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깨찰빵 (여름벌레, @angelightbug)
타입: 뷔페 커미션바
이용 가능 범위: 본 커미션 작업물의 내용은 신청자 본인에 한하여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슈리에타 아델하이트. 나랑 결혼해 줄래?”
비가 온 직후의 정원은 밤처럼 싱그러웠다. 울창하게 자란 꽃들이 샛길로 파고 들어간 두 사람을 끌어안고 이파리를 늘어뜨렸다. 저택의 사용인들이 다가와도 사람을 쉽게 찾지는 못할 자리, 때는 저녁이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식물의 기름진 줄기가 푸르게 갠 하늘을 가렸고 죄 서쪽을 향한 해바라기의 노란 꽃들 사이로 짙어진 햇빛이 흔들렸다. 밤에는 불꽃으로 하늘을 수놓는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에드먼드는 손을 내밀고 기다렸다. 슈리에타 아델하이트의 낯은 순간 붉어졌다가, 이내 창백하게 질렸다가, 마침내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떨리는 목소리. 그가 얼결에 답을 뱉었다.
“에드, 나 오래 못 살아.”
시작부터 완벽한 날은 아니었다. 새벽같이 공작 가의 대문 앞에 나타난 사과 장수는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떠든 뒤에야 떠났다. 아침 열 시, 에드먼드는 짜증스레 숨을 한 번 고르고는 잔에 홍차를 부었다. 근처 지역의 물은 맑으니 우리는 시간은 비교적 짧게, 처음엔 잔에 온수를 부어 도자기를 덥히고 두 번째로 차를 따를 것. 붉은 물줄기를 들여다보는 시선은 떫었으나 다과를 올리는 솜씨만은 능숙했다. 슈리에타는 그가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얇게 저며 설탕을 입힌 사과 조각들을 관찰했다. 흰 구름이 해를 가리자 꽃들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에드먼드는 의자를 덜컹 당기고는 한 마디를 던졌다.
“나갈 때는 우산 챙긴다.”
“왜? 비 온대?”
슈리에타가 하늘을 확인했다. 붉은 꽃잎 한 장이 정원을 가로질러 그의 손등에 떨어졌다. 에드먼드는 찻잔을 들어올렸다.
“사과 파는 작자가 비 올 것 같대. 아니면 그냥 집에 있든가.”
“혹시 집에 있는 편이 더 좋아?”
“옷 젖으면 네가 감기 걸리잖냐. 하고 싶은 대로 해.”
날씨에 대한 단순한 예고만 십 분 동안 들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귀를 문질렀다. 장사꾼이 정과 반과 합에 대해 떠들어 대던 말소리가 여전히 귀에 쟁쟁했다. 어느 철학자인지 선생인지가 세상의 모든 일은 세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고 설명했다는 것이었다. 기본 상태가 정, 대치하는 상태가 반, 섞이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합. 날씨의 경우 맑은 날이 정, 쏟아지는 비가 반이라면 합은 바람이 촉촉한 맑은 날일 거라고도 했다. 대체 날씨 같은 가벼운 화제를 꺼냈으면서 왜 구구절절한 소리를 더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들으면서 누굴 생각하지만 않았어도 더 일찍 자리를 떴을 거였다.
“그래도 괜찮아?”
에드먼드는 퍼뜩 공상에서 벗어났다. 입가가 화끈거렸다. 저도 모르는 사이 잔 가장자리에 입을 대고 한참 상대를 쳐다본 탓이었다.
“뭐가?”
“나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고민하게 만들지 마라.”
“음.”
“힘들면 안에 있고 아니면 주변 구경해도 되고.”
“그럼 역시 나가서 돌아다닐래.”
말하면서 슈리에타가 꽃잎을 이마에 붙였다.
“둘이 우산 쓰기 힘들면 내가 변하면 되니까!”
그가 웃었다. 손을 떼자 꽃잎이 날아갔다. 까딱이는 구두 앞코에 닿은 흰 야외 테이블이 소음을 일으켰다. 들꽃 축제의 첫 번째 날, 아델하이트 공작저의 정원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기본적으로 엘프의 축제라지만 들꽃이 화려한 5월에 다른 지역 꽃들이 숨을 죽일 리는 없었다. 헤르슌테일의 제국민들이 기념일에 대비하는 동안 공작저의 식물들은 빠르게 자라났다. 장미 덤불이 오뉴월의 개화를 준비할 무렵 해바라기들이 그 주변을 에워쌌다. 정원사는 개화 시기가 어긋난 걸 보아하니 누가 흙에 장난을 쳐 놓은 게 분명하다고 떠들었다. 진상은 파악할 수 없었지만, 가을의 정원이 비교적 쓸쓸해지리란 사실을 제하면 손해가 될 만한 지점은 없었다. 해바라기보다 작은 저택 주인을 보고 있자면 유쾌하기도 했고. 슈리에타 아델하이트는 꽃이 빨리 질 거라는 소식을 듣고 표정을 굳혔으나 별다른 거부감은 드러내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잎사귀들이 빗소리를 냈다. 슈리에타가 설탕 입힌 사과 조각을 집어먹고는 홍차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에드먼드는 뒤통수를 빠르게 한 번 헤집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거리에서는 이번 봄이 유독 무덥다는 말이 돌았다. 누군가가 인과를 흐트러뜨렸다가 다시 끼워 맞추면서 온도를 잘못 조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침나절부터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식기가 밀리나 싶더니 흰 주전자 밑에 켜 놓은 촛불이 꺼졌다. 에드먼드는 슈리에타가 마들렌을 베어 무는 것을 보면서 손가락을 튕겨 점화했다. 적어도 봄이니 비만큼은 부드럽게 내리길 바랄 뿐이었다. 그는 찻주전자 옆에 세워 놓은 삼단 트레이의 위치를 조정하면서 인상을 썼다. 슈리에타가 말을 꺼냈다.
“에드. 괜찮아?”
“뭐가?”
“피곤해 보여.”
뜻밖의 발언이었다. 에드먼드는 목소리를 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뻑뻑한 눈을 두어 번 깜박인 그가 대꾸했다.
“잠을 설쳤어.”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신경 쓸 거 없어. 그냥 용이 나와서.”
“어떤 용이려나? 악몽이라는 걸 보면 니드호그인가?”
“대충.”
침묵. 슈리에타가 떨어뜨린 과자 부스러기가 늘어진 소매에 묻었다. 에드먼드는 손을 뻗어 가루를 털어 내면서 말을 골랐다.
“이런 얘기 좀 웃긴데.”
“웃긴 얘기도 좋아.”
“만약에 우리가 시간을 거슬러 두 번 살 수 있다고 쳤을 때.”
아침의 장사꾼과 같은 부류가 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악몽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구구절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귀 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가 말을 이었다.
“일어난 사건을 반복되지 않게 할 수…망할, 됐어. 쓸데없이 머리만 복잡해지네. 잊어버려.”
“그거 꽤 철학적인 논의네!”
“잊어버리라니까.”
비록 완벽한 아침은 아니었다지만 함께 주변을 산책하기로 한 날이었으므로 완벽한 저녁은 될 수 있어야 했다. 용에게 살해당하는 꿈은 그냥 꿈일 뿐이었다. 에드먼드는 떨리는 오른손을 쥐었다 다시 폈다. 깨어났을 때 느껴지던 통증을 떠올리면 속이 차게 식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마법은 없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영에 수렴한다는 뜻이었다. 찰나의 기분 때문에 계획이 흐트러져서는 곤란했다. 다녀오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가 다시 트레이를 노려보자 슈리에타거 설탕 사과 절임을 포크로 찍어 내밀었다.
“뭐야? 마음에 안 드냐?”
“당연히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특별히 양보하는 거야. 먹을래? 난 네가 깎아 준 사과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내가 알아서 먹을 수 있거든?”
그러나 얄궂게 말하는 것은 버릇일 뿐이었다. 몸을 기울여 입에 넣은 과일에서는 달콤하면서도 풋풋한 사과 꽃의 향기가 났다. 슈리에타가 몸을 앞으로 당겼다.
“어때?”
“몰라. 너 하나 더 먹어.”
티파티는 정오가 되기 전에 끝났다. 구름의 색이 천천히 짙어지는 동안 그들은 저택 주변을 산책했다. 점심 무렵이면 한창 사람들이 몰려 있어야 할 야외 좌판 근처는 한산했고 꺼내 놓았던 화분들 위로 천막을 설치하는 주민들도 눈에 띄었다. 몇몇 지붕 위에서 닭 모양 풍향계가 빠른 속도로 돌았다. 모여 선 노인들은 봄비가 내리기 전에 이렇게까지 서늘하고 축축한 바람이 부는 것도 기묘한 일이라고 쑥덕거렸다. 산책하는 남녀를 제대로 반긴 것은 돌담길 틈새에 흐드러지게 핀 이름 모를 들꽃들과 웃자란 장미 덤불 정도였다. 어수선함에도 불구하고 에드먼드는 주변의 칙칙함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동행인 탓이었다.
담쟁이들이 몸을 떨면 보이지 않는 정원에서 이름 모를 들꽃의 내음이 밀려왔다. 에드먼드는 우산을 끌면서 걷다가 보폭을 맞췄다. 불어오는 것이 정말로 꽃의 냄새인지 아니면 슈리에타의 옷깃에 밴 향인지는 불분명했다. 때때로 그는 무의식중에 향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걸음을 틀곤 했다. 근처의 지리를 알아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작 길을 잃었을 거였다. 슈리에타는 그의 팔에 손을 얹고 걸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나칠 때마다 느껴지는 시선이 있었으나 에드먼드는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광장 근처의 어느 건물 앞에서 걸음이 멎었다. 작은 아치형 문 위에 달린 금색 팻말이 반짝였다. 인형사의 집. 문의 격자형 창 너머로 나무 바닥이 비쳤다.
“슈슈.”
“응?”
“여기 잠깐 들렀다 가자.”
“좋아, 그럴까!”
문을 밀어 열자 슈리에타가 먼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장작 타는 냄새와 온기가 불어닥쳤다. 나무 내음이 짙은 대기실 왼쪽 구석에는 까맣고 작은 문이 자리했다. 정육면체 모양의 방에는 출입문 방향으로만 큼직한 창들이 나 있었다. 우측 구석에는 벽난로가 자리했으나 그 외에 가구라 부를 만한 것도 거의 없었다. 검은 문 앞에 모여 선 다른 방문객들이 그들을 보고는 놀란 눈을 했다. 문 옆에 서 있던 종업원 소년이 다가왔다.
“연극 보러 오셨나요?”
에드먼드는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는 동전들을 건넸다. 소년이 표 두 장을 내밀었다. 에드먼드가 한 장을 옆으로 넘겼다. 슈리에타는 잠시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긴 어디야?”
“인형극장.”
“오늘 보기로 한 공연이 이거야?”
“원래는 저녁 때 한다는 불꽃 공연 보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남잖아.”
“그럼 정오에 일어났어도 됐던 거잖아!”
에드먼드는 냉정한 얼굴을 했다.
“안 돼. 늦게 일어나면 건강에 안 좋다고 한 거 잊었냐?”
뭐라고 항변이 나오기도 전에 그는 슈리에타의 손을 잡고 줄을 섰다. 인형극을 보러 온 것은 반은 충동이었고 반은 계획이었다. 일전에 광고를 보았을 때 아델하이트 공작가의 가장 어린 주인과 보러 오면 좋겠다고는 생각했던 차였다. 정작 이번에 진행되는 인형극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안내원이 공연 시작 십 분 전을 외쳤고 줄 달린 인형을 안은 사람들이 허둥지둥 문 안으로 향했다. 관객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에드먼드가 슈리에타의 어깨를 감싸 살짝 당겼다. 그의 동행인은 내리깐 눈으로 표를 관찰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오려진 갈색 종이 위로 공주와 마법사 그림이 선명했다.
들어선 극장은 작았고 자리는 유동석이었다. 그들은 공연장 뒤편 중앙 자리에 앉았다. 에드먼드가 챙겨 온 작은 가방에서 쌍안경을 꺼내 슈리에타의 손에 꽂았다. 불꽃 공연 때 필요할까 봐 미리 챙겨 온 물건이었다. 아델하이트가 렌즈를 들여다보는 동안 그는 핸드백에 들어 있는 지갑이나 손수건 따위를 마저 정리했다.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귀걸이가 드러났다. 가방을 닫는 순간 부드럽고 차가운 것이 귓불에 닿았다. 본능적으로 앞자리를 걷어차기 직전 눈을 동그랗게 뜬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에드먼드는 하려던 욕 두 가지 중 하나를 삼켰다.
“젠장, 왜?”
“놀라게 해서 미안해. 그냥 그 귀걸이…금 간 것 같아서.”
“미친.”
극장의 직원들이 실내의 초를 끄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서둘러 귀걸이를 빼서 표면을 확인했다. 불빛이 표면에서 반들거릴 뿐 어긋나게 산란하는 빛은 없었다. 그는 보석을 손으로 세 번쯤 훑은 뒤에야 부루퉁한 낯을 했다.
“금 간 거 없잖아.”
“응? 내가 잘못 봤나? 미안, 그래도 내 실수인 거면 다행이야!”
슈리에타는 멋쩍게 웃었다. 귀걸이를 다시 걸면서 에드먼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피곤한 거 아냐? 역시 오늘 저녁 디저트는 포기해라.”
“포, 포기라니! 얘기가 왜 그렇게 돼!”
“밤에 많이 먹으면 수면 질이 떨어지거든?”
직원들이 몇 개의 초를 더 껐다. 곁에 앉은 사람의 이목구비가 흐릿해졌다. 사방에서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눈 색마저 덮을 무렵 속삭임으로 항의가 이어졌다.
“잘못 본 거라니까!”
“돌아가서 시력이나 확인하든가.”
“그냥 저녁엔 같이 케이크 먹자, 응?”
무대의 막이 오르면서 대화가 끊겼다. 에드먼드는 시선을 피해 앞을 응시했다. 들리는 것은 어쩐지 성난 듯한 숨소리가 전부. 그리고 그마저도 또각또각 무대로 들어서는 목각 인형의 소리에 묻혀 버리고야 마는 것이었다. 연극의 도입에서는 용사와 공주와 괴수가 등장했다. 용사의 귀에는 붉은 보석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세계는 멸망의 기로에 놓여 있었고, 공주와 용사는 둘 다 마법사였다. 두 사람은 일시적으로 반목했지만 결국 결합을 약속했다. 투구를 쓴 인형과 보라색 머리카락을 한 인형은 이윽고 산을 무너뜨리고 괴물을 부리는 괴수를 마주했다. 놈이 불을 뿜자 용사가 쓰러졌다. 그가 누운 자리에 붉은 귀걸이가 남았다.
암전. 빛이 돌아왔을 때 공주 인형은 무릎에 귀걸이를 올린 채 보석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괴물이 사라진 세계에서 새가 지저귀고 해가 빛났다. 공주의 곁으로 한 쌍의 행인 인형들이 지나가며 대화했다. 그래서 최근에 그 책 읽어 본 적 있어? 어떤 책? 그러니까, 이 세계가 멸망과 탄생을 반복하면서 점에서 시작해 세계가 되었다가 점으로 돌아가고, 또 그 점이 도로 세계로 화한다고 적혀 있는 책 말이야. 사람의 삶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대. 그래서 탄생한 세계는 반드시 멸망할 수밖에 없고 멸망한 세계는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지. 그럼 한 번 멸망했다가 다시 태어난 세상은 그 이전 세상과 같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기서도 수천, 수만 년이 흐르면 또 우리가 태어나서 이런 대화를 하게 될까?
행인 인형들이 지나가고 긴 고깔모자를 쓴 마법사 인형이 다가와 공주의 어깨를 두드렸다. 공주가 고개를 돌리자 마법사가 긴 옷자락을 펼치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공주님. 흥미로운 물건을 갖고 계신 것 같군요. 공주가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킬데어의 마법사가 아니신가요? 고깔 모자 인형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입을 딸깍거렸다. 들고 계신 물건에서 굉장히 강한 마법의 힘이 느껴지는군요. 무의식중에 마법을 끊임없이 주입한 물건에서나 그와 같은 기운이 느껴지는 법인데 말이지요. 아십니까, 공주님? 강한 감정을 품은 마법사가 오래 지니고 다닌 물건은 그런 식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향을 싸고 다닌 종이에 향이 배는 것처럼요. 특히 그 물건 자체가 원래부터 마법 물품으로 기능했다면 더 강한 마법이 깃들 확률이 높아지지요. 이미 금이 간 돌에 물을 떨어뜨리고 얼리길 반복하면 금이 더 커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공주가 물었다.
“세계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을 정도로 강한 마법인가요?”
“얼마나 많은 것을 통제하려 드느냐에 따라 다를 겁니다. 마법이 조금만 영향을 미친다면 그 흔적이 각종 징조로 남긴 하겠지만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말입니다.”
마법사는 화려한 단어를 쓰며 떠들었다. 요는, 용사의 귀걸이에 그의 목숨이 섞여 들어갈 정도로 아주 강한 마법이 걸렸다는 것이었다. 그 덕에 긴 시간이 흘러 세계가 한 번 멸망한 뒤 다시 한 번 반복되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어디까지나 공주가 원한다면의 일이었지만. 한 세계가 멸망한 뒤 다시 생겨나는 세상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지는 예측할 수 없다고 마법사는 설명했다. 그러나 공주가 쥐고 있는 마법 물품의 힘이라면, 두 번째 세상에서도 같은 삶이 반복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론이었다. 공주는 마법사와 함께 무대의 뒤로 이동했다. 연극의 배경이 빠르게 바뀌었고 다시 한 번 용사와 공주가 무대에 나타났다. 괴수가 불을 뿜으려 하는 순간 두 사람이 함께 마법을 썼다. 괴수는 그 자신의 불에 먹혀 죽었다.
극장에서 빠져나왔을 때 거리는 처음 들어왔을 적보다 한참은 더 어두웠다. 비가 바닥을 거뭇하게 물들이는 것이 보였다. 에드먼드는 우산을 펼쳤다. 펼쳐진 우산살 밑으로 슈리에타가 몸을 들이자 에드먼드가 곁에 섰다. 간헐적으로 빗방울이 천을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왼손으로 손잡이를 들고 있자면 슈슈가 팔에 손을 올렸다. 에드먼드는 뭐라 말하려다가 잇새로 숨을 뱉고는 거리로 들어섰다. 목적지는 저택이었다. 좁은 골목 사이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놀란 길고양이들이 가게의 천막 밑으로 숨어들었고 창문들은 요란하게 덜컹거렸다. 한 갈래로 높게 묶은 슈리에타의 머리끈이 풀려 날아갔다.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덮칠 무렵 빗줄기가 순식간에 굵어지기 시작했다. 발목을 후려치는 빗방울이 따가웠다.
“망할, 무슨 봄에 소나기가 내려?”
소리를 지르자 그에 맞춰 빗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슈리에타가 근처를 가리켰다.
“저기 들어갔다 갈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삐걱거리는 낡은 오두막이 한 채 서 있었다. 땅딸막한 집 옆에 선 죽은 버드나무가 귀신의 산발머리처럼 가지를 나부꼈다.
“진심이냐?”
“주인 없는 집 같아. 폐가 체험도 나름 재밌을 거야!”
반박을 할 겨를은 없었다. 우산이 바로 뒤집혀 버린 탓이었다. 에드먼드는 빗물을 담기 시작한 천을 방패삼아 기울이고 슈리에타를 끌어 달렸다. 요란하게 끽끽대던 문은 그들이 들어가기가 무섭게 돌풍과 함께 닫혔다. 슈리에타가 젖은 머리를 털어 내는 사이 에드먼드는 다시 문을 열고 우산에 담긴 물을 냅다 흩뿌렸다. 같은 순간 비바람이 입구 방향으로 갑자기 더 거세게 몰아친 탓에 그는 서둘러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근처에 놓인 빗장까지 걸고 나면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만 정적을 살랐다.
실내는 지독하게 검었지만 주변을 살피다 보면 차츰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안에서 별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놓여 있는 낡은 나무 가구에서는 톱밥이 떨어져 내렸고 관리되지 않은 바닥은 먼지로 지저분했다. 올라가는 계단도, 별도의 방도 없는 것으로 보아 점포 따위로나 사용된 눈치였다. 창은 작아 가뜩이나 부족한 바깥 빛은 실내를 거의 밝히지 못했다. 5써클의 마법사는 주변을 살피다가 녹슨 화로를 하나 끌고 온 뒤 망가진 목재 조각을 집어넣고 손가락을 튕겼다. 열기와 빛이 퍼지며 뺨과 젖은 옷을 감쌌다. 불이 커지자 그는 슈리에타의 등 뒤로 가 엉킨 머리카락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공작의 딸이 다시 한 번 웃었다.
“예상했던 축제랑은 다르지만 이것도 독특한 경험이네!”
“이게 뭐가 재밌냐? 머리도 다 엉켰는데.”
“그래도 이만하면 에드가 할아버지가 되더라도 기억에 남을 들꽃 축제가 되겠지!”
“망할, 이제 나무까지 쓰러지면 뒤지게 기억에 남긴 하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꺾이는 우드득 소리가 났다. 창 너머로 큰 그림자 하나가 지나가나 싶더니 굉음이 울려 퍼졌다. 에드먼드는 가만히 서 있다가 성큼성큼 문가로 향했다.
“에드.”
그가 빗장을 열고 문을 밀었다. 덜컹거림이 있었다. 살짝 벌어진 틈으로 두툼한 나무껍질과 갈색으로 말라 죽은 잎이 한가득 모습을 드러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버드나무가 이제는 사방을 후려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두막 문을 아무리 힘주어 열어도 장애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짙은 흙냄새가 일었다.
“에드?”
“거기 있어.”
구두 굽 소리가 났다. 에드먼드는 문을 세게 한 번 걷어찼다가 신음을 참으며 웅크렸다. 바로 곁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틈이 있으니까 이따 마법으로 치우면 되지! 지금은 신경 쓰지 마. 말한 대로 이루어진 게 신기하기도 해, 나무가 듣고 일부러 쓰러진 것 같잖아?”
에드먼드는 눈을 뜨고 숨을 골랐다. 슈리에타가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발은 괜찮아?”
“그럼 설마…….”
죽겠냐, 고 말하려던 그는 잠깐 침묵했고 곧 단어를 바꿨다.
“이걸로 부러지겠냐? 너는. 춥진 않고?”
“응. 불가에 서 있으면 따뜻하거든. 잠시 앉아 있자!”
에드먼드는 팔에 닿은 손에 제 손가락을 짧게 얹었다가 뗐다.
“차갑잖아. 넌 좀 자기 건강을 더 살펴야 할 필요가 있어.”
슈리에타가 작게 웃었다. 의도적인 침묵, 명백했으나 질문을 돌려줄 자신은 없었다. 그들은 불가로 돌아왔다. 나무 의자에 앉아 손을 쬐다 보면 멀리서 번개가 쳤고 때로는 천둥이 상념을 방해했다. 비는 여름의 소나기처럼 왔다. 때를 모르고 일찍 피어난 해바라기들을 따라 계절이 내닫아 오기라도 한 것처럼. 슈리에타는 간헐적으로 아카데미 이야기를 꺼냈다. 특정 시점 이후의 일들은 자주 언급되지 않았으나, 에드는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역시 당시의 일들을 웃으면서 논할 자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비가 오면 정원은 괜찮으려나?”
문득 슈리에타가 물었다. 에드먼드는 화로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오른손이 짧게 경련했다.
“정원사가 알아서 하겠지. 사후 처리는 내가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아무리 그래도 비가 빨리 그치면 좋겠어! 죽은 꽃들을 치우는 건 힘든 일이니까. 지금도 정상적으로 피었을 때보다 일찍 질 거라고 했는데.”
슈리에타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말을 잇기 전에 번개가 사방을 희게 물들였고 곧바로 천둥이 고함처럼 주변을 울렸다. 에드먼드는 양 손을 들어 상대의 귀를 막았다. 멍멍한 가운데 묻는 입모양이 보였다. 왜?
“귀 아프니까 듣지 말라고. 싫냐?”
슈리에타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 어정쩡한 자세로 귀에 손바닥을 대 주고 있자니 그가 동행인의 방향으로 다리를 옮겼다. 잠시 생각하던 에드먼드가 자세를 바꿔 마주보고 앉았다. 두 손바닥 사이에서 슈리에타가 말했다.
“이러고 있으면 바위가 구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음성이 손목을 타고 어깨를 간질였다. 주변의 소리가 분명하게 들리지 않는 탓인지 발음이 살짝 뭉개져 있었다. 슈리에타가 말을 이었다.
“귀를 막으면 세상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 들어 봤어?”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방 정리 해 주던 애가.”
“바보였던 거 아냐? 손 주인 심장 소리겠지.”
“그런 것치곤 지금 너무 심장이 빨리 뛰고 있는걸.”
반박하기 좋은 시점이 아니었다. 입을 다물자 슈리에타는 미소를 지었다가 자신의 손으로 에드먼드의 귀를 막았다. 빗소리가 작아지고 물에 잠긴 것 같은 눅진한 음색이 귓바퀴를 메웠다. 작게 맥박 뛰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느 쪽이든 아주 헛소리는 아니겠네.”
에드먼드가 중얼거렸다.
“역시 그렇지?”
대답 대신 앞으로 숙이면 입술이 닿았다. 틈 사이에 숨이 있었다. 살갗이 살갗을 스치는 거리, 입의 중앙에서 맥박 뛰는 감각이 선명해질 즈음 슈리에타의 흰 손가락이 에드먼드의 붉어진 뺨을 쓸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드는 손가락, 바닥은 귀에 누른 채 먼저 파고든 것은 아델하이트였다. 고개를 기울이자 쏟아진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았고 구멍이 구멍을 막았다. 맞물린 틈 사이에서 혀가 치열을 훑더니 입천장 방향으로 부드럽게 밀려들었다. 에드먼드는 들어온 것을 감아 느리게 빨았다. 혀 밑을 긁듯이 눌렀다가 치고 드는 것의 아래를 간지럽히듯 쓸어 내려가면 엉긴 매듭이 풀렸다. 말랑하고 축축한 것이 가장자리를 타고 미끄러져 아래의 혀뿌리를 찔렀다. 손 안에서 침음이 일었다. 세운 혀 끄트머리가 목구멍 근처의 여린 살을 누르고 어금니 너머의 부드러운 구석을 눌렀다. 다시금 떨림, 움츠림과 함께 입 안이 좁아졌다가 다시 벌어졌다. 목이 움직이더니 살이 파고든 것을 감아 당겼다. 손가락이 구부러지면 머리카락은 바스락 소리를 냈다.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로 시끄러운 맥박이 호흡을 막았다. 공기를 찾아 턱을 움직이자 입가를 따라 맑고 끈끈한 것이 미끄러졌다. 뺨을 스치는 온기.
“아.”
“…….”
붉어진 아랫입술을 물어 빨아들이면 윗입술에 닿는 혀의 감촉이 있었다. 말캉거리면서도 미끄러운 감촉, 그는 입에 고이는 액을 삼키고 머리를 돌렸다. 혀가 다시금 벌어진 입술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치열을 훑으면 여전히 귀를 막고 있던 작은 손가락들이 머리카락을 쥐었다. 은사처럼 부드러운 선들이 손가락에 감기는 것을 느끼면서 에드먼드가 등을 휘어 허리를 숙였다. 뒤통수를 받친 손가락들, 슈리에타의 몸이 등받이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가구가 바닥에 쓸리는 소음이 짧게 일었다. 침입한 혀가 안으로 아주 느리게 미끄러져 들어가면 입은 움직임을 받아 삼켰다. 감았고 빨아 삼켰다가 어금니로 부드럽게 눌렀다. 살이 이에 타액으로 붙었다. 등줄기 뒤에서 화로가 불길을 일렁일 때마다 열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흐느낌 같은 침음성이 있었다. 막힌 공간, 소리는 몸을 타고 퍼졌다가 되돌아왔다. 맥박이 공명했다. 비와 천둥의 소음마저 짓누르는 박동 속에서 슈리에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에드먼드는 입의 가장자리를 훑으면서 문득 아침의 일을 생각했다. 말소리. 사과. 우짖는 새와 등 뒤로 펼쳐진 정원과 저택. 에드먼드 딜런은 한 차례 슈리에타와 동행했고, 한 차례 그를 부정했다. 삶이 정말로 단계를 반복하며 나아간다면 그는 슈리에타 아델하이트 없이 나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결국 보통의 사람들이 삶이라 부르는 것은 단순한 연명 이상이 아니었던가? 날숨과 들숨이 교차했다. 어지러운 정신, 눈을 내리깔면서 혀를 감싸 제 입 안으로 끌어들이면 꿈이 떠올랐다. 통증 속에서 아마도 살고 싶었던 것 같았다. 입 안에서 웅덩이를 헤집는 것보다 선명한 물소리가 났고, 에드먼드는 생각을 고쳤다. 그냥 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는 슈리에타 아델하이트와.
숨통이 터졌다. 부은 입술과 입술이 떨어지면 흐린 빛 속에서 살이 번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슈리에타는 소매로 입을 문질렀다. 에드먼드는 손수건을 꺼내 주려다가 이번만큼은 그냥 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을 주변을 한 바퀴 달리고 온 것처럼 심장이 뛰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귀를 기울이던 그는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들고 있던 가방을 상대에게 건네고는 문가로 향했다. 근처의 창 표면에서 물기가 반사하는 빛에 눈이 시렸다. 슈리에타가 마법으로 화로의 불을 끄고는 다가왔다. 에드먼드는 손등으로 자기 입을 한 번 눌렀다.
“가도 되겠는데.”
하늘은 새파랬으나 시간은 이미 늦은 오후였다. 그들은 광장을 돌아보는 대신 바로 공작가의 정원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에드먼드는 부러진 우산을 욕했고 슈리에타는 맑은 공기와 길고양이 얘기를 주워섬겼다. 마침내 도착한 저택에서 해바라기들이 그들을 반겼다. 유독 멀대처럼 길게 서 있던 꽃 두어 송이의 목이 꺾인 게 눈에 띄었으나, 전반적으로는 별다른 이상이 생기지 않은 눈치였다. 슈리에타는 고개를 푹 숙인 꽃대를 세워 놓으려 애쓰다가 에드먼드의 제지에 포기했다. 물러나온 그가 숲처럼 서 있는 꽃들을 잠시 응시했다.
“그럼 더 꺾인 꽃이 있는지만 보고 올게!”
“왜 귀찮게 그러냐? 내가 한다니까.”
“에드는 커서 들어가기 어려우니까!”
슈리에타가 젖은 흙을 밟으며 해바라기들 사이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키는 묘목보다 작았으므로 몇 걸음 들어가기도 전에 뒷모습이 잎사귀에 반쯤 가려졌다. 에드먼드가 뒤이어 샛길의 땅을 밟았다. 흙이 질어 움직임에 어려움이 있었다. 슈리에타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문득 자신이 상대를 이대로 잃어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슈슈.”
“응? 왜?”
슈리에타가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 말고 몸을 돌렸다. 에드먼드는 상대를 응시했다.
“할 말이 있어.”
그러니까, 그 말은 결국 할 수밖에 없었던 말이었다. 에드먼드의 입이 움직이고 목이 울렸다. 맥박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운을 떼기도 전부터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알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슈리에타의 낯빛이 변했다.
“에드, 나….”
고백에 돌아온 것은 다른 고백이었다. 어쩐지 그 답을 들을 거라는 사실 또한 이미 알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짧게 세상이 회전했다. 분명 어느 찰나의 순간 시간이 멈췄던 것도 같은데. 다시 상대에게로 초점을 맞추고 보면 여전히 공작저의 정원이었다. 그가 말없이 서 있는 사이 슈리에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저주가 있었다, 고. 이런 몸으로 지내게 된 것도 저주 때문이고, 아마 자신의 삶은 서른의 나이를 보기 전에 끝나게 될 거라고. 그것은 고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떠한 고해였다.
“에드.”
꽃들이 기울어졌다. 젖은 잎사귀들이 속살대는 소리를 냈다. 슈리에타가 말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몸이 아니었다면 네가 사라졌을 때 널 찾으러 갔을지도 몰라. 네가 그렇게 귀족을 싫어해도 삶은 기니까. 언젠가는 네가 날 두고 간 순간이 사라지지는 않아도 희석될 걸 알았겠지. 삶이 곧 죽어가는 과정이 아니었다면 나는 스무 해가 지난 오월에도 너랑 함께하는 정원 산책을 고대했을 거야. 이번 들꽃 축제가 네 기억에 오래 남길 바라지도 않았을 거고, 정원에 사과나무를 심을지 버드나무를 심을지 고민했을지도 몰라.”
“…….”
“에드먼드, 나는.”
낯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웃음이었다. 미간이 모였다.
“나는 너랑 오래 살고 싶었어.”
평소의 말투가 아니었다. 정원이 바람에 흔들렸다. 정원사는 해바라기가 일찍 피어 버린 탓에 가을이 오기 전 죄다 시들고 말 것이라고 했다. 슈리에타는 숨을 고른 뒤 곧 평소의 얼굴을 되찾았다. 에드먼드는 손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을 소원했다. 거창한 것을 바랐던 게 아니었다. 소박하고 행복하게, 조금 오래 살기만 하면 되는데. 단 한 번도 세상은 그에게 그가 바랐던 것을 준 적이 없어서. 결국 이번에도 손에 쥘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그냥 들어갈까?”
“그래서?”
말허리를 끊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손을 내밀던 슈리에타가 멈칫했다. 그가 손가락을 빼기 전 에드먼드가 손을 잡아 쥐었다.
“그런 소리 하는 걸 들어 놓고 내가 뒤돌아서 가야 하냐?”
놓치고야 말 거라면 붙잡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슈리에타 아델하이트.”
붙잡은 손이 짧게 떨렸다. 어깨가 굳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람이 멎어 고요한 정원, 커진 눈으로 올려다보는 슈리에타를 똑바로 마주한 채 에드먼드가 말했다.
“그래도 네 손은 놓지 않아.”
행복이 손 안에 쥔 모래와 같아 단단히 쥐어도 놓칠 수밖에 없다 해도. 상대의 소원도, 제 소원도 결코 완벽하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슈리에타가 눈을 깜박였다. 어쩐지 오래 전에 같은 약속을 한 것만 같은 감각이 일었다. 수천, 수만의 날과 죽음과 삶을 거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돌아온 것만 같은 기시감. 그러나 다시금, 그들은 함께 세계를 밟고 서 있었다. 슈리에타 아델하이트가 웃었다.
“좋아!”
“뭐?”
해바라기 정원이 주인의 곁에서 일렁였다. 공연의 불꽃처럼 선명하게 붉은 태양을 등지고 그가 말했다.
“에드먼드, 나는 너하고…….”
'글쓰기 > 커미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나님 커미션 작업물 (0) | 2021.05.14 |
---|---|
랭님 커미션 작업물 (0) | 2021.03.29 |
컁님 커미션 작업물 (0) | 2021.02.07 |
뷔페 커미션바 공지 (0) | 2020.12.26 |
하라치님 커미션 작업물 (0) | 2020.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