을 적에는 이러지 않았다고 수군거렸다. 기록에 따르면 과거에도 이상기후는 자주 목격되었다고 했으나 대개 그런 정보는 민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법이었다. 나이 든 이들은 전능했던 신들만을 기억했다. 거주지의 날씨를 통제하고 기술로 불행을 덮으면서도 학자들은 절대자들의 존재를 연구했다.
사막 어딘가에 판테온이 존재한다는 건 일단 기정사실이었다. 사람들이 미쳐 신들을 학살했던 그 날 이전에 최상의 존재들은 이미 어느 오아시스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했다. 마법으로 만들었는지 어쨌는지 예의 그 '오아시스'에는 항상 얼음이 떠 있다고 했으며 주변 기온도 선선하다고 전해졌다. 사람들은 신들만이 그곳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길잡이가 될 존재를 찾는 데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갔다.
"요샌 그렇게 안 해요."
텐트를 쳤을 때 땔감에 불을 붙이려는 신을 향해 연구자가 말했다. 신은 돋보기를 거뒀다.
"그럼?"
학자가 소매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을 뽑아들었다. 그게 나무 더미에 닿자마자 크게 불길이 일었다. 신은 타들어가는 것을 관찰하다가 말했다.
"뭐야, 그거? 나한테도 하나 주는 영광을 누리게 해 줄게."
"만지시면 안 돼요."
"왜? 내가 신인 거 알잖아? 그거 건드리겠다는데 허락을 받아야 해?"
"필멸자시잖아요. 저흰 아니고."
신이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을 토했다. 연구원은 그가 가만히 텐트 앞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불빛 속에서 초록색과 하늘색이 섞인 홍채가 기이하게 반짝였다. 신은 대충 묶었던 꽁지머리를 풀고는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었다. 모래가 떨어져 내렸다.
"내가 이런 식으로 도태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정신 차려 보니까 다른 녀석들은 어디로 갔다고 하지, 도시엔 아는 놈이 하나도 없지, 이제 와선 신기술도 못 쓰는 퇴물 취급 받고 있잖아. 역시 늙으면 죽어야 한다 이건가?"
"일단 판테온에 가면 뒤처진 것도 아니게 될 텐데요, 뭐."
침묵 속에서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만 났다. 연구자는 맞은편에 앉은 이를 곁눈질했다. 그들의 길잡이를 찾은 건 두어 해 전의 일이었다. 찾았다기보단 발굴했다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었다. 먼 옛날 신들은 보통의 시민들과 달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 동족을 죽이는 존재에 대한 처벌을 확실하게 내렸다고 했다.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신들은 온기를 제거당한 채 아주 긴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 신도 '그런' 부류였다. 잠들어 있는 다른 이들도 있었으나 잠들기 전 깊은 병에 들어 있었던 경우도 많았다. 확실하게 건강한 존재를 고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악신이지, 우리를 이 상태로 몰아넣는 데 지대한 기여를 한 분이시니까.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해. 우릴 미치게 하는 저주도 내릴 수 있어. 떠나던 날 연구자에게 수석 연구원이 말했다.
선택할 수 있었으면 다른 이를 선택했을 거였다. 오랜만에 갇혀 있던 곳에서 빠져나왔겠다, 막말로 동행인을 토막내고 혼자 오아시스를 찾으러 가도 되는 상황인 것이었다. 아무리 연구자에게 정해진 수명이 없다지만 도움 받을 곳이 전혀 없는 이런 허허벌판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게 분명했다. 유일한 희망은 신 역시 약하기 짝이 없다는 데 있었다. 낮의 열기도, 밤의 냉기도, 심지어 피조물들조차 신을 쉽게 죽였다.
"안 찾고 도망치진 않아."
신이 말했다. 그는 둘둘 말린 침낭을 끌어 와 품에 안고는 벨트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매끄러운 표면이 모닥불 빛을 노랗게 반사했다. 작은 쇳소리. 오는 길에 그가 밤마다 손댔던 물건이었다.
"알아요."
"하긴, 상식적으로 이 사막이 어디 혼자 살아남을 데야?"
연구자는 그의 손에서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봤다. 생명 창조가 누구만의 전유물은 아니라지만, 직접 만들어지는 걸 보는 건 여전히 낯설었다. 애벌레를 닮은 몸에 날개가 붙었고 더듬이가 돋아났다. 태엽을 감는 듯한 손동작을 두어 번 한 뒤 신은 은색 나방을 위로 날려보냈다. 나방이 별처럼 선명한 빛을 내며 주변을 날아다니다가 다시 손으로 돌아와 앉았다.
"이런 녀석들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 이 나방은 도시에서 만들어진 녀석보다 일찍 죽을 거야. 뜯어먹고 살아갈 만한 게 없잖아. 나비라면 사실 좀 더 자신이 있는데, 밤에 활동하는 동물들은 역시 아직 좀 어려운 것 같아. 나보다 재능이 많은 애들이야 이것도 알아서들 잘 했겠지."
"저기."
연구자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곧바로 다시 입을 다물었고 신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연구자는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신이 표정을 지우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리까는 눈, 낮은 목소리로 이어져 나오는 말.
"도착하고 얘기하면 안 돼요?"
잠시 그를 보던 신이 웃음을 터뜨렸다.
"실수로 죽일까 봐 그래?"
도착하려면 근데 한참 남았다고. 그때까지 말도 안 하면 지루해서 어떡해? 길게 이어지는 문장들 속에서 연구자는 입만 뻐끔거리다가 다시 낮은 목소리를 냈다.
"말하는 게 힘들어서요."
"하긴 너희는 나하고 얘기할 때 빼곤 말도 잘 안 하더라."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수습 연구원일 때 여행을 시작했더라면 더 참을성이 있었을 거였다. 아니, 정신만 더 맑았어도 이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윗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알랑거려야 하는 시절은 50년도 전에 지나간 뒤였고 익숙지도 않은 비위 맞추기를 계속 하기엔 지나치게 주변이 더웠다. 신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만들 때 주지도 않은 텔레파시 능력을 개발하더니 말을 듣지도 않게 되었다는 둥, 하여튼 또다시 실컷 떠들 거라고 연구자는 짐작했다. 그는 목을 문질렀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알다시피, 기도는 말로 하는 거잖아?"
연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은 머리를 다시 묶더니 흥얼거리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거 소리 마법에 대해 얘기할 차례인가? 우리가 쓰는 마법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어. 생명에 힘을 불어넣는 빛 마법과, 명령을 하는 소리 마법. 그렇게 생각하면 편할 거야."
진심으로. 가능했다면 다른 길잡이 신을 골랐을 거였다. 실탄이 든 총을 장난감마냥 휘두르는 녀석과 함께 다니는 게 차라리 안전할 거라고 연구자는 생각했다. 말마따나 언어는 마법이었다. 신들의 학살 사건 때 그렇게 많은 시민들을 움직인 것도 결국 음성 언어였다. 텔레파시 기술을 발달시킨 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 신은 모른 척 계속 이야기를 했고 연구자는 속으로 별을 셌다. 그 편이 더 견딜 만 했다.
"사실, 우리는 훨씬 전부터 너희가 우릴 없애려 들 거라고 믿고 있었어. 이 세상에 솔직히 우리는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잖아. 그래서 유난히 똑똑한 신들은 영원히 얼음이 녹지 않는 오아시스를 설계했지. 물론 다 갈 수 있는 건 아니었어. 세상엔 모래알만큼 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곳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거든. 그래서 가장 재능 있는 자들만이…."
낮이 오자 밤에는 나방이었던 나비가 길을 인도했다. '움직이는 별들'의 힘을 빌려 근처에서 가장 온도가 낮은 지역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면 별자리도 바뀌는 법이었고 오래 전에 잠들었던 신이 과연 현재의 별을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있었다. 귀찮아서 가만히 있을 뿐이었지. 창조주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밤에도 계속 가고 싶으면 횃불을 쓰면 돼. 이 나비는 빛이 있는 한 계속 움직일 거야.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다들 지칠 테니까 쉬긴 쉬는 게 좋겠지?"
"그래요."
그렇게 말이 많은데 소리의 마법이 아직도 오작동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게 신기한 노릇이었다. 신을 깨우기 전 다른 연구자들과 토론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세월이 워낙 오래 지난 탓에 그의 죄목이 담긴 자료는 날아가고 없었다. 어쩌면 신들의 학살 사건을 사주한 장본인이 그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 정도의 악신을 깨워서 데려갈 수는 없다는 속삭임들. 터무니없는 걱정이었던 걸지도 몰랐다. 사실 말이 많고 조언을 듣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동행자는 그리 성격이 파탄난 편이 아니었다.
연구자는 걸음을 내딛으며 옅게 이는 모래바람을 관찰했다. 나비는 그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했다. 모래가 들어갔는지 목이 버석거렸다.
"아예 사막의 지형을 바꾸는 게 낫지 않아요? 신이잖아요."
"나는 못 해. 그걸 할 수 있는 건 좀 더 실력이 좋은 애들이나…."
신은 잠깐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히 덧붙였다.
"우리의 신들 정도지."
아직도 당신들의 신을 찾아요? 라고 연구원은 텔레파시로 물었다. 잘못된 방식으로 '기도'했다는 걸 깨달은 그는 다시 질문할까 말까를 고민했다. 사실 비슷한 이야기는 오는 동안 종종 나온 바 있었다. 신은 왜 시민들이 자신을 신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고도로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그들이 보유한 기술이 자신을 압도할 텐데 왜 그런 이름으로 부르냐는 것이었다. 잠들어 있던 사이 신이라는 단어의 뜻이 바뀌었냐고도 물었다. 연구자는 자신이 아는 정의를 그대로 읊었다. ‘창조자.’
신은 자신과 그 동지들이 현재의 시민들을 만들었단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신들이 현재의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끌고 왔다는 사실에도 동의했다. 동의하면서도 그는 이 모든 것이 현 시민들을 향한 처벌이 아니라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했는데, 그걸 강조하든 말든 그가 신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 잊은 눈치였다.
그런 식으로 신은 종종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사실 연구자는 따로 진행한 연구를 통해 신들을 창조한 상위 창조주의 개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들과 그 상위 존재의 거리는 시민들과의 거리보다 멀었던 모양이었다. 시민들이 신들을 부모로 여긴다면 신들은 그 이상의 존재를 막연하게 숭배했다. ‘감히’ 그 이름을 사용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건 이해했다. 다만 하필이면 이 상황에 예의 상위 창조주 이야기를 입에 담는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무의식중에 신을 찾는 건 힘든 사람들 뿐이라던데. 연구자는 입에서 맴도는 말을 삼켰다.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무렵 그들은 작은 오아시스 하나를 찾았다. 그들이 찾던 오아시스가 아니라는 건 멀리서 봐도 확실했다. 그 방향으로 날아가던 나비를 좇던 신은 야자수의 모습이 선명해지자 우뚝 걸음을 멈췄다. 연구자는 그를 올려다봤다. 쨍한 머리색 때문에 눈이 아파 잘 보이진 않았지만, 썩 즐거워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가 탄 타조는 그 자리에서 몇 분간 멈춰 있다가 다시 천천히 발을 뗐다.
한때는 마을이 있었던 성 싶었다. 모래로 빚은 것처럼 생긴 건물들은 창문이 길고 좁았다. 한때 희었을 외벽은 먼지로 인해 누렇게 변해 있었고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발에 채였다. 전반적으로 그리 높은 집들이 아니었다. 신은 제일 먼저 오아시스로 향했다. 흙탕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수면 아래로 보이는 거뭇한 것들이 물고기인지 쓰레기인지는 판별하기 어려웠다. 신은 잠시 그대로 물을 관찰하다가 타조의 목을 밀었다. 새가 걷기 시작했다. 연구자는 나무 그늘 밑에 섰다.
“어디 가세요?”
“흔적 있나 보러.”
마치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 같았다. 찍힌 발자국을 따라 가면서 연구자는 혼자서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신은 드물다던 말을 떠올렸다. 무언가 잘못을 해서 냉동되어 있었고, 깨어난 뒤 상황 설명을 하자 캐묻는 일 없이 그러자고 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머리카락 따위를 채취해 알아보는 건 생물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몫이었고, 누가 여행을 떠날지 지정하는 것 또한 상관의 일이었다. 비유하자면 연구자는 자신이 탄 우주선에 대해 아주 기초적인 것만을 숙지한 채 달로 향하는 우주 비행사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좀 더 많은 것을 알려 달라고 하고 왔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상관은 어째서인지 그가 신에 대해 충분히 많이 알고 있다고 판단한 듯 했다. 과거의 연구자는 그의 판단을 신뢰했다.
신은 문이 떨어져 나간 어느 건물로 들어섰다. 따라 들어가는 순간 냉기가 훅 끼쳐 왔다. 묘지 위에 건물을 세운 것 같은 구조였는데, 맨땅에 누운 비석 같은 것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어두운 실내에서 몇 번 날갯짓을 하던 나비가 떨어졌다. 타조가 무릎을 꿇자 신은 나비를 살폈고 가볍게 혀를 찼다.
“날개가 핸드폰 액정보다 약했네.”
그는 더 가는 대신 나비가 떨어진 돌덩이 앞으로 몸을 내렸다. 연구자가 그 곁에 와서 섰다. 신은 먼지 쌓인 비석을 부드럽게 손으로 쓸었다. 새겨진 이름이 드러났다. …의 아담. 안에 든 게 남성체인 모양이었다. 신은 돌을 가볍게 두드리다가 손을 치웠다.
“이런 게 한창 유행이던 때가 있었어. 난 원래 할 생각 없었는데, 다들 이런 유행은 따라 주는 거라고 해서 하나 만들었지.”
“뭔가요?”
“타임캡슐. 알아?”
“신을 얼리는 거하고 비슷한가요?”
“어떤 의미에선 그렇긴 해.”
신은 생각하는 눈치였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 즈음에는 어린 신들을 데려다 놓고 이런 걸 많이 했어. 소중한 물건 같은 거 땅에 묻고 나중에 발굴하기. 학교 단위로 운동장에 타임캡슐 묻기 같은 것도 했는데, 실제로는 대부분 잊어버렸을 걸. 누가 10년 뒤에 자기 초등학교 운동장 땅을 파.”
“음.”
“아, 초등학교라든가 그런 거 모르나.”
“대충은 알아요. 옛날 신들의 학교.”
“그러면 됐어. 하여튼 그게 한창 유행이다가 또 금방 시들해졌거든. 근데 우리 중에서 유난히 뛰어난 친구가 나 자신을 묻는 타임캡슐을 만들어 낸 거야. 지금 생각하면 음침하기 짝이 없는데 당시엔 다들 좋아했어. 저렴한 가격으로 우리랑 똑같은 모습의 존재를 만들고…걔들이 최초의 ‘피조물들’이었던 것도 같네. 너희 같은 애들 있잖아. 어쨌든, 그렇게 만들고 나서 보관하고 싶은 기억을 넘겨준 뒤에 사막의 관짝에 넣는 거지.”
“해서 뭐가 좋은데요?”
“그런 식으로 잊고 싶은 기억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믿은 사람들도 있었겠고, 그게 영원히 사는 방법의 일종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겠고. 당시엔 돈 내고 목성에 땅 사는 놈들도 돌아다녔다고. 목성은 가스 행성인데 말야! 난들 아나?”
그는 돌 표면을 다시 한 번 쓸어 보더니 타조에 탔다. 하고 싶은 거 하고 놀아, 라는 그의 목소리는 텅 빈 공간에서 메아리쳤다. 연구자는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신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건물 외벽뿐 아니라 안쪽도 온통 희었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눈이 하얗게 멀어 버린 것 같아서. 연구자는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타조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아래의 사정 역시 확인하기 힘들었다. 하고 싶은 거 하고 놀라는 말은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거였다. 알긴 했다. 연구자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지하로 향했다.
내려갈수록 기온은 낮아졌다. 연구자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주변은 신들의 감옥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잠들어 있는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차이점이었지만. 냉각 탱크도 눈에 띄었고 빈 캡슐들도 보였다. 함께 온 신은 없었다. 연구자는 귀를 기울였다. 벽 너머에서 일종의 기계음이 들렸다. 어떤 버튼을 연타하는 것 같은 높은 삑삑 소리. 그는 주위를 살폈다. 벽에 버튼이 하나 있었다. 이 공간이 정말 신들의 감옥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면. 그는 버튼을 눌렀고 벽은 회전문처럼 돌아갔다. 점점 커지는 틈 사이로 연구자는 어느 캡슐 앞에 선 신의 모습을 보았다. 손에 리모컨 하나가 쥐여져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이브.”
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러나 연구자는 그 말이 분명히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드디어 소리의 마법이 사용된 거였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길 바랐고, 동시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았다. 주변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신은 리모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연구자는 캡슐 안의 얼굴을 보았다. 아마 어린 신이었을 거였다. 피가 다 빠져나간 채라도 갑자기 체온을 그렇게 올리면 그들의 몸은. 신이 명령했다. 사형 선고였다.
“기다려.”
하루 종일 연구자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나불거림은 동행인의 몫이었다. 너도 내가 모든 안드로이드들한테 인간 학살 명령을 내린 존재란 거 예측했잖아. 아니, 시민들한테 신 학살 명령을 내렸다고 해야 좀 더 이해하기 쉬운가? 원래부터 이 분야에서 유명했어. 죽고 싶다는 사람들 대신 죽여주기. 대체로 내 주변 사람들 위주로 해 주긴 했지. 신청을 받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평소에 죽고 싶다고 말하거나 객관적으로 죽고 싶어 보이는 사람들 목숨을 끊어 주는 거야. 아무리 빌어도 우리 신은 내 목숨을 끊어 주지 않았거든. 내가 또 한 공감 능력 해서 말야. 남들이 나처럼 힘들어 하는 걸 가만 두고 보기가 너무 지치더라고. 그래서 시작하게 됐어. 저기 저 애도 아마 깨어나면 죽고 싶어 했을 걸. 그래서 가장 편한 죽음을 준 거야. 너도 봤잖아. 거기 남아 있는 신은 단 한 명도 없었어.
신들이 같은 신을 죽이는 것에 왜 그렇게 충격을 받았는지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사실 이야기하기 힘들었다. 묻는다면 ‘로봇 공학의 3원칙’ 따위나 운운할까. 물론 그런 식으로 설명을 시도했다간 이 미친 악신에게 비웃음을 받을 게 분명하긴 했다. 그는 창조자였고 로봇 공학의 3원칙이란 소설에나 존재하는 원칙임을 알 거였다. 설명을 할 수 있든 없든 불쾌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그 불쾌함이 잘못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신들은 자신의 피조물을 자신들과 유사하게, 바꿔 말해 ‘인간답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었다. 그들 본인도 짐승이 짐승을 죽이는 것에 마음 아파하던 존재들이었다. 지금 연구자 본인이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 탓인 셈이었다.
“변명은 그만 하세요.”
마침내 연구자가 말을 꺼낸 건 이튿날 아침이 다 되어서였다. 더 입을 다물고 있었다가는 낡은 팔다리를 교체하는 시기까지 후회를 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는 말을 잇기 전에 짐을 챙겨 들쳐 멨다. 밤새 나비를 고친 걸 보아하니 판테온에 갈 의지가 있긴 한 듯 했다. 만일 정말 도착하게 된다면 이 신은 그들 역시 죽일까.
“날 죽이고 싶어?”
신이 말했다. 연구원은 그 말을 무시했다.
“그럴 때의 ‘죽고 싶다’는 정말 죽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쪽이라고 했어요.”
그날의 동행인은 상대적으로 조용했기 때문에 연구자는 그 전까지 들어왔던 정보들을 곱씹으면서 사막을 건넜다. 일전에 왜 시민들이 신을 찾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왔던 적이 있었다. 한참 만들어질 때만 해도 피조물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느니 뭐라느니 얘기가 많았다고.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상용화될 거라는 상상만큼이나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속으로만 대꾸했었다.
만일 그가 대학살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예상대로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로 시민들은 자신들의 창조자를 모르게 되었다. 많은 ‘인간’들은 알지도 못하는 신을 숭배해 왔었다. 마찬가지로 인간과 판테온에 대해 막연한 환상만을 갖고 있는 시민들이 딱히 그들에게 악의를 품을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과거에 벌인 만행이 있다는 건 알았으나 그 시기를 함께했던 지성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가 많은 신들이었다는 걸 알아도 추상적으로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신을 대체로 싫어했어.”
퍼뜩 놀랐던 연구자는 그게 아침에 건넨 말에 대한 대답임을 깨달았다. 잠깐의 침묵.
“당신들 신도 죽이셨나요?”
“아니. 찾지도 못했어.”
“판테온은 찾을 수 있으시겠어요?”
“해봐야지.”
신이 자신 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앞을 응시했을 때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눈은 초점을 잃었다. 연구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날은 밤이 될 때까지 오아시스가 나오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사막에 물이 많았더라면 애초에 이런 여행을 떠날 필요도 없었을 것이었으며, 나아가 이 모래밭을 사막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었을 거였다. 연구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신은 점점 더 몸을 많이 뒤척였다. 타조 위에서 팔짱을 끼고 괜히 혀를 찼으며 평소보다도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다.
명분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듯 했다. 연구자는 그렇게 판단했다. 무언가 남들이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한 뒤 어떤 ‘업적’을 내밀어 잘못을 덮는 경우가 있었다. 지성체들의 호와 불호에 대한 잣대가 단순하다고 믿는 이들. 성찰 없이 ‘좋은 일’을 함으로써 추한 부분을 가릴 수 있다고 보는 것들. 판테온을 빨리 찾으면 연구자가 신을 죽인 사건에 대해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연구자가 모닥불을 피웠고 타조에 기대앉은 신은 유리로 된 정사면체를 꺼냈다. 흐리게 들어온 모닥불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 햇빛에 두었을 때보단 좀 더 불완전한 무지개였다. 연구자는 담요를 두르며 상대를 넘겨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신이 프리즘을 흔들어 보였다.
“신기루잡이야. 보이는 게 진짜인지 아닌지 이걸로 판별할 수 있어.”
“그런 물건들을 그냥 저희 주지 그러셨어요. 지금 도시에서 그냥 쉬고 계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애꿎은 어린 신이 죽지도 않았을 거라고 연구자는 속으로 덧붙였다. 사실 척 봐서는 대체 그 유리 조각을 어떻게 써야 신기루 판정용으로 쓸 수 있을지 감이 안 잡히긴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만 들였으면 충분히 사용 방법은 익힐 수 있었을 거였다. 애초에 최초의 시민들은 신들의 대리자로서 태어난 게 아니었던가. 신은 다시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이면서 유리를 주먹 속에 숨겼다.
“이걸로 다 찾는 것도 아냐. 재능이 있어야지.”
“재능 있으신가 봐요.”
실상 가볍게 던졌던 말이었다. 농담처럼. 대답이 재깍 돌아오지 않자 연구자는 멈칫했다. 신은 무언가를 곱씹는 듯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도 했다. 연구자는 기다렸다. 주제넘은 말이었다, 불경스러운 소리였다 따위의 대답이 돌아올까. 아니면. 침묵 끝에 신이 말했다.
“있겠지.”
한참이 지나 연구자는 전에 혹시 만난 적이 있었냐고 물었다. 신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만나면 만난 거고,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그런 거지 모르겠다는 답변이 왜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일단 연구자 본인은 신과의 만남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거지들이 가끔은 너무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상하고 불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그와 같은 악신과 동질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모든 시민들은 대학살 사건을 기억했다. 그건 그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으나 의지를 갖고 행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있었던 어떤 대기업은 타임캡슐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해당 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고위 임원으로 고용했다. 꽤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천천히 인간과 닮은 안드로이드들이 상용화됐다. 회사는 인간의 감정, 그러니까 죄책감이나 애착을 느낄 줄 아는 기계를 만들고자 했다. 당시에 태어난 이들을 최초의 시민들이라 불렀다.
신들은 소위 말하는 ‘로봇 반란’을 아주 오래 전부터 두려워해 왔다. 사측이 중앙 통제 장치를 갖고 있었던 건 따지고 보면 아주 합리적인 일이었다. 회사 소속의 누군가가 그걸 해킹해서 조작 방식을 바꾸리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인류의 잘못은 아니었다. 실제로 초기엔 별 문제가 없었다. 회사는 일자리를 빼앗는 로봇이 아닌 사랑받는 로봇을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발도 미미한 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수익이 줄어든 일부와 기계에 의존하는 게 비인간적이라고 믿는 몇몇이 불만의 목소리를 냈을 뿐.
세월이 흘렀다. 그들의 생활 터전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망가졌고 고위의 신들은 자신들이 만든 쓰레기로 더럽혀진 땅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동행하고 있는 신의 말을 빌리자면, ‘남겨진 건 불행한 신들뿐이었다.’ 기계들은 동족을 스스로 생산하는 법을 배웠다. 연구자는 물론 그 시기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한때 비싼 값으로 만들어졌던 ‘구형’ 안드로이드였다. 인력이 부족해진 뒤 시민들은 동면하고 있던 그와 다른 동료들을 깨웠다. 신들이 사라진 땅에서 시민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기록해 넘겼다.
“정말로 불행해 보여서 살해하신 거예요?”
“그럼.”
“그냥 약자를 이용한 스트레스 풀이는 아니셨고요?”
사막 한가운데였다. 연구자가 말을 던졌다. 사실은 대리만족이라는 용어를 쓰고 싶었다. 죽고 싶은데 자신이 죽기에는 겁이 너무 많아서, 스스로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위하며 남들을 멋대로 죽여버린 건 아닌지. 거기에서 일종의 쾌감을 느낀 건 아닌지. 신은 프리즘을 들어올렸다. 지평선의 아지랑이 부근에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유리와 유리 너머를 가만히 관찰하다가 손을 내렸다.
“거짓말 아니라니까. 내가 더 지켜보기 힘들어서 죽인 거야.”
“일부러 그렇게 말하시는 거예요?”
“뭐가?”
일종의 동족 혐오일 수도 있었다. 연구자는 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본인도 비슷한 충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2와 3을 더하면 5가 된다는 식으로 상식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뿐이지, 공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공감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만. 지켜보기 힘들어서 죽였다는 말의 비겁함은 너무 명확했다. 책임을 회피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을 해 대는 부류가 흔히 쓰는 화법이었다. 연구자는 그의 신이 꽤 똑똑한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죽여도 괜찮아요?”
“응. 근데 가능할까? 나는 날 못 죽였는데.”
“질문은 잊어버리세요. 됐어요.”
“그래, 충분하다니 기뻐.”
연구자는 콧잔등을 일그러뜨리고는 계속 나아갔다.
그날도 오아시스는 나오지 않았다. 한낮 무렵 지평선을 바라보던 신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타조를 몰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말리려던 연구자는 천천히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이전에 그가 한 말처럼 그들이 있는 사막은 생물이 제대로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원래 필멸자들은 생에 집착한다고 했다. 완전히 서로를 잃어버리기 전에 돌아올 거였다. 실제로 그는 저녁 무렵 망연히 모래밭에 앉아 있는 신을 발견했다. 곁에 타조가 쓰러져 있었다.
“이 기계 타조는 고물이야.”
그가 말했다. 연구자는 타조의 부리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은 여전히 예의 신기루잡이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너무 몰아붙이셨어요.”
“그래도 좀 더 빨랐다면 잡을 수 있었을…아냐, 아니다. 이번엔 실수한 게 맞아. 이상해, 분명 이걸 통해 봤을 때 그게 진짜인 것처럼 잡혔거든. 그렇지만 피곤하면 실수할 수도 있지. 난 원래 이런 기술적인 문제에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거든. 피곤해서 잘못 봤나 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져. 진짜 이상하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유사한 현상이 반복됐다. 아무 것도 나오지 않거나, 기껏 달려갔는데 아무 것도 없거나. 신은 여전히 무언가를 발견하면 뭐가 있다느니 곧 갈 수 있을 거라느니 떠벌렸지만 더 이상 돌진하진 않았다. 또 그는 목적지가 가짜로 보이면 갑자기 멈춰 서서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 떠들어 대곤 했다. 무지개니 신기루니 하는 것들이 세상에 있어서 괜히 사람들이 그걸 뒤쫓게 된다고. 처음부터 헛된 희망, 어중간한 재능, 닿을 수 없는 롤모델이 없었다면 이런 식으로 고통받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는 가끔 정말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연구자가 돌아가는데 필요한 날들을 세는 횟수 또한 늘어났다. 이쯤 되면 원래 있던 도시로 바로 돌아가는 것보다 사막 어딘가에 있을 다른 도시를 찾아 들어간 다음 준비해서 돌아가는 게 나을 거였다. 본인은 괜찮았다. 신이 먹을 음식이 부족해져 가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시체는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정작 신 본인은 그걸 계산하지 않는 듯 했다. 학자는 차마 그에게 판테온을 찾을 수 있겠냐는 질문을 재차 하지 못했다. 여전히 말은 많았지만 나오는 표현들이 점점 자조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저기."
연구자가 앞을 가리킨 건 예의 그 사건으로부터 보름 정도가 더 지난 후였다. 모래 바람 틈으로 흐릿하게 번쩍이는 돔이 있었다. 돔의 아래 부분은 철로 된 행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말이 좋아 행성이지 기계 타조를 타고 쉽게 뛰어넘을 법한 야트막한 철 울타리였다. 신은 대꾸하지 않았다. 연구자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인상을 썼다. 돔의 모양새가 퍽 익숙했다. 새 도시를 발견한 것이었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신은 무언가를 찾았다는 사실 자체에 기분이 들떠 보였다. 최소한 연구자의 눈에는 그래 보였다. 빛나는 눈. 타조의 깃털을 세게 쥔 손. 연구자가 주위를 제대로 둘러본 건 성문 앞까지 온 뒤였다. 그는 혼자였다. 기다렸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는 잠시 주변을 살피다가 성문을 두드렸다. 몇 번쯤 두드린 뒤에야 문이 열렸다. 그때까지도 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물이 부족해서 쓰러졌는지도 몰랐다. 연구자는 간단한 음식과 물품을 받아 온 길을 되짚어 걸어갔다. 얼마쯤 걸었을까, 빙빙 도는 것은 아닌가 싶어진 순간에야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연구자는 다가갔다. 신이 모래밭에 앉아 있었다. 연구자는 타조의 상태를 확인했다. 멀쩡해 보였다.
“어땠어? 가짜였어?”
“아뇨, 진짜예요. 들렀다 가요.”
“들렀다 안 가.”
“식량도 떨어진 건 아세요?”
“그러니까, 안 간다고. 만신전 찾는 건 포기야. 내가 더 이상 진짜랑 가짜를 구분 못 해. 너무 많이 실패해서 이젠 진짜를 봐도 꿈이겠거니 하고 지나간다고. 이젠 능력이 없어. 애초에 처음부터 판테온엔 고개도 못 디밀어 본 날 데리고 가겠다고 한 게 웃긴 일 아닌가?”
그나마 있는 희망이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연구자는 발뒤꿈치로 모래밭을 찍어 눌렀다. 그래도 가다 보면 희망이 있다는 소리를 하면 될까. 그런 소리를 해서 들을까.
“왜 네가 이 여행을 오게 됐는지 알아?”
“위에서 절 골라서요.”
“내가 너로 해 달라고 했어. 지금의 나는 이렇게 무능해도 과거의 나는 분명 똑똑했었으니까. 과거의 날 데리고 가면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기껏 자라서 내가 될 널 데리고 뭘 하겠다고.”
연구자는 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의 복제품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것 또한 두려워했기에 자신과 비슷한 형태의 안드로이드를 만들면 스스로에게 특정한 표식을 새겼다고 했다. 문신이라든가, 염색 같은 방식으로. 그가 마침내 말했다.
“제 미래가 찾아와서 네 인생은 망했다고 알려 주길 바란 적은 없어요.”
“미안하게 됐네.”
"그리고 망하지도 않을 거고요. 전 자라서 당신이 되지 않아요."
"확실해?"
"네."
"천재라고 고용된 주제에 천재들만 간다는 판테온엔 가지도 못하고 남겨진 사람들을 죽인 뒤 얼마 남지도 않은 인간들한테 검거돼서 백 년은 얼어붙어 있었던, 그리고 결국 판테온에 갈 재능도 없는 이 꼴을 보고도?"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제 와서."
연구자는 모래밭에 나동그라진 프리즘을 곁눈질했다.
"가요."
"어디로. 절망 속으로?"
대답은 없었다.
2019 (10월~)
여기서부터는 좀 놓기 시작해서 커뮤 로그나 커미션밖에 없네요....
커뮤 배경 : 서판 마법학교입니다. '로임'은 마법사를 뜻하는 세계관 내 용어이며, 마법은 빛의 신 로웨나의 은총으로 인한 산물입니다. 주동인물인 빅토리아 시즈파이어는 물 속성 마법 치유학과인데, 물 속성은 악신(=바다의 신)의 마법이라고 하여 비교적 터부시되는 편입니다.
Sinking Under
BGM _ Where’s My love?
Victoria Ceasefire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이 한 달 째였다. 빅토리아는 마차의 한 구석에 앉아 하늘을 응시했다. 2학년의 첫 번째 학기가 시작될 무렵 한 통의 편지가 기숙사로 날아들었다. 처음에는 실망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집에서 편지가 오길 기다리는 중이었으니까. 편지에는 독특하게 생긴 밀랍 인장이 붙어 있었다. 발신인으로 적혀 있는 이름도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 유려한 필기체로 적혀 있는 ‘비터레인.’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오래 전에 실종되었던 어머니를 드디어 찾았다는 거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머니 쪽의 친척이라 소개하고 있었는데, 빅토리아의 부모의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신들이 잠시 지원해 주고 있다고 했다. 솔직히 믿을까 말까 고민이 많이 되긴 했다. 대체 평민의 아내였던 어머니가 어떻게 백작가 사람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의심을 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급했다. 어머니가 돌아오면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일단 로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 거였다. 물 속성의 치유 로임이라고 하면 나름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인 헤더 비터레인은 물을 좋아했으니까.
고향에 다녀오겠다는 서류를 빅토리아는 편지와 함께 제출했다. 그건 거의 통보였다. 안 된다고 했어도 어떻게든 내려갔을 거였다. 찾아가겠다는 글을 보내자 비터레인 백작가에서는 마차를 한 대 보냈다. 빅토리아는 처음 아카데미에 올 때 들고 온 트렁크에 최소한의 짐만을 챙겼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수업 자료와 책들은 기숙사에 남았다. 목걸이를 한 토끼 인형과 타라 인형은 빈 침대를 차지했다. 다도 세트는 책상 위에 놓였다.
“엠마.”
왜 그 아이에게 인형을 맡길 생각을 했는지는 돌이켜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분명한 건 방에 둔 두 인형은 다른 두 룸메이트가 각각 돌봐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는 점이었다. 인형들은 각기 빅토리아가 스쳐 지나온 장소들을 상징했다. 토끼 인형 미슬토는 도시에서 동전을 던지고 받은 것이었고, 타라 인형은 신전에서 받은 것이었다. 그만큼 소중했기에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고 가고 싶진 않았다.
“얘 좀 데리고 있어 줘.”
아홉 살 때부터, 아니, 정확히는 여섯 살 때부터 사람들은 빅토리아를 보고 아이답지 않게 말한다고 이야기했다. 그에게는 항상 귀여운 맛이 없었으며 태도는 늘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가 아이가 아닌 것은 아니었으므로. 다른 아이들이 일찍 떼는 어떤 것들을 빅토리아는 조금 오래 간직했다.
굳이 메리 인형을 엠마에게 맡긴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애는 배 같았다. 닻 없이 계속 먼 바다로 흘러가려고 하는 배. 처음으로 바다 이야기를 했을 때 엠마는 어떤 약속을 하나 했다. 빅토리아는 자신이 떠나 있을 때 엠마가 그 약속을 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터무니없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오래 다녀올 것도 아닌데. 잠깐 다녀오는 동안 그가 갑자기 먼 바다로 나가겠다는 이야기를 하진 않을 텐데. 그러나 어떤 믿음은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탄생해 정신을 강하게 흔들어 놓곤 했다.
“내가 돌아오면 돌려줘야 해.”
당부들.
빅토리아는 완전히 아카데미를 나서기 전에 미슬토의 목걸이를 고쳐 매 주었다. 샤비가 인형에게 넘겨 준 나무 목걸이는 이제 정말 반질반질해져 나무 색의 돌처럼 변해 있었다. 룸메이트인 에이프릴과 유페미아에게는 며칠간 집에 다녀오겠다고 말했고, 머리카락은 한참을 다듬어 오즈왈드가 준 흰 리본을 써 양갈래로 땋아 묶었다. 사실 그에게 땋는 걸 도와 달라고 할까, 싶었지만 유난이다 싶어 참았던 것이었다.
“계약 친구 며칠간 휴업이야.”
세실에겐 그렇게 말했고.
“나 없어도 편지는 잘 쓰고 있어야 해.”
카엘리에게는 그렇게 설명했으며,
“돌아와서 다시 티파티 하자.”
포시테에게는 약속을 했다. 오딘과 마지막으로 간단한 티푸드 시식 행사를 하기도 했더랬다. 빅토리아는 정말 오랫동안 떠나 있을 사람처럼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녀오는 데 그렇게까지 긴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라고 인지했음에도 그랬다. 그는 첫 번째 방학을 생각했다. 돌아와서 베이킹을 하기로 한 샤비. 마지막으로 같이 뭉쳐서 잔 에이프릴과 유페미아. 세실의 주소를 적었고 카엘리와는 어떤 치유사가 되고 싶은지 얘기했더랬다. 신에 대한 얘기를 나눈 엠마. 죽은 뒤의 삶에 대해 대화한 오즈왈드.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차를 마신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쫓아 준 포시테. 어쩐지 늘 툴툴대게 되는 그웬돌린 체스터, 아름다운 로사, 언젠가 꽃씨를 뿌리자는 이야기를 했던 마이디, 조용하다고 느꼈던 데이지와 반짝거리는 란드그리드. 악튜러스에게는 밥을 잘 챙겨 먹으라는 소리를 쓸데없이 한 번 더 얹었고 키이라에게는 성에 간단 말을 했다. 카일에게는 딱히 약속은 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도 그를 위한 간식을 하나쯤은 갖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잔머리 잘 굴리는 케니스, 돈 이야기를 나눴던 리페, 가끔 과자를 갖다 주거나 엎드려 있을 때 담요를 주던 타키, 부모님께 그림으로 된 편지를 적던 세이. 무기력한 테오도르. 교수님 얼굴에 낙서를 하는 장난꾸러기 챠챠와 눈 덮인 겨울을 닮은 푸단. 칼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마법 매개체를 보러 가자고 약속했던 라리에타와 씩씩한 걸음의 제이스. 바로 곁에서 함께 성장하고 있다 보면 변화가 눈에 잘 띄지 않기 마련이었다. 빅토리아는 자신이 돌아왔을 때도 그들이 거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며, 자신 역시 같은 모습으로 돌아올 것임을 알았다.
일단, 안다고 생각은 했다.
대륙을 건너는 일은 피로감을 불러일으켰다. 두 명의 마부는 둘 다 성인 남성이었는데, 빅토리아에겐 거의 말을 걸지 않았다. 빅토리아로서는 그 편이 차라리 더 달갑긴 했다. 마부들은 피로해질 때면 서로 자리를 교체해 가며 말을 몰았고, 저녁이 되면 두 개의 방을 잡았다. 독특한 점은 그들이 빅토리아를 아가씨라고 불렀다는 점이었다. 보통 거리의 사람들이야 하급 로임의 옷을 입고 있는 걸 보고 아가씨로 지레짐작해 칭하긴 한다지만, 그들은 상황이 달랐다. 빅토리아는 비터레인이 아니라 시즈파이어였다. 평민 여자애를 굳이 그렇게 높일 이유가 있는 것이었던가?
묻지 않았으니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나마 말을 한다지만, 빅토리아는 원래 외부인들에게는 장교 빅터였다. 비비도, 빅토리아도, 비바도 아닌 ‘장교’ 빅터. 그는 창문이 있는 마차에 앉아 가끔씩 마법을 연습하며 시간을 보냈다.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수정구는 마차에서도 다루기 무난한 물건들 중 하나였다.
오랫동안 이동한 마차는 마침내 어느 성 안으로 들어갔고, 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저택 앞에 펼쳐진 정원은 아카데미의 미로 정원을 연상시켰다. 샛길도 많고 나무도 많았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죄다 가지가 둥그렇게 깎여 막대 위에 초록색 구체가 올라간 것 같은 형태를 띠었다. 초록색을 띠는 이파리가 팔랑거렸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었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귀족들의 생활양식에 대해서는 다른 아이들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현관에서 기다리던 메이드는 빅토리아를 바로 응접실로 안내했다. 기다리고 있으면 가주님‘들’이 나올 거라고 했다. 빅토리아는 굳이 부모님이 어디 있는지 캐묻지 않았다. 왜 한 명의 가주가 아니라 가주님들인지도 묻지 않았다. 기다리면 답이 돌아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응접실은 아름다웠으나 빅토리아는 배치된 물건들로부터 미세한 불안정의 흔적을 읽었다. 장식용 잔 바닥엔 때가 타 있었으며 화려한 장식품들 사이로 빈 공간이 자리했다. 성도 있는 귀족 집안에서 왜 이런 부분을 관리하지 않았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런 상황이니 그간 연락을 하지 못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재산보다 빚이 사실상 더 많은 귀족 가문일 수도 있었다.
안락의자에 앉았을 때 응접실 문이 열렸다.
“드디어 왔구나.”
구두 소리.
들어오는 남녀의 모습이 어쩐지 익숙한 것 같다고 빅토리아는 생각했다. 제일 먼저 들어오는 여성은 흰 담비털이 달린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는데, 긴 자주색의 직모가 허리까지 내려왔다. 피부는 완벽하게 희었고 눈꼬리는 위로 올라가 있었는데, 홍채의 색은 검정이었다. 남성의 경우엔 머리카락이 보라색, 홍채는 흰 편이었고 여성보다 한 뼘이 더 컸다. 가죽 옷을 입은 그는 중년에서 청년 사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함께 들어온 여성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 더 젊어 보이는 낯이었다.
“네가 헤더의 딸이니?”
여성이 물었다.
“네.”
“이름이 뭐니?”
“빅토리아 시즈파이어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로 그는 빅토리아를 잠시간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머물다 가렴. 아직 헤더가 완전히 낫지 않았단다.”
“지금 볼 수는 없는 걸까요? 늦어진다면 아카데미로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잘 해 줄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게 있도록 해.”
여성은 그러면서 조용히 웃었다. 다른 한 사람이 물었다.
“로임이라고 들었다. 치유학과라고 들었는데, 맞느냐?”
“네.”
“헤더가 자랑스러워 하겠구나.”
그들이 남매라는 것을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도착한 날 밤 잠들기 전에 입이 가벼운 시종들이 조잘거리는 것을 들은 덕분이었다. 각기 결혼을 하긴 했지만 가족들과 그리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통상적인 정략결혼의 결과물이겠거니 했다. 특이한 점은 이 두 가주가 친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와 명백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부부도 아닌 남녀가 함께 가주를 했다는 건 꽤 파격적인 일이었다. 애초에 여성 가주의 존재 자체가 상당히 드물기도 했고. 그렇기에 의외였다.
“애초에 옛 주인님께서 첫째를 딸로 낳지 않으셨다면, 최소한 아들이 사생아가 아니었더라면!”
문 밖에서 시종이 말했다. 누군가 분간하기 힘든 말씨로 날카롭게 속삭였고 말소리는 잦아들었다. 문가에 서 있던 빅토리아는 최대한 조용히 도로 침대로 돌아갔다.
이상했다. 이건 빅토리아가 아는 세계가 아니었다. 익숙한 세계는 바닷가 마을과 어느 로엠교 신전과 아카데미에 자리했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바닷가 마을에서 그는 어머니로부터 글자를 배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글을 배우는 데 크게 개입을 하지 않았었다. 아카데미에서 만난 다른 평민 친구들의 부모님들 중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친구들 본인도 아홉 살인데 아직 책을 잘 읽고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크게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걸로 기억했다. 그냥 사는 지역이 다르니까 차이가 발생하는 모양이라고, 자기가 사는 로엠 왕국의 그 지역이 특별했을 뿐이라고 믿었다.
아버지는 분명 평민이었다. 시즈파이어는 귀족의 성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그간 있었던 어떤 부조화는 모두 어머니가 귀족이라면 해소가 되었다. 9살 무렵, 아카데미에서 같은 치유학과인 세이는 자신의 가족들이 글을 읽지 못한다고 했다. 그게 보통일 거였다. 아마. 어쩌다가 자신이 아홉 살에 남들보다 유려한 필체를 갖게 되었는지 좀 더 생각해 봤어야 했다. 물론 그의 그 필체는 신전에 와서야 완전해졌지만, 읽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친 것은 어머니였다.
가주들은 헤더 시즈파이어, 정확히는 ‘헤더 비터레인’이 자신들의 막내 동생이었다고 이야기했다. 빅토리아는 그들이 그래서 왜 이제 와서 자신의 어머니를 찾았는지에 의문을 느꼈다. 돈이 부족한 귀족 집안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정상적인 방식으로 어머니가 분가해 나온 거라면 못 찾았을 리 없었다. 빅토리아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문이 열리고 시종 한 사람이 들어왔다.
“아가씨, 마실 물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필요하신 건 달리 없으시고요?”
“저희 부모님은 괜찮으신가요?”
짧은 침묵이 있었다. 일어나 앉으며 표정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시종이 화제를 돌렸다.
“아마 잘 계실 겁니다. 저택을 너무 돌아다니시진 않는 게 좋아요.”
“그런가요.”
“네, 저택에 마법이 깃든 장소들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저기 지하에는 보통 사람들은 열 수 없는 금고가 하나 있어요.”
빅터가 눈썹을 올렸다. 시종이 말을 이었다. 어째서인지 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예전에 어떤 로임이 만들어 준 것이라 하더군요. 마법적인 금고라, 부숴서는 열 수 없고 열쇠를 사용하거나 로임의 특별한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더라고요. 아가씨의 부모님께서는 말씀해 주신 적이 없나요?”
“죄송해요.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 얘기가 끝난 후 하인은 황급히 떠났다. 빅토리아는 닫힌 문을 잠시 응시하다가 관심을 돌렸다. 방은 단정했다. 침대가 하나, 아이가 몸을 통과해 나갈 수 있을 법한 창이 하나 있었고 침대 옆엔 옷장과 화장대가 자리했다. 무언가를 수납할 만한 공간은 많지 않았는데, 그나마 문 옆에 작은 책꽂이가 있긴 했다. 책은 두어 권밖에 꽂혀 있지 않았다. 벽은 일단 돌로 된 것 같았다. 나름 표면을 깨끗하게 다듬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다가가면 냉기가 풍겨 나오곤 했다. 떨어지는 달빛 속에서는 아름다운 돌 감옥처럼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서둘러 나타났다 떠난 시종 이후로는 한동안 밖에서 말을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빅토리아는 누워서 몸을 뒤척였다. 침대가 다소 딱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어 번 깜박이는 눈. 그는 결국 몸을 일으켜 시트를 더듬었다. 무언가 딱딱한 것이 눌렸다. 빅토리아는 침대 옆으로 내려와 시트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주머니가 잡혔다.
끌어낸 주머니에는 한 문장이 자수로 적혀 있었다. 헤더 비터레인,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담아. 안은 빈 채였다.
빅토리아가 아는, 어머니가 제일 좋아했던 여행지는 아버지가 한때 살았다던 바닷가 근처에 자리했다. 원래 안에 있었던 게 뭐든 이런 걸 시트 밑에 둔 걸 보면 정말로 어머니가 썼던 방인 게 분명하다고 빅토리아는 생각했다. 창틀엔 먼지가 있었고 책꽂이는 조금 낡아 있었다. 누가 일부러 더 무언가를 끼워 넣고 갔을 것 같지 않았다.
잠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빅토리아는 그것을 대충 트렁크 근처에 얹어 놓았다. 가족들을 만났을 때 묻고 싶은 것이 자꾸 늘어 가고 있었다. 어쨌거나 밤은 깊어 가고 있었으므로 중요한 것들은 날이 밝았을 때 확인해도 좋을 것이었다. 그는 베개를 끌어안고 반쯤 엎드려 잠을 청했다.
어지러운 꿈을 꾸었던 것도 같았다. 빅토리아는 기묘한 냉기 속에서 잠에서 깨어났다. 몸을 뒤척이려는 순간 사지에서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참는 숨. 찰나의 순간 그는 공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정구는 머리맡에 있었다. 잡아채며 실드 마법을 쓰는 순간 구는 언제나처럼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며 손 위로 떠올랐다.
“무슨…….”
움직이지 않는 몸을 끌며 문으로 나가가 밀쳤을 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빅토리아는 이를 악물고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유리에 금이 가며 파편이 쏟아져 내렸다. 몰아치는 바람. 그제야 잠깐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가방을 챙겨들었다.
뭐가 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방 안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빅토리아는 물 속성의 푸른 실드를 다시 몸 주위에 형성시켰다. 방의 위치는 대략 2층 높이. 비행은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시도해 볼 여지는 있으니까. 창틀을 짚는 순간 깨진 유리 파편에 긁힌 살갗에서 피가 흘렀다. 한 팔로 가방을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수정구를 든 채, 그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몸 주위를 구처럼 감싼 실드는 풀밭에 떨어진 공처럼 두 번 튀고 사라졌다. 하마터면 장미 덤불에 얼굴을 박을 뻔 하긴 했지만, 빅토리아는 간신히 균형을 잡는 데 성공했다. 물 속성이어서인지 기분 탓인지 무속성 실드를 썼을 때보다 충격 흡수는 잘 됐던 것 같았다. 빅토리아는 손목과 발목의 관절을 풀어준 뒤 가방을 고쳐 들었다.
저택은 고요했다. 불빛 새어나오는 창도, 늦게 일하는 시종들의 목소리도 없는 곳. 미로 같은 정원에는 등불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유독 더 새까매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구름이 낀 날이었던 탓에 달빛이 흐렸다. 시선이 떨어진 곳의 철문에 닿았다가 현관 쪽을 향했다. 짧은 고민 끝에 빅토리아는 저택으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무 그림자 밑에서 짧게 수정구가 빛을 발하며 소리를 흡수했다. 어쩌면 건물에 머무는 모든 사람들이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었다. 혹자는 오만하다고 하겠지만 일단 그게 그의 최선이었다.
저택 문은 열려 있었다. 빛이나 불, 전격 속성의 로임이 아니었으므로 일단은 어둠 속을 걸어야 했다. 일단은 그 편이 낫기도 했다. 어둠 속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복도에서 걸음을 천천히 떼면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암살자들을 위한 집 같았다. 건물의 구조를 알 수 없었기에, 그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문을 먼저 열었다. 텁텁한 종이 냄새가 얼굴로 훅 끼쳐 들어왔다. 향을 통해 빅토리아는 자신이 서재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내심 두려웠는지도 몰랐다. 아닌 척 해도 사실 무의식중에 어떤 불길한 예감을 받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괜찮은지 먼저 확인해 봐야 할 판에 굳이 빈 것이 분명한 서재로 들어갔으니까. 방엔 큰 창이 있어 격자무늬 그림자가 카펫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흐린 빛 끝에 걸린 책상 쪽으로 향했다. 책상 자체는 깨끗했으나 자물쇠가 있는 서랍이 눈에 띄었다. 말없이 자물쇠를 손끝으로 건드리자 수정구는 짧게 떠오르며 빛을 냈고, 서랍은 열렸다. 찰나의 순간 빅토리아는 두 가지를 보았다. 서랍 속의 편지들. 그리고 책꽂이에 진열된 기묘한 약초들.
“아.”
봉인의 형태가 눈에 익었다. 그는 조심스레 봉투들을 꺼내들었다. 뜯긴 틈으로 보이는 것은 한동안 짐 시즈파이어에게 보냈던 편지들이었다. 보관된 것들을 건드리고 있자니 신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도 몇 통 나왔다. 빅토리아가 로임이 되었으며 구체적인 연락처는 알려줄 수 없다고 결론짓는 사제의 문장이 눈에 띄었다.
몸을 돌리는 순간 달이 구름을 벗어났다. 쏟아지는 달빛이 선명하게 비추어 보이는 약초들. 병들. 진열대. 빅토리아는 치유학과였고,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건 ‘약초’가 아니었다. 수업에서도 잘 다루어지지 않는 독초들이었지. 해독제들 사이로 진단을 위해 언급되고 지나간 풀들로, 웬만해서는 키우지도 않는 식물들이었다.
방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창문이 깨졌어.”
빅토리아는 재빨리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한참의 고요. 마침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숨을 참았다. 기다려도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달이 다시금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나올 때 그는 잠깐 바깥의 그림자를 확인했다. 사람 그림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일어났을 때 그는 다시 혼자였다.
이상한 일이었으나, 빅토리아는 그날 정확히 어떻게 저택을 빠져나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깨어났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온 몸의 감각이 갑자기 배로 선명해졌다는 사실만 떠오를 뿐이었다. 미로 같은 정원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어쩌다가 지나가는 밤 마차를 잡아타고 성을 벗어났는지도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는 모든 것이 로엔나의 보살핌 덕에 가능했던 거라고 판단했다.
베인 자리에서 흐르던 피가 굳어 손바닥이 피투성이였으나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챈 건 이후 찾아간 신전의 사제들이었다. 그들이 상처를 치료해 주는 동안 빅토리아는 계속해서 퍼즐을 맞추려 노력했다. 이튿날 사제들과 함께 돌아간 바닷가 마을의 집은 비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이 돌아오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웃들은 빅토리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애초에 어머니가 아이였던 그를 굳이 이웃들에게 소개하고 다니지도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주민들은 짐 시즈파이어가 아직도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나저나, 짐 녀석. 생각보다 굉장한 아내를 두고 있었던데? 전에 백작가에서 찾아와서 그 인간하고 아내 봤냐고 물어보고 다니고 그랬어.”
누군가가 말했다.
사제 중 하나는 빅토리아를 다시 아카데미로 데리고 갔다. 혼자 갈 수 있다고 했지만, 혹시나 모른다며 동행한 것이었다. 맞춰지지 않던 퍼즐에 대한 해답은 돌아간 날 저녁에 도출됐다. 살짝 뜯어진 메리 인형의 다리에서 황금색 열쇠 하나가 나왔던 것이었다. 상당히 유려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빅토리아는 단박에 그게 보통의 열쇠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갔다. 감정적으로는 힘들었다. 아마 어머니는 어떠한 이유로 백작가가 싫어 그 곳을 벗어나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을 거였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이야기했던 바다 여행 당시 헤더는 짐을 처음으로 만난 듯 했다. 아마 그 과정에서 금고 열쇠를 가져다가 인형에 넣어 버린 모양이었고.
빅토리아는 한때 자신이 온전히 뜻을 알지 못했던 말들과 사실들을 그제야 이해했다. 어머니의 티파티. 파란 꽃이 그려진 도자기. 바다를 좋아하는 어머니. 글을 알던 부모님. 계속해서 반복되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 동화. 저택의 응접실. 그는 감옥 같던 돌벽을 생각했다. 그런 곳에서 혼자 잠드는 사람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긴 힘들 거였다. 자신의 부모와 어머니의 두 손위 남매가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편이라는 것을 떠올렸고 늘어서 있던 독초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공허했다. 해일이 오기 전 물이 완전히 빠져 버린 바닷가처럼. 짐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에게 근래 보냈던 편지들은 죄다 백작가의 서랍 안에 있었다.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을까. 아니면 아버지마저 어머니를 찾으러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금 목숨을 잃었을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컵이 깨졌다. 물이 흘러내렸다. 빅토리아는 자신이 경질 강화 마법을 걸고 있던 유리잔을 내려다보았다. 컵에 담겨 있던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구토감이 올라왔다.
“잠시만…….”
빅토리아는 의자를 밀치며 일어서 창문 밖에 고개를 처박았다. 물은 싫었다. 물소리를 듣다가는 정말로 토해 버릴 것 같았다. 강과 호수와 바다는 인간을 싫어하는 그 망할 신의 영역이었다. 어머니로 모자라 아버지마저 낚아채 간 그 저주받을 신! 헛구역질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목을 긁었다가 잦아들었다. 빅토리아는 흘러내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물 속성 마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저주스러웠다. 무능했다. 한없이 무능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갖고 장난을 친 백작가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그건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었다.
빅토리아 시즈파이어는 물 속성 치유학과였으므로.
2020
약판타지 괴담 학원물(소커로그)
아리아드네의 석류는 물에서 자란다
"선생님, 방학 숙제 말씀 안 해 주셨어요."
범생이. 명사. 은어. '모범생.' 얕잡아 이르는 어감이 있음. 사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그러하였으나, 깊게 들어가면 퍽 다채로운 의미를 지니는 단어였다. 그 단어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을 뜻하기도 했고, 똑똑한 아이에 대한 질투를 반영하기도 했으며, 사회성이 없어 보이는 아이에 대한 조롱을 돌려서 전할 때도 있었고, 가끔은 노력하는 꼴불견들을 지칭하여 튀어나오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은설이 '똑똑한 아이' 축에는 들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본질적으로 무식한 사람이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얻어 내려면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혹자는 사회가, 그리고 조직이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천재와 노력하는 둔재가 있다면 틀림없이 그러니까 후자가 빛을 받을 거라고. 행복해지고 싶다면 애쓰라고. 명언집과 학습용 방송들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기만했다.
유은설은 범생이었다. 그의 등수는 대부분의 경우 교내 10위권 내에 들었으나, 단 한 번도 1등은 한 적이 없었고 가끔은 2등마저 놓치곤 했다. 그리고 은설은 자신이 만점을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얄팍한 이유로 노력하길 그만 둘 거였다면 초등학교 시절 다른 아이들에게 질타를 받았을 때 일찌감치 공부를 때려쳤어야 했다. 게다가 신록고는 그가 다닌 초등학교나 중학교보다 훨씬 환경이 양호했다. 귀신 들린 학교라는 소리를 들어도 집보다 나았고 다른 학교보다 좋았다. 일찌감치 장하읍으로 이사를 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괴롭히는 아이들도 적었고 마을이 작아서인지 '지나치게' 부유한 아이들도 드물었다. 은설로서는 동창과 부모에게 공격받을 일이 감소했으니 좋고, 은설의 부모로서는 학부모 모임에서 상대적 열등감을 느끼고 맏딸에게 스트레스를 쏟아낼 일이 줄어들었으니 좋은 일이었다. 따라서 이 '최고의 환경' 속에서 유은설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일주일 갖고 무슨 방학 숙제냐, 초등학생도 아니고. 공부 잘 해 올 거지?"
"네에."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부모와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7일의 방학은 지나치게 길었다. 은설은 최대한 느리게 가방을 쌌다. 틀림없이 7일 내로 어머니나 아버지 측에서 딸의 존재를 감당하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는 날이 생길 것이었다. 그들의 집은 세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도시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살던 집은 장하읍에 있는 집보다 훨씬 비좁고 축축했는데, 당연히 욕을 먹거나 얻어맞는 일이 근래보다도 훨씬 많았었다. 왜 혼이 났는지를 돌이켜 보면 어머니한테 혼났을 때의 이유와 아버지에게 한 소리를 들었을 때의 원인이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훈육 방침이 일관적이지 않았단 의미였다.
어머니는 항상 공부를 잘 해야지만 자신들처럼 살지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실망했다는 말을 자주 썼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매를 들었다. 떨어진 성적, 못한 발표, 교사로부터 전달받지 못한 칭찬, 찌는 살. 아버지의 경우 설명이 많지 않았다. 그는 밖에 나갈 때는 늘 말쑥한 차림을 유지했는데, 은설로 인해 자존심이 망가졌다고 생각할 때 매를 들었다. 부유한 그의 급우들, 청소부나 택배 배달원에게 보내는 '지나치게' 친절한 인사, 의견의 충돌, 밖에서 듣는 무당 집안과 관련된 이야기. 그들은 딸이 완벽하고 고고하기를 희망했고 은설은 끔찍할 정도로 불완전했다. 그나마 학교에 있을 때는 성적만 잘 받으면 그들 둘의 희망사항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었지만 집에 가면 또 상황이 바뀔 것이었다.
비가 내렸다. 창 밖으로 시선이 이동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져 밖이 하얗게 되면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문득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방학식은 끝난 뒤였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교실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은설은 우산을 같이 쓸 만한 사람이 없으리란 것을 알았다. 있어도 문제였다. '진짜' 방학 기간 동안 집에서 볼 책을 챙겨 가야 하는데, 두 사람이 한 우산을 썼다가는 사람이 젖거나 책이 젖거나 둘 중 하나의 문제는 생기고 말 거였다. 도와 준 친구보고 젖으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제 옷에 물이 너무 많이 묻으면 집에 있는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거였다. 가족들은 반지하의 습한 공기에 질려 있었고 비슷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들을 꺼렸다. 젖은 옷, 젖은 종이, 벽지에 스미는 빗물 같은 것들. 그렇다고 해서 연락을 하면 또 데리러 와 주진 않을 게 분명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의미였다.
"잘 됐지, 뭐."
혼잣말이 나왔다. 가방 지퍼가 쭉 소리를 내며 잠겼다. 짐을 들고 나올 때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교사의 모습이 보였다. 은설은 재빨리 교실 벽 뒤에 웅크려 숨었다. 범생이와 문제아는 본질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공유했다. 어느 쪽이든 사랑받고 싶어 행동한다는 점에서는 같았기 때문에. 다만 문제아의 경우 사람들이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이라도 한다면, 범생이의 경우 아이에게 관심을 덜 둔다는 점이 차이였다. 교사가 잠깐 멈췄다가 이내 다시 이동했다. 아마 땋은 머리카락을 보고 잘못 보았겠거니 하고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발소리가 멀어졌고, 그는 고개를 길게 빼고 밖을 확인했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몸을 물리는 순간 뒷문에서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퍼뜩 놀라 돌아보았을 때 문가에 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뒷문이 실처럼 가늘게 열려 있었다. 주번이 잠그질 않은 걸까, 의아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순간 틈이 탁 소리와 함께 닫혔다.
원래 비가 오는 날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굽어드는 복도 쪽에 있는 창들은 바람이 강하게 불 때 으레 짐승 같은 울음소리로 울었고 새어 들어온 바람은 먼지 쌓인 커튼을 흔들곤 했다. 이번 건도 그런 현상 중 하나일 것이었다. 은설은 뒷문을 고쳐 닫았고, 앞문으로 나와 완전히 문을 잠갔다. 멀리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경비원의 모습이 보였다. 아래층을 확인하는 눈치였다. 위에서부터 확인을 하고 내려온 거라면 아마 뭔가를 잊었다는 것을 깨닫고 2학년 복도로 들어올 거였다. 계단을 따라 다니는 건 위험했다. 은설은 연결 통로를 넘어 동편의 도서실로 향했다.
그의 어머니는 도둑이었다. 실력이 유전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기술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을 자식에게 가르치곤 했고 따라서 은설 역시 잠긴 문을 여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닫힌 도서실 안은 어둑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할 것도 없겠다, 틀림없이 잘못 꽂힌 책들이 있을 도서실 내부나 정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책꽂이가 많으니 누가 들어와도 단박에 그를 발견하지는 못 할 거였다. 문득 문가에서 다시 드르륵, 하고 미닫이문 밀리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정말 많이 부는 모양이라고 은설은 생각했다. 학교가 귀신 들린 학교 소리를 듣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으레 학교마다 괴담은 있기 마련 아니었던가! 중학교에도, 초등학교에도 괴담은 존재했다. 유독 다치는 학생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아마 그건 신록고 건설 과정에서 부실공사나 비리가 있어서 생긴 문제일 게 분명했다. 굿을 해서 해결했다곤 해도 사실은 그냥 그 과정에서 교내 시설 정비를 해서 문제가 해결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어릴 때 항상 귀신 보는 애 소리를 들었던 사람으로서 딱히 그 소문을 믿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어딘가에서 문이 여닫혔다. 그는 이번엔 소리를 무시했다.
비는 그치지 않았고 역시 잘못 들어간 책들은 많았다. 얼마쯤 같은 작업을 반복했을까, 문득 멀리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이 책등을 따라 떨어졌다. 이 시간에 학교에 있는 사람이 더 있단 말인가? 경비가 돌아다닐 텐데, 저렇게 당당하게 연주를 해도 되는 것이었던가? 소리는 음악실 방향에서 나고 있었다. 은설은 도서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3층에서는 음악실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탔다. 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이동하는 것은 익숙했다. 복도의 창을 통해 내다보면 멀찍이 음악실이 보였다. 피아노 앞에 사람이 있는지 어떤지는 여전히 확인하기 힘들었다.
은설이 있는 공간으로 흘러들던 피아노 소리는 빗소리에 느지막히 섞여들었고, 두 소리의 구분이 불분명해질 즈음에 와서야 유은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가 대체 언제 그칠지는 몰라도 밤까지 학교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장마의 시작이라면 계속 학교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보단 신문지라도 쓰고 집까지 뛰어가는 편이 백 배는 더 나을 거였다. 어차피 옷이 젖어 혼날 거라면 늦게 와서 두 배로 혼나는 것보단 빨리 매를 맞고 끝나는 게 편할 테니까. 그는 메고 있던 가방을 재확인했고, 교실에 잠시 들러 뒤집어 씌울 비닐 따위를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여는 순간까지는 평이했다. 문을 딱 여는 바로 그 순간까지는.
은설은 귀신을 믿지 않았다. 사실 '믿지 않았다'고 퉁치기엔 이래저래 미묘한 지점이 있었으나, 어쨌든 그는 학교에 도는 괴담이 오컬트가 아닌 인재에서 기인한 것들일 거라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성은 이상 현상을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는' 정신을 제대로 붙들어 매는 데 꽤 도움이 됐다. 마주하기 전까진. 은설은 열린 문을 잡고 복도 대신 나타난 공간을 잠시 응시했다. 낯선 교실이었다. 형태 자체는 익숙한 것으로 봐서 아마 3학년 교실 중 하나이려니 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꿈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다. 꿈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터무니없는 공간으로 이어질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뒤를 확인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교실과 교실의 경계 지점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제 손등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아팠다. 공간은 바뀌지 않았다.
으레 어린이들이나 치매 노인들이 길을 잃을 때를 대비해 그들에게 당부해 두는 것들이 있었다. '꿈'에서 깨지 않자 은설은 자신 역시 누군가가 저를 찾으러 올 때까지 같은 공간에 서 있어야 할지를 생각했다. 그는 등 뒤로 문을 닫고 잠시 적당한 의자를 찾아 자리에 앉았다. 그가 정말 어린아이고 더 똑똑하며 길을 잘 찾는 사람이 그를 항시 찾고 있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이 효과를 발휘할 것이었다. 채 오 분도 앉아 있기 전에 은설은 자신이 그런 요행을 바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유은설은 어린애가 아니었고, 가족들은 무슨 일이 생기든 그를 찾아서 학교에 오지는 않을 것이었으며, 퇴근한 경비원이나 교사들이 학생을 찾으러 돌아올 리도 없었다. 만일 이 학교에 남은 것이 그 혼자뿐이라면 최소한 일주일은 버텨야 누군가가 구조를 해 줄 거라는 의미였다. 탈수로 죽기 딱 좋을 기간이었다. 플랜 C가 필요했다. 은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열어젖히면 또다시 새로운 교실이 보였다. 그는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고, 펼쳐진 낯선 공간으로 재차 걸어들어갔다.
그러니까, 이론상으로는 이랬다. 일단 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교실의 향연에 규칙성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규칙을 찾는다면 원하는 공간에 도달하는 것도 썩 어렵지는 않을 거였다. 일이 잘 풀려서 1층에 있는 교실에 도달한다면 창문을 뛰어넘어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문과였고, 슬프게도 이과 상위권들보다 이런 식의 수학 문제를 푸는 데는 부족한 편이었으나 그래도 이게 배수 문제라면 풀어볼 수는 있었다. 중간에 나타난 교실의 이면지 칸에서 은설은 종이 한 장을 빌렸고 다른 아이들의 연필을 훔치고 싶진 않았기에 분필을 하나 챙겼다. 문제는 규칙성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가다 보니 1층 교실 중 하나에 도달한 적이 있긴 했다.
"……."
창문이 안 열렸다는 게 문제였지만.
약 12개의 공간을 확인하고 아홉 번째로 도착한 2학년 2반 교실에서 가정 실습용 뜨개질 실을 발견해 줄줄 늘어뜨려 당기고 있던 은설은 결국 13번째 공간으로 넘어가는 것은 포기했다. 이건 미친 짓이었다! 미로인지 미궁인지도 알 수 없었다. 보통 미로면 갈림길이라는 게 존재하고, 미궁이면 최종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법인데 둘 다 아닌 것 같았다. 분필 가루가 날리는 종이를 텅 빈 재활용 폐지함에 집어넣는데, 문득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은설의 고개가 돌아갔다. 가끔 들고 다니던 어항은 없었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눈 색이 정말로, 정말로 특이한 아이였으니까. 짧은 침묵. 은설이 말했다.
"괜찮아, 우야?"
"괜찮아."
피곤해 보이는 낯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2학년 3반의 정 우는 드물게 복도를 스쳐 지나가면서 볼 때도 으레 만사가 귀찮은 듯한 말투로 다른 아이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잘은 몰라도 한참은 걸은 듯 했다. 은설은 자신이 그의 발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빗소리 때문이었을지, 아니면 자신이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 그도 아니면 문이 열리기 직전까지는 공간과 공간이 이어져 있지 않아서일지를 생각했다. 만일 세 번째 가설이 맞고,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에서 그러듯이 문이 열리는 순간 어떤 공간이 다른 공간과 이어질지가 결정되는 거라면 그 정보를 가지고도 무엇인가를 확인해 볼 수 있음직 했다. 문제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실험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기껏 만난 동지를 그런 식으로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너 뭐하고 있었냐."
우가 물었다. 은설은 그의 왼쪽 손목에 잠깐 시선을 두었다. 불안한 것처럼 '시계'를 매만지는 손가락들. 그는 대답하기 전 반쯤 풀린 실패를 들어올렸다.
"이걸 아까 도착한 교실에 묶어 놓고 이동하는 중이었단다. 잡아당긴다고 해서 돌아갈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지리 파악에는 도움이 되긴 할 테야. 앞문으로 들어가서 이걸 풀면서 뒷문으로 나오는 방식을 썼어. 너는 뭘 하고 있었니?"
"계속 걸었어."
우가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열리는 문이 없더라."
"그렇다면, 잠시 앉았다 가는 건 어떠니?"
비 때문에 공기가 습했다. 그들은 잠시 교실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몇 분 남짓이긴 했지만, 어쨌든 계속 걷는 것보단 쉬었다 가는 편이 나을 거였다. 우는 딱히 불만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만을 가질 힘도 없어 보였다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이긴 할 거였다. 은설은 그가 물고기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당장도 반이 다를 뿐더러 그는 이과, 저는 문과였기 때문에 겹칠 일은 없긴 하겠지만 독특한 아이들은 복도를 걸을 즈음 종종 눈에 띄었다. 습도가 더 올라간다면 지금보다 좀 더 기운을 차리게 될까.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잠시 하던 그는 다시 이동할 채비를 했다. 어쨌든 앉아 있는다고 해결될 건 없었다. 우도 느지막하게 일어나 섰다.
다음 문을 열었을 때 나타난 공간은 여태껏 나타났던 공간과는 완전히 달랐다. 은설은 문을 넘어가기 전 잠시 인상을 썼다. 급식실이었다. 학생 하나 없는 긴 공간, 마치 만찬장처럼 놓인 그릇들에는 음식이 가득했다. 피어오른 흰 김 때문일까, 공간의 공기는 교실의 것보다 더 따뜻했다. 천천히 식당으로 들어가도 요리사나 다른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빗소리는 여전히 지독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은설은 우와 나란히 서서 음식들을 관찰하다가 놓여 있는 해물찜 쪽으로 다가갔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연기에서는 과일 푸딩 같은 향이 났다. 그는 멈칫하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는 알고 있니?"
"알지."
허기가 느껴졌다. 지나치게 탐스러웠고 기괴할 정도로 따뜻했다. 고기의 기름은 반지르르했으며 생선의 살은 희었고 밥알에서는 윤기가 흘렀다. 우는 음식에 굳이 접근하지 않았다. 은설은 다시 그의 곁으로 이동했다. 제사 음식 생각이 났다. 낯선 진수성찬의 온기보다는 사람의 온기가 나았다.
"그 생각이 났어. 지옥의 음식을 먹으면 그곳에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고들 해."
우는 다시금 자신의 팔목을 매만졌다. 아마도 시계 비슷한 것을 하고 있을 위치였다. 팔찌인지 시계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이런 걸 줄 리가 없지."
그가 말했다.
움직이면 계속 이상한 공간이 나온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고, 그들 모두 창문을 열고 나가는 것은 시도해 본 사람들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잠시 식당 벽에 기대 서서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은설이 물컵에 시선을 두자 우가 가져온 물병을 내밀었다. 감사 인사를 하고 그에게 병을 돌려 주며 은설은 잘 모르는 친구와 말을 트기엔 부적절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왕이라면 좀 더 정석적으로 만나는 게 나았을 거였다. 대체 어떤 정석적인 방식으로 그와 대화를 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런 상황은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거였다. 창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고, 곁에 있는 사람은 정말로 물고기를 닮은 존재였기에 은설은 어항에 머리를 들이밀면 이런 느낌일지를 생각했다. 유리벽을 타고 흐르는 물, 갇혔다는 감각, 곁에서 느리게 지느러미를 움직이는 금붕어.
문득 주변이 일렁였다. 어항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일렁였다고 착각한 건지도 몰랐다. 테이블로 시선을 돌린 순간, 은설은 접시들이 테이블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우가 테이블로 다가가 손으로 표면을 쓸었다. 그의 손가락에 걸리는 물건은 없었다. 반질반질하고 차가운 탁자. 원칙대로 행동하기엔 매뉴얼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밀려드는 혼란 속에서 은설은 조심스레 상대의 곁에 다가가 섰다. 등 뒤에 마치 숨는 것처럼. 무언가를 잡고 싶은 것처럼 말렸던 주먹이 풀렸다.
"단단하네."
"응."
그러나 어항에 영원히 머리를 들이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었던가?
2021 (10.18.)
단편은 연습을 안 해서 슬슬 정체되기 시작하는 구간....
2022 (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