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깨찰빵 (봄봄, @Fallmoon_full)

타입: 키스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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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전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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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것처럼 세상이 돌았다. 하퍼는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수면제에 취한 사람들이 곧잘 자해를 통해 수마를 쫓아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으나, 당장은 그런 방법을 쓸 수 없었다. 두 명이 수행하는 작전에서 그런 식으로 동행인의 짐이 되어서야 곤란한 법이었다. 그는 무너져 내리는 벽에 등을 대고 발치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다이어 중사. 괜찮아?”

 

특히 곁에 어린애 하나를 끼고 있으면서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보고 배우면 안 될 일이었으니까. 하퍼는 엷은 웃음소리와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하이 정도면 멀쩡하지 않습니까? 전략 속행하겠습니다.”

작전 수행에 차질이 생길 상태라면 보고해.”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명백히 찜찜해 보이는 기색으로 가득했다. 검은 눈썹은 머지않아 미간에 붙을 것 같았으며 동공은 평소보다도 더 수축한 상태였다. 평소에는 올라가 있는 눈가마저 미묘하게 내려와 있는 그 낯이란. 군인이 되어서 그렇게 뚜렷하게 기분이 드러나는 표정이라니, 상대답긴 했다.

 

순간적으로 목 안에서 간지럽게 웃음이 끓었다. 하퍼는 총을 고쳐 들면서 그간의 계획을 복기하려 했다. 그들은 이번 도시 탈환 계획의 핵심 인력으로서 서쪽 공터까지 크리처를 몰고 오는 업무를 맡았다. 크리처 무리가 쪼개지는 사단이 발생했으나, 원래 계획이라는 게 틀어지라고 있는 것이니 큰 걸림돌은 아니었다. 다소 빠르게 라이를 쓰는 바람에 쓰러져 잠들기 직전의 상태까지 몰렸다는 것도, , 나름대로 수습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그러나 웃고 싶었던 기분은 제노의 이어지는 행보에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동행인의 상태를 슬쩍 확인한 제9사단 중령은 괴물들이 모여 있는 공터로 직행했다. 그의 무겁고 뚜렷한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크리처 무리가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제노를 발견한 그것들의 아가리에서 붉은 타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벽에 등을 대고 있던 하퍼는 귓가에 손을 댔다. 통신 단말의 전파가 지직거렸다.

 

중령님, 돌아오세요.”

어리광은 밤에나 부려 줘, 중사.”

 

공터의 부서진 거울 파편에 제노 스펜서의 얼굴이 반사되어 담겼다. 검게 변한 공막이 유리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이 휘몰아칠 때 도시에서는 짙은 먼지의 냄새가 났다. 나부끼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며 하퍼는 벽을 짚었다. 혼자 둘 수는 없었다. 외치는 목소리가 바람보다 뚜렷한 음색으로 주변에 메아리쳤다.

 

나한테 이까짓 놈들이야 별것도 아니거든!”

 

크리처가 휘어진 발톱을 날렸다. 제노의 머리 방향이었다. 같은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어쩌면 아예 흐르기를 멈췄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하퍼는 걸음을 내디뎠다. 유리에 맺혀 있던 검은 머리 남자의 상에 피가 묻었다. 두 사람이 갈긴 총에 맞은 크리처가 무너질 때 제노의 팔에서도 피가 흘렀다.

 

기어코 상처를 입었음에도 제노 스펜서는 돌아보지 않았다. 총구를 내린 하퍼가 비틀거리며 선 뒤에야 몸을 돌려 안부를 물었을 따름이었다. 패널티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하퍼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광경 때문인지 현실감이 없었다. 산발적으로 향취와 과거의 정경이 머리를 채웠다. 피 냄새, 제노 스펜서의 시신, 그의 꿈, 주사기에 담긴 903-4.

 

다가오는 제노를 보면서 하퍼는 문득 생각했다. 역시. 당신의 완벽한 죽음을 향한 갈망은 건재하구나.

 

***

 

군은 도시 내에 진지를 꾸렸다. 치료와 주변 정리가 일단락되고 수습이 끝나자 제노가 하퍼를 불렀다.

 

다이어 중사, 나 좀 보지.”

 

하퍼는 자신을 부르는 상대를 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나 갸웃 기울여 보이고 있노라니 제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래. 누굴 부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하바로 임무라도 나갑니까? 이러다가 골로 가면 곤란한데.”

임무 말고. 다른 급한 일.”

 

임무 의의 급한 일이라면 무엇이길래. 결혼이나 미래 계획 얘기라도 시작할 작정이라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대놓고 이야기를 나눴다가는 소문만 날 게 뻔했다. 설마하니 그런 얘기를 꺼내고자 대놓고 부른 것은 아니겠지만. 하퍼의 손목을 냅다 잡은 제노는 근방에서 흘끔거리는 다른 대원들을 향해 소리를 쳤다.

 

할 일들 해!”

 

비밀 연애에 대한 남자친구의 희망 사항을 존중해 주는 건 알겠는데. 평소 태도와 그리 잘 맞지도 않으니 수상쩍기만 한 고함이었다. 하퍼는 멋쩍게 웃으며 제노의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따로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야영지의 숙소 방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멀어질수록 어쩐지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은 묘한 감각이 일었다. 얼마간 앞서가려고 걸음을 서두르던 제노가 우뚝 멈춰 섰다. 그는 하퍼의 길을 막고 서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어떤 얘기 하는 거예요, 여보?”

아까부터 말이 없잖아.”

그게 아까 말한 급한 일인 걸까. 괜한 웃음이 샜다. 하퍼는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숙이라는 의미에서 손짓했다. 제노가 몸을 기울이자 그는 상대의 뺨에 입술을 눌러 붙였다. 맞닿은 살갗 위로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퍼는 의도적인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제노는 그대로 고장 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뻔한 말 돌리기였다. 그러나 당장 진실에 대해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사람은 한 명이 아니지 않았던가. 상대가 결국 어울려 주고야 말 것이라는 추정 속에서 하퍼는 아직 기울어져 있는 목에 팔을 걸었다. 이마가 부드럽게 부딪혔다. 제노의 눈을 마주하는 한 쌍의 눈매가 웃음으로 휘어졌다. 속삭일 때면 숨결이 상대의 입술에 닿는 거리였다.

 

어때요, 이제는 말하고 있지요?”

그게그렇긴 한데.”

 

하퍼의 입술이 연인의 것에 포개졌다가 떨어졌다. 찰나의 정적, 제노의 팔이 상대의 허리에 감기면서 재차 입술이 붙었다. 하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천천히 내리감았다. 입이 벌어지면서 저 좋을 대로 밀고 들어오는 혀가 안에 있던 살을 짓눌렀다. 그것은 볼 안쪽의 점막을 헤집고 혀 밑의 여린 살을 들쑤셨다. 어깨가 짧게 떨리면서 생리적인 침음성이 샜다.

 

으음.”

 

목에 감긴 팔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멈칫했던 제노는 도리어 손으로 허리를 감싸 쥐면서 입천장을 따라 혀를 미끄러뜨렸다. 단단하고 뜨거운 살이 목구멍 언저리를 짓누르자 재차 긁는 신음이 튀었다. 하퍼는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받아 감고 느릿하게 빨기 시작했다. 내부의 공간이 수축하며 깊은 곳에서부터 선명한 물소리가 일었다.

 

목과 뺨으로 열이 올라왔다. 허리에 닿아 있던 제노의 손길이 등줄기를 타고 느릿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가 날개뼈를 지분거릴 적에 하퍼는 헐떡이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닿는 곳이 죄 타는 것처럼 저린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누가 올 수도 있는 장소에서 계속하기는 곤란할 수도 있는 작업이었다. 그가 빠져나가려는 것처럼 허리를 뒤척이는 찰나 혀가 내부의 젖은 구석을 찔러들었다.

 

…….”

 

하퍼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려면 약간의 집중이 필요했다. 상대는 사랑스러울 정도로 제멋대로였으므로, 당장은 몰입하며 넘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검은 머리카락 틈새로 파고들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을 섞고 있을 적이면 서로를 속속들이 알게 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고독으로 점철되어 제정신으로는 도통 감당하기 힘든 삶이라는 것 밑에서 타인의 온기는 유일하게 슬픔을 덜어 줄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고통은 경감할 수 있는 것이지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으므로. 몸을 붙인다고 해도 살갗마저 없애지는 못해 영혼과 영혼 사이 장벽이 남기 때문에. 하퍼는 제노에게 기대는 대신 그를 끌어당기면서, 하퍼가 그의 연인을 아는 것과 같이 제노도 저를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에는 책임이 타르처럼 달라붙었다. 오래전부터 영웅 되는 자들은 훌륭히 명을 다함으로써 고결성을 쟁취하였다. 그것은 숭고해야만 한 자에게 부과되는 책무였다. 죽음으로써 그들은 전설이 되었고, 의무를 수행하였고, 영원히 완전하게 남았다. 제노 스펜서는 여전히 완벽한 죽음을 원했다.

 

보호받은 것들은 그 보호자의 삶을 영원히 지고 살아야만 했다. 그들이 헛되이 죽는다면 저를 보호한 희생자의 투자 역시 의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곧잘 스스로 보호자의 전철을 밟았으며 상실이 자성自成 예언과 같이 찾아올 것을 두렵게 생각했다. 하퍼 다이어는 어린 연인에게 기대지 않았다.

 

하퍼는 재차, 자신이 저의 연인을 아는 것과 같이 그의 연인 또한 하퍼 자신을 알 것이라고 여겼다. 아마도. 입을 맞출 적에 그들은 서로에게 진실하였으나 같은 입으로 상대를 기만하였다. 그것은 의도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상흔 때문에 발생하는, 실로 본능적인 소통의 방식이었다.

 

그리하여 중요한 문제는 어느 도시 밑에서 산다는 악어와 같이 입맞춤 밑으로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수가 적어진 이유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아서. 얄팍하게 덮어 놓은 바를 헤집어 엎고 싶지 않아 입맞춤을 선택했다고 해도. 그 온기마저 무익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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