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서 환관이 떠들어 대는 바에 비해 하늘은 맑았고 오직 바람만이 거셌다. 찬울은 넓은 보폭으로 궁 앞의 뜨락을 가로질렀다. 사방의 땅을 덮은 회백색 돌이 반짝였다. 건물만 수십 채, 왕의 집이나 마찬가지인 궐에서 정무를 보는 건물들을 벗어나면 꽃이 탐스러운 나무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낮의 그림자는 짧고도 선명했다. 활보하는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존재라고는 지붕 가장자리의 작은 조각상들이 전부. 쫓아 오던 궁인이 붉은 양산을 더 높이 치켜들었다. 그들이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며 찬울은 미소 없는 낯으로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어떤 시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고귀한 혈통을 바라보는 눈길 말고, 더 부드러운 무언가를.
전각을 뒤로하고 활짝 열려 있는 목재 문을 통과하면 먼 곳에서 물 냄새가 났다. 양산의 그림자가 찬울의 어깨를 따라잡았다. 잠시 걸음을 늦추었던 차기 왕은 침착한 걸음으로 냄새를 쫓았다. 발밑에서 모래가 자박거렸다. 비처럼 속살거리는 드높은 나무들은 가는 길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연못으로 가는 구부러진 길 끝에서는 고양이 한 마리가 그를 구경하다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궁의 모든 사물은 마치 그를 위해 안배된 것들처럼 움직였다. 오직 태양의 왕을 위해 마련되어 있을 뿐, ‘남찬울’을 위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음에도. 걸음은 마침내 연잎이 가득한 못 앞에서 멎었다. 뛰어 따라온 이가 조잘거렸다.
“마마, 이보다 더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모를 것이라 여기는가.”
규율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약속 또한 없었고. 그저 마음이 동했을 뿐이었다. 금빛 잉어가 그의 앞으로 헤엄쳐 지나갔을 때, 파문이 가라앉은 수면에는 앞을 보고 있는 찬울의 얼굴이 비쳤다. 깜박임 없는 눈. 미세하게 이는 입가의 염려. 물 건너에는 여인들이 있었다. 거리가 워낙 멀어 서 있는 자리에서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모습이었다. 같은 시점, 산책을 나왔던 밤의 용은 시녀들 틈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옷깃과 옷깃 사이 공간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가능성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혼인 전 서로의 모습을 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머무는 장소 자체가 멀었다. 약속도 말도 없이 이런 식으로 마주칠 리가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두려움에 가까운 기쁨 속에서 그는 뭉치는 생각을 흩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마마,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옵니까?”
궁녀들이 묻는 소리가 아스라하게 울렸다. 용의 눈에 돌아서는 작은 인영의 모습이 담겼다. 걷는 모양새가 당당하고 여유로웠다. 물가를 따라 걷는 여인들의 모습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그가 중얼거렸다.
“아니야, 잉어를 보아서 그러하네.”
“잉어 말씀이시옵니까?”
“응. 그런데.”
윤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상처가 아물고 흉터가 되어도 아프던가?”
태양의 나라에서는 용이 인간을 굽어살폈다. 그들은 공생하면서도 각자도생하였는데, 기본적으로 용들이 소란을 피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척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경우도 드물었다. 물과 나룻배가 함께하기는 하지만 꿀물처럼 뒤섞이지는 않는 것과도 같았다. 한 국가의 왕족은 인간을 대표하여 용과 계약을 맺었고 이 계약은 으레 혼담의 형태를 띠었다. 윤서는 최초로 찬울을 만났을 적을 기억했다. 나이가 맞아야 한다는 문제도 문제였지만 대체로 용들은 인간과 혼인하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만나는 곳에서는 필연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담보는 필요했다. 나이는 적당히 어려야 했고 시키는 것에는 순응할 수 있어야 했다. 딱 맞는 인재, 아니, ‘용재’가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었다.
더 나이가 많은 황금색 용 둘이 어린 윤서를 인간의 궁까지 데리고 왔다. 그들이 도착하자 문 뒤에 선 이들이 알아서 빗장을 풀었다. 용들은 약속의 당사자를 앞세우고 뒤에서 허리를 편 채 걸었다. 검은 눈이 불안하게 주위를 살폈다. 문은 키의 두 배를 넘었고 인간들은 엄숙했다. 살짝 끌리는 옷자락의 치맛단을 쥔 채 작은 용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주의를 곤두세웠다. 인간과의 교류로서 맺는 약조 자체의 의미는 그도 이해하고 있었다. 문제는 다른 용들이 결정을 거의 떠넘기듯이 그에게 강요했다는 점이었다. 얘, 너 같은 애가 인간의 왕과 결혼한다고 하면 그건 굉장한 영광이 아니겠어? 너도 그런 대단한 일을 살면서 한 번은 해야지 않겠니? 우린 네 걱정이 돼서 그래. 이번 일이 잘 풀리면 넌 맹약의 상징이 되는 거야. 중요한 거라 안 하면 다 망해. 배려인데 안 하겠어? 할 거지? 용은 얼떨결에 대답했고 만족한 동족들은 알아서 절차를 진행했다.
약혼식은 비교적 간소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소반을 마주하고 기다리노라면 눈앞의 찻잔에서 김이 올라왔다. 궁중 악사들이 거문고와 아쟁을 연주했고 결혼할 상대와 자신 사이를 가린 천이 일렁였다. 나이 많은 용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삼의정을 마주하고 있었다. 정숙한 표정이었으나 가끔 들썩이는 어깨를 통해 한숨을 쉬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윤서는 몸을 낮추려 애쓰면서 찻잔에 입을 댔다. 누군가가 탁자의 붉은 천을 가다듬었다. 악사가 든 박이 딱 소리를 내는 순간 맞은편을 가리던 천이 걷혔다. 윤서는 곁눈질로 시선을 들었다. 뼈대가 얇은 소년의 금빛 눈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윤서는 후다닥 눈을 내리깔았다. 찻잔을 잡은 두 손이 문득 더 따뜻해졌다.
“용으로서의 품위를 보이도록 해.”
“네.”
“절대 사고 치지 마.”
“…네.”
약혼식 후, 다른 용들은 그런 당부만을 남긴 채 그를 침전에 두고 떠났다. 당시에 정말로 아무 사고를 치지 않았더라면 찬울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지 못했을 텐데. 익숙한 방으로 돌아온 성인 윤서는 기억을 흩으며 침대를 등지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겹겹이 갖춰 입은 속치마들이 풀썩 떴다가 가라앉았다. 뒤통수를 찌르는 딱딱한 감촉이 있었다. 그는 틀어 올린 머리에서 떨잠 두 개를 뽑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머리를 해 준 궁인이 보면 침울해하거나 호들갑을 떨겠지만 누우려면 어쩔 수 없었다. 산책 때까지 차려입었는데 누워서까지 불편함을 감수할 수는 또 없는 노릇이었다. 방 가장자리에서 들이친 빛이 금 장신구 위에서 산란했다. 팔을 하늘로 뻗고 손가락 사이를 관찰하던 윤서는 눈을 반 감았다.
“야시장, 좋았지.”
잘그락거리는 장신구 너머로 단호한 표정의 얼굴이 나타났다. 윤서는 얼굴에 그대로 떨어뜨릴 뻔 했던 떨잠을 간신히 잡았다.
“마마.”
어느 나라에서는 주군이 잘못을 저지르면 함께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것을 충으로 안다더니. 주변 사람들은 딱히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흙이 묻었을 수 있는 옷을 입고 머리를 그대로 침대에 들이박으면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나인은 예상을 저버리지 않고 잔소리했다. 조곤조곤한 투로 하는 말에 윤서는 조용히 일어나 앉아 두 무릎에 양 주먹을 올렸다. 꾸짖는 투도 아니고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데 어째 혼이 나는 기분이었다. 일 분 남짓 말을 하던 나인은 그 주먹을 보고는 금방 표정을 풀었다. 그는 근처에서 빗을 챙겨 들며 덧붙였다.
“마마께서 저희를 많이 신경 써 주시는 것을 압니다. 그런 만큼 마마 자신도 더 살피시옵소서. 자신의 침상과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도 중요한 일 중 하나입니다.”
궁에서 해야 하는 머리 모양은 난해했기 때문에 그 주인이 혼자 자신을 정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궁녀가 부드러운 손길로 장식을 떼고 머릿결을 빗어 내리는 동안 윤서의 시선은 방 끄트머리 화병에 닿아 있었다. 자기에는 백합이 한 송이 꽂혀 있었는데, 꽃의 모양새는 익숙했으나 더 눈에 익은 색은 따로 있었다. 자주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기억에 더 선명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갔던 야시장, 꽃가게에 마련되어 있던 검은 백합. 흰 꽃을 완벽히 까맣게 물들이려면 아주 좋은 먹물을 써야 한다고 했다. 함께 간 이가 건넨 한 송이의 꽃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었더랬다. 잠시 고민하던 윤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궁 밖은 어떠한가?”
그게 맞다 하여 존대는 쓰지 않고 있었지만, 여전히 하대는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감이 있었다. 궁녀가 일상적인 투로 대꾸했다.
“근래는 분주하여 나간 적이 없어 잘 모르나이다. 보름 전에 나간 것이 마지막인데, 열흘 붉은 꽃이 없으니 그 열닷새 사이에 또 세상이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요. 아마 이번 국혼을 대개 축하하고 있을 줄로 압니다.”
“열닷새 만에 세상이 바뀌어?”
“네, 그렇지요. 어찌 물으십니까?”
짧은 침묵. 세상은 사람보다 컸고 더 느리게 변하는 편이라고 배웠던 차였다. 정말로 두려운 것에 대해서는 물을 자신이 없었다. 그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혼례는 야시장보다 화려할까?”
“물론이죠. 야시장보다 배는 아름답고 훨씬 화려할 거랍니다.”
여전히 한없는 행복만 느낄 수는 없었던 윤서였다. 목소리를 곱씹다 보면 문득 깊은 곳에서 아득한 불안이 치밀었다. 언제나 좋은 날은 지나치게 짧았다. 사랑스러운 것들은 손아귀 틈새를 빠져나갔고 사랑하는 이와는 함께한 시간보다 떨어져 있었던 기간이 더 길었다. 다가올 결혼은 언제나 지나치게 완벽한 방식으로 묘사되곤 했다. 확신이 없었다. 다가올 미래에 틀림없이 발견하지 못한 흠이 있을 것만 같았다. 폭풍전야는 으레 고요했고 운명은 불행을 선사하기 전에 늘 지나치게 다정했다. 상대의 머릿속에서 옛날의 방식으로 간직되었을 자신이 지금의 자신과 달라 실망하지는 않을지. 피 냄새와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적이 영혼을 깎아 먹는 전장에서 자신의 존재를 잊지는 않았을지. 나인 하나가 새 의복을 갖고 들어왔고 윤서는 애써 그 방향으로 관심을 돌렸다.
같은 시간, 식을 준비하는 찬울의 마음 역시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식 전날까지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하나 있었던 것도 문제였지만, 제일 큰 문제는 윤서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았을 때 반응을 읽을 수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흉터는 보았던가? 너무 달라졌는데 혹시 이제 저를 무서워하지는 않을 것인가? 그는 상념을 쫓기 위해 상대를 처음으로 보았던 때 윤서가 어떤 표정을 지었던지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선명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얼굴까지는 분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당시 상대가 느꼈던 감정까지는 기억에서 읽어낼 수가 없었다는 의미였다. 변명하자면 할 말은 있었다. 밤의 용을 처음으로 보는 순간 들었던 세계가 깨지는 듯한 감회가 지나치게 강했던 탓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당시의 윤서도 조금은 불안해 보였던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찬울은 조금 우울해졌다.
그래도 혼례 후 야밤의 시장에 다시 나가게 되면 당시처럼 기분이 좀 더 좋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왕궁의 정원 구석에는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어린 시절의 찬울은 거기서 약혼 이후의 윤서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별빛을 받은 머리카락은 한밤중 산을 타고 흐르는 계곡처럼 검고도 아름다웠다. 떨어지는 달빛이 뺨으로 떨어져 피부를 한층 희게 물들이던 한밤. 소매에서 나던 풀 냄새를 떠올리던 그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헛기침을 했다. 문살 사이로 그림자가 움직였다. 서류를 가져오라 시켜 놓은 이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찬울은 웃음기를 지우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있는가?”
“예. 전하.”
“들어오라.”
안으로 걸음을 들인 자가 두루마리를 안은 채 묵례했다. 찬울이 물었다.
“민간에서는 근래에도 야시장이 열리는가?”
“예, 전하. 하오나 전란으로 인해 물품의 수는 줄고 간격 역시 드물어진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군. 가져오라 명한 것들은?”
“이것들이옵니다.”
“놓고 가 보도록.”
전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모든 일이 마법처럼 끝나지는 않았다. 말을 빚어 외교를 명확하게 마무리해야 매듭이 지어지는 법이었다. 뚜껑이 닫히지 않은 독으로는 벌레가 꾀기 마련. 찬울은 떨떠름한 기분을 삼키며 탁자에 놓인 두루마리를 슬쩍 밀었다. 옥으로 깎은 막대가 굴러가며 붉은 직인을 드러냈다. 인접한 더 작은 국가에서 보낸 서신이었다. 몇 자 읽기도 전에 마음이 떴다. 자간에 요구를 섞는 약속보다는 더 듣고 싶은 약속의 말이 따로 있었다. 오래전 윤서는 그에게 다시 만나면 또다시 밤하늘을 비행하자고 약조하였던 것이다.
약혼식의 밤, 뜰 중앙까지 윤서를 찾으러 나간 것은 찬울이었다. 오래 바라보고 싶어 괜한 욕심이 난 탓에 바로 말을 걸진 못했지만. 처음에는 그 자리에서 잠들어 있는 것인지 고민했던 기억이 났다. 난초가 새겨진 유리 등의 불빛들조차 사라져 물가 반딧불의 색채만 선명하던 시간이었다. 달빛이 내리는 위치로 다가가지 못하고 가만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노라니 아주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정자에서 그의 우측 곁까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소음이 멎었다. 기웃거리는 머리가 시야 가장자리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세자는 곁을 확인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녀가 그를 확인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용이 외마디 소리를 냈다.
“아.”
찬울은 자신의 흰 소매를 의식했다. 격식을 갖춘 차림새가 아니었다. 그는 귓가가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윤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약혼자? 정인? 부인? 어쩐지 단어들이 혀 위에서 죄 까끌까끌했다. 그는 틈을 벌기 위해 아예 몸을 돌리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늦게 자러 가시나요?”
“그, 그렇지요.”
윤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거리다가 재빨리 그와 같은 자세를 취해 보였다. 짧은 침묵, 윤서 쪽에서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저, 늦게 주무시나요?”
“오늘 밤은요.”
찬울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틈이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궁 근처에 장이 서는 날이라 같이 구경하러 갈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장이요?”
“네, 예쁜 물건들을 많이 파는 곳이에요. 날이 밝으면 다들 물건을 거두기 때문에 밤을 위한 행사라고도 할 수 있어요.”
더 설명을 이어 가려던 찰나 먼발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찬울은 윤서의 손을 잡고 재빨리 한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잠깐 균형을 잃었던 용은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았다. 직선의 돌다리를 건너 나무 기둥 옆에 붙어 서면 주변을 정돈하는 인원의 모습이 멀찌감치 드러났다. 이름 모를 사람들은 주변을 빗자루로 두어 번 쓸다가, 두 어린이가 서 있던 자리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쥔 손에 힘을 넣는 순간 찬울은 맥박이 뛰는 듯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는 멈칫 멈춰서 곁을 확인했다. 윤서는 눈을 크고 그의 어깨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지나치게 세게 잡은 것에 대해 사과할까 하던 찰나 용이 속닥거렸다.
“혹시.”
찬울은 그 이후 이어진 말들을 상대가 어떤 마음으로 발언하였는지 여전히 알지 못했다. 고아하고 높기만 한 용이 딱 하루 얼굴을 마주했던 약혼자에게 왜 야행을 제안한단 말인가? 마치 외롭고 기나긴 밤에 대해 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아이들은 어른보다 숨쉬기 힘든 삶을 살아 천장에 달빛이 어릴 때면 그 흔들림만으로도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어떤 대화는 꿈 위를 걷는 것처럼 손쉽게 이루어졌다. 밤의 용이기 때문에 상념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린 윤서가 말했다.
“밤 비행, 에는 관심 있으세요?”
윤서가 이번에는 손을 내밀었다. 살짝 깨문 아랫입술. 찬울은 서둘러 손을 잡았다.
“그럼요.”
덮어쓰고 갈 만한 야행용 복장의 위치는 찬울이 알았다. 그들은 간소한 흰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각자 장옷과 두루마기를 챙겼다. 다시금 마당에 섰을 때 바람은 그들 주변으로 울돌목처럼 돌았다. 윤서가 고개를 숙이고 땅을 가볍게 박차는 순간 몸이 떠올랐다. 밤이 그들을 순식간에 밀어 올리면 발밑으로 기와지붕들이 쪼그라들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인지 두려워지려던 찰나 발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닿았다. 그들은 한 손을 놓고 한 손만을 잡은 채로 움직였다. 발밑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둠이 비단으로 된 길처럼 몸을 받치는 동안 멀리서는 은하수의 허리를 베어 내려놓은 것 같은 거리가 반짝였다.
도성에는 승전고가 울렸다지만 틀림없이 어떤 집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것이었다. 키가 커진 지금은 어릴 적에 보았던 것보다 밤거리의 풍경이 비교적 작을 것이라고 찬울은 예상했다. 붉은 사탕과 오화당은 아이의 입에서보다 덜 달콤할 것이고 두루마기 따위를 덮어쓰고 걷기에는 그들의 모습이 지나치게 눈에 띌 것이었다. 오색 천을 걸어 놓은 가게들은 여전히 아름답겠지만 그 색의 수는 줄었을 것이며, 도자기를 파는 가게에서는 아이를 위한 장난감을 어른에게 주지는 않을 터였다. 여전히 눈을 감으면 그려지는 것들이 선명했다. 허리춤에서 짤랑거리는 엽전 주머니, 검은 머리카락에 대어 보던 머리빗들.
다시 펼친 두루마리에서 이웃 나라의 신하는 말의 의미를 설파했다. 국가 간 관계에 대한 신뢰는 무엇으로 보증되냐는 맥락의 이야기였는데, 이를 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빗대어 논하고 있는 것이었다. 글은 언약과 약속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약속은 말로 구성되는데, 말에는 거짓말, 헛된 말과 진솔한 말이 있다는 문구가 이어졌다. 많은 이들은 시간이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하지만 사람이 정말 시간만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을 불변하게 만드는 것은 운명이라 관계에 대한 신뢰는 이 사실을 기반으로 발굴해야만 한다. 국가의 범위에서 본다면 국가를 불변케 하려면 운명 수준의 개입이 필요하고 변화는 타국이나 다른 정세로 인해 야기될 수 있으니, 이를 고려하여 화친의 이야기를 나누길 바라는 낌새였다. 찬울은 상대가 불변을 염려하며 운명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조금은 우습다, 고, 생각했다. 그는 밤의 용을 위한 왕이었다. 용은 섭리였다. 섭리와 함께하는 국가에 서문을 보내면서 무슨 설득을 시도한 건지.
그날 밤에는 물안개가 끼었다. 싸늘한 바람이 불 적에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며 이런 밤이면 범이 내려온다는 이야기를 주워섬겼다. 연못에서부터 불어 나온 옅은 김이 잦아들 무렵, 휘영청 뜬 달이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깨어 있는 자가 거의 없는 궁에서 밖으로 걸음을 떼는 한 쌍의 발걸음이 있었다. 하나는 연못 서쪽에서, 또 하나는 동쪽에서. 가죽신은 땅에 거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마침내 익숙한 뜨락에 도착했을 때 윤서는 비어 있는 공간을 보며 어쩐지 서글픈 감상을 느꼈다. 있을 것이라 온전히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지만 이런 달밤이면 상대도 떠올리는 것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탓이었다. 발치에서 살랑거리는 풀꽃을 흩으며 그는 정자로 향했다.
어떤 건축물은 꼭 이전과 같았다. 나무 난간에 등을 대고 앉아 그는 바닥을 부드럽게 손으로 쓸었다. 그가 앉은 장소에서 달빛이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큰 떡갈나무가 하나 눈에 들어왔는데, 고목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늙은 나무는 주변에 덤불을 잔뜩 끼고 있어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약혼식이 있었던 시기에도 꼭 그렇게 서 있는 나무 뒤에 숨은 것이 있는 것 같아 기웃거리러 갔던 기억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마주친 사람이 찬울이었지만. 그는 나무가 흔들리는 사이 굳게 머무는 하나의 그림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달이 있는 방향으로 주의를 옮겼다.
“오랜만이에요.”
한 박자 뒤에야 윤서는 빛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을 돌리기도 전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옷깃에서부터 밀려 나오는 젖은 풀의 냄새. 예전보다 깊어졌지만 묻어 두었던 그리움을 긁어 부풀리는 목소리. 정자의 계단 앞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 그러나 눈가에 미세하게 어리는 떨림. 바람이 옷깃을 뒤흔들 때면 보이는 흉터들이 선명했으나 개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얼굴의 왼쪽을 그어 내린 커다란 흉이었다. 윤서는 일어나 섰다. 수천의 단어가 목을 타고 넘치려다가 가라앉았다. 바늘구멍으로 바다를 쏟아내는 일은 어려운 법이었다. 그는 입을 달싹였다가 손을 모아 쥐었다.
“그건 아프지 않아요?”
“눈을 피해 가서 괜찮았어요. 윤서는, 그간 어떻게 지냈어요?”
자못 쭈뼛거린다고까지 할 수 있을 법한 투였는데, 찬울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문제의 흉터가 생긴 것은 한 해 전의 야전에서였다. 어디에서 어떤 검이 자신을 꿰뚫을지 알 수 없는 곳이 전장이라, 밤에도 진지의 보초를 삼엄하게 하였음에도 기어코 밀려 들어온 야습이 사건을 일으켰다. 식량 창고를 향해 정예병들이 밀려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투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제 목을 날려 버리고자 칼을 휘두르는 놈의 무기를 몸을 숙여 피하며 몸통을 찌르면 피의 냄새가 오감을 마비시켰다. 손잡이를 비틀어 무기를 뽑고 바로 뒤를 향해 휘두르면 검날이 살을 찢었다. 등을 찌르려던 자를 찍어 누르는 찰나 머리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공격에 그는 미끄러지듯 물러섰다. 오가는 합, 다른 놈이 하나 더 동시에 달려들지 않았더라면 낯을 그은 흉도 생기지 않았을 터였다.
가로로 긋는 놈의 칼을 쳐내고 비스듬히 떨어지는 공격을 막아내는 내내 흘러내린 피가 눈을 뒤덮었다. 시야가 차단된 사이 밀려드는 공격에 오직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오감이 전부. 그 지독한 어둠 속에서 찬울은 자신이 사랑하는 밤을 생각했다. 떠올리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전쟁에 성전은 있을 수 없다지만 그 모든 전투는 단 하나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교전이어야만 했다. 상처의 열이 들끓는 동안 그는 정원에서 윤서와 말을 나누는 꿈을 꾸었다. 꿈의 존재가 현실에 나타난다면 반응하기 어려운 것도 당연지사. 이어질 말을 고르던 중 윤서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당신을 기다렸어요.”
“…….”
“보고 싶었거든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기다리는 동안 궁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봤어요. 주변 관리를 지시하기도 하고 제가 현판을 바꿔 달기도 했고요. 사람들하고 이야기하면서 도와줄 수 있는 일들이 있나 찾아봤어요.”
“보고 싶었어요.”
말이 터져 나왔다. 나도. 보고 싶었어요. 찬울은 숨을 삼켰다.
“다시 당신과 하늘을 걷고 싶었어요. 밤이 올 때마다. 그 생각을 하면서.”
달빛이 온 세상을 뒤덮는 때에 산책하기에는 궁이 너무 좁았다. 그들은 둘 다 그 사실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윤서가 나무 마루에서 발을 내려 신을 고쳐 신었다. 찬울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아 내려오며 용은 일전에 건넸던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밤 비행에는 관심 있으세요?”
야시장이 열리는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별 대신 달무리가 내려앉은 듯한 사방의 풍경은 고요하고 아름다웠으므로, 그들이 비행하였을 때 그 발치를 지탱한 것은 어둠이었다. 소용돌이친 물안개가 하늘로 오르는 긴 기둥을 만들었다. 적당한 고도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다시금 허공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볕 밑에서 찬란한 황금빛을 자랑하던 전각의 금박들은 비교적 흐린 빛을 발하며 반짝였다. 거리는 한산했고 검게 물든 산에서는 소쩍새가 울었다. 적막, 그러나 불안보다는 평화가 짙었다. 가장 안개가 짙게 낀 곳은 궁의 남쪽에 있는 호수 방향이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늘한 물 냄새와 흙 내음이 일행을 반겼다.
한낮은 무더웠고 들끓는 생기는 곧잘 소란을 일으켰다. 인간사를 꺼리는 용들은 분명 그로 인해 발생하는 난리를 싫어하였으나, 그러면서도 정작 낮의 용을 최상으로 치고 밤의 용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손쉽게 뛰어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자잘한 근황을 주고받았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들. 갑갑한 궁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숨통이 트였다. 그런 새장 같은 곳에서 자고 자라야 한다고 점지받은 부류가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호수 중앙에는 작은 섬이 있었다. 청둥오리나 비슷한 부류의 물새들이 주로 사는 구역이었는데, 월광에 술잔 기울이기를 좋아하는 낚시꾼들이 특히 귀애하는 장소라고들 했다. 발이 섬의 물가에 닿았다.
“사람은 없는 곳이네요.”
바람이 가라앉자 펄럭이던 옷깃 역시 내려앉았다. 윤서는 말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찬울이 답했다.
“마음에 들어요?”
“둘만의 여행을 온 것 같아요.”
“그럼, 나중에도 또 올까요?”
물결이 움직였다.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높은 곳에 뜬 구름은 달 근처에 가만히 머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천 년을 그대로 머물 것만 같은 달무리. 어떤 용들은 날카로웠고 어떤 용들은 비교적 다정했다. 야시장의 물건 중에는 화려하되 실속이 없어 지나치게 빨리 부서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비교적 수수해도 아름답고 견고한 것들도 존재했다. 윤서는 약속을 곱씹었다. 궁 내의 어떤 맹세와 요청들은 용서를 구하기 위한 껍질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상은 오직 한 쪽으로 치우쳐진 곳이 아니라서. 지형에는 고저가 있었고 덧없는 것이 있다면 불멸하는 것도 존재해야만 했다.
마주하고 서면 가슴 안이 아려 오곤 했다. 같은 장소에 서 있는데도, 분명 보고 있는데도 한없이 그리워서. 조금 더 다가가고 싶었고 손을 잡으면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온 세상에 밤도 낮도 오지 않아 모든 시간이 여명과 어스름으로 가득해진다 해도 상대와 함께한다면 낮과 밤이 다시 순환할 것 같다는 어떤 기묘한 확신. 섬 안쪽으로 걸음을 떼면 이슬이 발목을 스쳤다. 냉기는 발치에서 느껴지는데도 싱숭생숭하게 들뜨는 것은 가슴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걸음이 멎었고 그들은 풀이 누운 자리에 앉았다. 태양이 가장 높을 때 이루어질 즉위식은 꼭 태양의 나라다운 행사였으나, 그들만의 행사는 아니었다. 찬울의 손가락이 뺨에 닿은 윤서의 머리카락을 떼어 귀 뒤로 넘겼다. 눈이 마주쳤다. 밤은 언약했다.
“세상의 모든 밤을 당신과 함께 보고 싶어요.”
몸을 천천히 낮추면 꽃 무더기가 뿔을 스쳤다. 왕은 팔을 뻗었다. 작은 머리가 팔뚝에 닿았다. 침전에서부터 입고 나온 하얀 옷이 바스락거렸다. 그는 용의 머리카락이 남빛을 띠고 있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밤의 색은 본디 검정보다는 남색에 더 가깝다고 했던가.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들만이 깨닫게 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태양 볕은 지나치게 무더웠고 내리지 않는 비는 풀을 말려 죽였다. 궁은 어린 것들을 배려해 주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즉위는 근본적으로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걸음이었다. 풀벌레가 울었다. 달은 중천을 지난 지 오래. 곧 새벽이 올 것이었다. 그리하여 왕은 맹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