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깨찰빵 (봄봄, @Fallmoon_f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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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애에게 매정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번 방문자의 나이는 저택에 내가 처음 채용될 무렵과 얼추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본인이 자초하겠다는데 어쩐단 말인가? 볕이 닿는 동그란 테이블은 새까만 목재로 만들어진 탓에 반짝이질 못했다. 중앙에 놓인 도자기 주전자가 흰 김을 뿜을 때마다 그것이 깔고 앉은 받침대는 달그락거렸는데, 응접실 대용으로 쓰는 쪽방에 별다른 가구가 없었기에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무릎의 흰 앞치마 위에 손을 모으고 앉아 있기만 하자 소년이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했다.
“도와주실 거라고 들었거든요.”
“도와, 주, 준다고 한…적, 어, 없습, 니다.”
“편지도 몇 번 보내셨다면서요.”
“편지를 쓸, 자유가 이, 있다는 사실이 나의…궈, 권한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진 아, 않아요.”
피로했다. 거절이 권력에 대한 부역과는 다소 다른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납득하시키려면 그간 보아 온 것을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 생길 이득보다는 피해가 압도적으로 컸다. 저택의 주인은 나의 고용자들이었다. 근방에서 모시기에는 그들만한 자들이 드물었다. 나는 빈 잔에 차를 마저 따라 주었다. 마지막 한 잔이었던지 물줄기가 가늘고 얇았다. 저택 사용인의 친구와 친분이 있다는 사유로 섣부른 판단을 내렸던 소년은 이제 아주 울상이었다. 나는 가르침의 친절을 조금 더 발휘하기로 했다.
“말하기 저, 전 밖에 아, 아무도 없는지 화, 확인은, 했나요?”
“네?”
다음 순간 쾅쾅거리며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 난 기겁한 소년의 찻잔을 챙겨 들고 문가로 다가갔다. 문고리를 돌리자 똑같이 생긴 얼굴의 시종 둘이 동시에 읊었다.
“언제 처리되는 겁니까?”
나는 그들에게 잔 바닥을 보여주었다. 핏자국이나 별다른 색상의 변화 없이 깨끗했다. 방문자가 환자는 아니라는 점을 확인한 시종들은 곁을 지나쳐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마치 연행하듯 양 팔꿈치를 잡고 끌어내자 당황한 소년이 허우적거렸다.
“이봐요!”
그가 뭐라고 하든 그걸로 맡은 일은 끝이었다. 환자가 급증하는 마당에 갑자기 남의 저택에 쳐들어오다니. 문가에서 소년을 찾은 집사는 그가 누구 이름을 말하는지 가만히 듣다가 나를 불러 넘겨주었는데, 행동의 의미는 실상 명확했다. 시종 중에 낯선 녀석과 안면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나마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니 알아서 검역 절차를 거치도록 해라. 시키는 대로 하긴 했지만 근 일주일 사이 두 번째로 떨떠름했던 사건이었다. 시종 둘이 방문자를 밖에 냅다 던져 버리러 가는 동안, 난 다기를 챙겨 부엌으로 갔다.
콜레라와 흑사병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중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조차 칙칙한 도시에서는 수시로 기침을 토했다. 근 몇 년 사이 산업화의 물결은 사방으로 밀어닥쳐, 근로하는 자들은 종일을 일해 푼돈을 벌었으며 침대 대신 밧줄 위에서 자며 연명했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쏟아지고 거리에는 오물이 굴러다니니 바람이 늘 악취를 싣고 부는 것도 당연한 현상이었다. 불결한 공기 속에서 피가래를 뱉는 사람의 수가 점차 늘었다.
공장이 많이 돌아가는 곳에서는 시체가 밤마다 쌓이고 아이들조차 알코올을 마신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 마을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신문팔이 소년이 흉흉한 소식을 전하는 것은 매한가지라지만 더러운 공기까지 고이는 지형은 아니었으니까. 우리가 사는 곳은 도시도, 완전히 영주의 지배를 받는 중세 소작농의 마을도 아니었다. 그러니 인구 밀집도가 비교적 낮았다. 주인님들의 저택이 마을에 나름대로 녹아들고는 있다는 사실이 그를 반증했다. 그래도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문과 죽음을 아주 막을 수는 없어서, 집사장은 늘 사용인과 손님들에게 건강 상태 감별을 위한 차를 마시게 했다. 병자가 마시면 찻물이 반응해 변한다고 했다. 하녀와 하인의 외출 빈도나 행동반경도 이전보다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누군가가 밖에서 병에 걸린 채로 돌아오면 그것이 당연히 온 저택에 퍼질 것이라고 했다. 집사장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기껏 뽑은 하녀와 하인들의 줄초상을 보고 새로 모집하는 건 지나치게 번거로웠으니까. 집사장은 주인님들이나 집사 자신의 건강 관리에 대해서는 말을 줄였다. 나도, 어느 정도 알 만큼 아는 다른 아이들도 그 부분에 관해서는 함구했다. 굳이 지적하여 좋을 소재가 아니었다. 외출 통제의 사유 또한 타당했다. 며칠 전 채소 장수가 한 말을 떠올리면 외부 세계와의 완전 격리라도 필요할 것으로 느껴지는 판국이었다.
예의 채소 장수가 수상쩍은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닷새쯤 전의 일이었다. 나의 외출은 주에 한 번씩 허용되었는데, 돌아올 때는 반드시 식재료를 사 오는 것이 원칙이었다. 주인님들은 식사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같지 않았으나 우리는 저녁마다 긴 테이블에 만찬 음식을 올렸다. 대부분은 그릇에 장식되기만 한 채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방치되었고 잔반의 처리는 일하는 사람의 몫으로 남았다. 정체 모를 거미들이 수시로 빈 집을 남기는 저택에 고용된 아이들은 식은 음식 처치의 전문가들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외출한 자의 사명은 자신과 동료들을 먹여 살릴 재료를 구해 오는 것이었다.
“저택에서는 사람이 죽지 않나?”
그러나 채소 가게 주인이 그 질문을 했을 때만큼은 모두가 굶든 말든 고택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말을 더듬는 버릇 때문에 잡담 자체도 달갑지 않았다. 더하여 그의 그런 질문에 솔직히 답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평소의 무덤덤한 얼굴을 유지하며 느릿하게 응답했다.
“무, 무슨 의미로, 무, 물으시나요.”
“거, 말 더듬는 거 보게. 찔리는 거라도 있는 모양이지?”
내가 표정 변화 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채소 장수는 머쓱하게 말을 이었다.
“뭘 그렇게 쳐다볼 것까지 있나. 얼마 전부터 근처 영지에서 마녀사냥이 다시 시작되었다고 들었거든. 이 근방에서는 그런 기미 없나 싶어서 물어봤지.”
도통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택에서 사람이 죽지 않는 것과 애당초 마녀사냥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다른 지역의 이야기라고 했다. 우리와는 관련도 없는 일에 대해 왜 묻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가만히 눈을 깜박이자 말 많은 중년이 몸을 낮추며 손짓했다. 허리를 구부려 기울이면 그가 쑥덕대기 시작했다.
“부자가 되기 위해 병을 퍼뜨리는 무리가 있다더군. 다른 지역에서는 그 중심에 마녀와 마법사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요, 요즘 시대에 마녀나 마법, 법, 법사라니요.”
“허무맹랑하게 들려도 듣다 보면 타당하단 얘기가 나오고 있다니까!”
대략적인 요약을 해 보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인간이 분류되고 있는 근래의 때에 부유해지기 위해 노동자나 농부들에게 의도적으로 병을 흩뿌리는 자, 즉 마녀가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노동 인구가 줄어든다면 일할 수 있는 자의 지위와 발언권이 강해질 수 있었다. 대체 불가의 인력이 된 노동자는 가진 자에게서 더 높은 수입을 뜯어낼 수 있기에 가난한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이 계략을 꾸민 것 같다는 말이 돌았다. 이 가설이 제시되자 몇몇 지주들이 소리 높여 분개했다. 그들은 이것이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신의 이름으로 괴이한 수를 쓰는 자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이 선언이 실질적인 결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지역이 아직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일단 우리가 지내는 곳에서도 ‘마녀 병인론’은 아직 유력한 가설이 아니었다. 채소 장수는 자신이 피클 판매를 위해 근처 영지에 방문했을 무렵에나 이 소문에 대해 들었다고 했다. 듣고 있자면 그 또한 이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구석이 있는 눈치였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마녀, 마법사’와 ‘괴물’이라는 표현을 섞어 쓰다가 자꾸 문장을 정정해 댔던 것이다. 말실수에 대해 질문했을 때 그는 사과했다.
“지금 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하고 있는 건데, 사실 정확히 마녀사냥을 하자는 사람들의 진짜 의견이 뭔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그러니까, 보통은 내가 말한 것처럼 마녀니, 마법사니, 그런 것들이 돌아와서 콜레라나 흑사병을 퍼뜨리는 게 문제라고 깔끔하게 말하고 있거든. 한데 그 지역 영주님이 같은 주제에 대해 대중에게 연설했을 때는 좀 논의의 방향이 달랐어.”
“어, 어떤 시, 식이었나요.”
“과거 말살되지 않았던 이형의 존재들이 돌아왔다, 인간 사이에 숨어 인간을 연기하는 자들의 심장에 낙인을 지지라. 뭐 그런 표현이었던가…. 하여튼 병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없었단 말이네. 마치 지금이 신성 로마 제국 시대라도 되는 것처럼 말야.”
“아하.”
“뭐, 말하다 보니 굳이 자네에게 저택에 대해 질문한 건 실수였군. 마녀나 마법사는 아마 불결하고 빈민 틈새에 있는 자일 텐데, 이 지역 귀족 나리들과는 하등 관련이 없겠지. 잊어버리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일면식도 없는 제이의 친구라면서 대뜸 찾아온 것이었다. 어느 탐정 사무소 조수인 눈치였는데 실적을 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비슷하게 기자의 조수로 일하고 있는 내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상한 저택에서 일하는 내가 그의 지인이라는 걸 듣고 무작정 찾아왔다고 했다. 웬만하면 거슬리지 않았겠으나 찾아온 이유 자체가 기묘했다. 빈민이 아닌 귀족들이 의도적으로 병마를 몰고 다니고 있다는 증거를 찾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말했던 탓이었다.
방문객의 찻잔을 다 씻으면 저녁 준비 시간이었다. 나는 다른 하녀들과 함께 만찬장으로 음식을 날랐다. 뱀의 창자처럼 검고 부드러운 복도를 지나면 촛대로 주변을 밝힌 공간이 나타났다. 늘 닫혀 있던 보랏빛 벨벳 커튼은 저녁이 내린 이 시간만큼은 걷힌 채였고, 긴 창문 몇 개는 열린 채로 저녁의 서늘한 공기를 내뿜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것들은 닫힌 채 흐릿한 달빛을 받아 문양을 바닥에 흩뿌렸다. 물론 실내의 샹들리에와 벽난로 빛 때문에 유리의 색은 반쯤 일그러져 기이한 방식으로만 반짝일 따름이었다. 주인님들은 이미 앉아 계셨다.
“슈가.”
금빛 머리카락의 주인님이 말했다. 이제 그의 이름을 알았다. 파우스트였다. 그는 자신의 앞에 갈색으로 구워진 칠면조와 기름기가 흐르는 돼지고기가 놓이는 것을 보다가 건너편의 연인을 응시했다. 눈빛에 이채가 깃들었다.
“요사이 땅에 떨어진 별이 많아졌다는 소문을 들으셨더이까?”
달걀 요리를 올리고 있던 나는 무심결에 시선을 들었다. 열린 창문에서는 검은 밤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깥에는 빛이 드물어 군데군데 떨어지는 달빛이 스산한 기운을 풍겼다. 그 가운데, 정확히 그 불온하고 음침한 어둠 중앙에 빛이 있었다. 그것은 명백히 인가의 것이 아니었으나 저택의 장식 또한 아니었다. 도깨비불처럼 춤추지도, 먼지처럼 떨어지지도 않는 불씨는 핏빛으로 타오르며 종종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해졌다. 시선을 내리자 다른 방향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자네와 함께하는 만찬에 누군가가 불필요한 장식을 더한 모양이군.”
“근방에서 사람을 초로 만들며 즐기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들은 냄새만 고약하고 별빛을 지우는 데에만 쓸모가 있으니 실로 아폴론이 웃고 갈 취향이다 싶습니다만.”
“그리 말하니 옛 추억이 떠오르지 않나?”
“그 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들이 위용을 떨치는 기색이지요. 근방의 영주가 형체 다른 자들을 태우라 말하기에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드물어도 불손한 소문만큼은 널리 퍼져 있습니다.”
“질서를 위해 혼돈을 도구로 사용하니, 과연.”
“커튼을 닫으라 이를지요?”
“두게나. 즐기기에는 모자랄지언정 신경을 쓸 정도는 아니니 말이네.”
음식이 온전히 차려지면 시종들은 채워진 의자 곁에 납작한 항아리를 두었다. 검고 우묵한 도자기 안에서 누렇고 퉁퉁한 애벌레들이 꿈틀거렸다. 창에서 바람이 흘러들면 아주 흐릿하게 노린내가 풍기는 것 같았으나, 다른 시종들은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나 또한 냄새를 분명하게 맡을 뿐 지독한 불쾌감을 느끼는 편은 아니었으므로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파우스트가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포크로 찍는 손길은 느릿했으나 칼질에는 망설임이 부재했다. 고기에서 핏물이 배어 나와 흰 접시를 더럽혔다.
방의 심장부에서 타오르는 벽난로는 커튼이 부풀 때마다 흘러드는 누린내와 더불어 기묘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매캐하면서도 쌉쌀하여 가을로 돌아간 것만 같은 안락한 향기 위에 살 타는 냄새가 달라붙었다. 악취는 눅진하면서도 끈적했다. 날카롭게 베는 향도, 느리게 스며드는 내음도 아니면서 존재감만큼은 흡사 건물의 그림자처럼 거대하여 떠나지를 않는 것이었다. 한 번 숨을 들이켤 때마다 공기가 허파 내부에 오물의 분자를 덧칠했다. 그러다가 다시 숨을 내쉬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달콤한 음식과 죽은 닭의 껍질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적절한 때에 음식을 치우기 위해 벽에 가서 섰다. 옷자락이 벽지에 달라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틈새로 밤바람을 받아들였다. 한겨울, 새해를 목전에 둔 시기라 그런지 눈이 내리지 않는데도 눈송이가 발목에 달라붙는 듯 시렸다. 파우스트는 붉은 액체가 든 잔을 들었다. 와인이었던가, 싶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주인님들의 마실 것은 나와 동료들이 아니라 집사가 검토하고 다루는 영역이었다. 파우스트가 말했다.
“저택 근방에 페르세포네가 산책을 나온 것 같은 밤이네요. 이맘때의 페르세포네는 봄의 딸이 아니라 겨울의 여왕이라 문제겠습니다만. 그대와 정원에서 식사하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 채비할 수는 없겠지만, 며칠 뒤에 정말 먼 곳으로 산책을 나서 보는 건 어떠한가?”
“괜찮은가요, 페러그린?”
드물게도 의아한 기색이 파우스트의 입가를 스쳤다. 검은 머리카락의 페러그린은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고기 써는 소리만이 끊임없이 정적을 깼다. 정작 파우스트 또한 한 점도 입에 넣지 않았기에, 포크로도 다 찍히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음식은 거의 짓이겨진 상태로 칼날에 달라붙는 중이었다.
“그럼. 연말 파티에 초대받았다네.”
페러그린이 말을 마치자 파우스트는 물잔 곁에 놓여 있던 종을 흔들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내가 조용히 다가가 접시를 들었다. 먼 곳에서 페러그린의 맺히지 않는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흡사 닿은 것 같았다. 으깨진 살점을 항아리에 흘려 넣자 기다리고 있던 벌레들이 우글거리며 달라붙었다. 그것들이 죽은 동물의 육신에 게걸스럽게 구멍을 내면 벽면에 육즙이 튀었다. 난 들끓는 움직임을 지나쳐 식기를 내려놓고 느리게 물러섰다. 주인님들이 잔을 들어 붉고 끈적한 용액을 마시기 시작했다. 향취는 고기의 피 냄새에 덮여 분명하지 않았으나 술이라기에는 점성이 뚜렷했다.
그날 저녁 나의 주인님들께서는 연말 파티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논하지는 않았다. 방문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수긍과 몇 마디 가벼운 대화가 오가다가 식사가 완전히 끝났기 때문이었다. 젊은 자가 지팡이를 짚은 자를 부축하여 자리를 뜨면 음식은 시종들의 저녁을 위해 다시 운송되었다. 둥근 테이블에 모여 앉아 함께 식기를 들자 주변에 생기가 감돌았다. 다른 아이들이 떠드는 것을 듣고 있으니 주인님들 곁에 머무른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밖에서 반짝이는 거 화형식이지, 그거, 화형식!”
나보다 두어 살 어린 통통한 여자아이가 말했다. 곁에 앉은 소년이 눈을 끔벅였다.
“무슨 화형식?”
“딜런, 소문도 못 들었어? 은근히 얘기 돌던걸!”
난 조용히 빵에 잼을 바르며 들었다. 비교적 나이가 든 아이들은 저택의 분위기가 영혼에 엉겨 붙어 평소에도 침묵을 지키는 일이 많았다. 꼬마들이야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죽거나 미쳐서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생긴다 한들 그들의 천성적 활동성을 잠재우기는 어려웠다. 나처럼 말을 아끼는 성격이면 모를까. 예의 화형식 이야기에 구미가 당긴 시종들이 떠드는 양에 주목했다. 처음 말을 꺼낸 꼬마 비올레타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흐, 흐흠. 나도 전에 우유를 사러 갔을 때 들은 얘기야. 여기서 한 십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또 큰 마을 있는 거 알지? 거기서는 요새 마녀 잡기가 한창이라고 하더라.”
“마녀사냥이겠지.”
딜런이 참견하자 비올레타가 뾰족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무슨 상관이야? 그거나 이거나 똑같거든. 아무튼, 그래서 사람을 많이 잡아서 활활 태우고 있는데 최근에는 마녀 집회까지 추적하는 데 성공한 상황이래.”
“마녀 집회가 뭐야? 그런 게 있겠냐?”
“마녀 집회가 아니라 지하 조직이라는 얘기도 있더군요.”
저택 로비 관리를 맡은 쌍둥이 시중 중 하나가 말을 꺼냈다. 아닌 척 듣고 있던 청중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발화자는 영 쓸데없는 일로 다투기 직전까지 간 아이들에게 빵을 한 조각씩 건네주더니 설명을 이어 갔다.
“근방에서 ‘이형의 존재들이 돌아왔다, 그들에게 인간의 삶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마녀사냥을 부활시켜 놈들을 말살해야 한다!’ 같은 말들이 자꾸 나오고 있다는 건 다른 분들도 한 번쯤 들어 봤을 얘기지요? 우리 마을에서는 딱히 마녀사냥 같은 건 하고 있지 않지만, 비올레타 말대로 근처 마을에선 실제로 사람을 화형대에 올리기 시작했고요.”
그의 말을 들은 딜런이 끄덕였다.
“으응, 그렇지.”
“그런데 이게 마녀사냥을 위시한 지하 조직 색출 작업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불온한 사상을 가지고 지주들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해 표면상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사람을 잡아 가두고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이 돈다는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할 거면 그냥 불온하다고 잡아가면 되지 왜 마녀사냥 소리를 하면서 화형을 시키고 있는 건데? 오빠는 이런 얘기를 어떻게 알아?”
비올레타는 마녀와 마법사가 있다고 믿고 싶은 것 같았다. 그 애가 부루퉁하게 항의하자 쌍둥이 중 다른 한 명이 아예 꼬마의 입에 빵 조각을 물려 주었다. 설명해 주고 있던 그의 형제가 좌중을 시선으로 훑었다.
“다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호밀빵에 크림 스튜 한 숟가락을 얹으면서 찾아왔던 소년에 대해 생각했다. 귀족들이 병을 퍼뜨리고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했었다. 그러니까 일반 시민이 아니라, 귀족들이 진정으로 그릇되고 삿된 존재이며 자신들의 더러움을 숨기기 위해 도리어 일반 시민을 범인으로 몰고 있는 것 같다는 이론을 세웠던 모양이었다. 그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굳이 나를 찾아온 것이고. 로비를 담당하는 쌍둥이 시종은 그 녀석을 마지막으로 끌고 나갔었다. 어디에서 정보를 얻었는지 알 것 같았다.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 있는 사안이었으나, 저택 밖에서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도 분명했다. 물론 주인님들은 귀찮게 병을 뿌리고 다닐 분들은 아니었고, 귀족과 평민의 위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구태여 마녀사냥을 부추길 분들도 아니었다. 시종들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으신다지만 유행을 따르겠다고 불구덩이에 하나씩 던져 넣을 성향도 아니실 터였다. 바깥의 일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 척 연기하며 저택 안에서 봉쇄를 유지한다면 이번 일도 조용히 지나갈 법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신경이 쓰였다.
일차적으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 때문에 이 문제를 그대로 흘려보내기 어려웠다. 사람은 본디 모순을 피하고 싶어 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어떠한 두 가지 명제가 상충하면 한 가지가 거짓이라고 믿어 버리거나, 하나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거나, 자신의 신념을 꺾어 버리는 식으로 어떻게든 대처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나 또한 그런 경향성이 아예 없는 생물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마녀사냥이 불온한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마녀의 혐의를 뒤집어씌우려는 수작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정말로 저주받은 존재를 죽이기 위해 시작된 일이라고 말했다. 전자가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을 텐데 또 그렇게 결론짓기엔 걸리는 구석이 많았다.
이차적으로는 작금의 상황이 나와 주인님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에 문제가 되었다. 죽음, 피, 악마, 멸절, 질병, 불온함, 혼돈, 권세, 빈민, 괴물. 내가 그분들을 걱정함은 필연 주제넘은 일이겠으나, 걱정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것들은 우리의 삶에서 덜어내려야 덜어낼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크든 작든, 좋든 싫든 아주 가까운 곳에서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아예 관심을 끄고 있기도 어려운 법이었다. 우리의…그러니까…. 이성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에서 개입하고 싶다는 갈망이 올라왔다. 해결까지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난 식사가 끝난 뒤에는 제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 통 썼다.
“걔가 그렇게 갈 줄 몰랐다. 미안.”
며칠 뒤, 내 외출 날에 맞추어 대화를 나누러 온 제이는 첫마디를 그렇게 뗐다. 나는 찻잔을 입에 대며 중얼거렸다.
“바보들 보, 보는 데는 이, 익숙하니까 괜차, 괜찮아.”
어김없이 날이 흐렸음에도 싸구려 노천카페에는 사람이 많았다. 소음이 커질수록 대화를 묻기 좋았다. 제이는 잔을 들어 입을 가리면서 말을 꺼냈다.
“아무튼, 내가 널 찾아온 걔가 누군지 설명해 주면 기삿거리 하나 주겠다고?”
“응.”
“왜?”
“알면 아, 안심될 것 가, 같아서.”
“신기하네. 못 보던 사이에 점점 더 메마른 인간이 되는 것 같더니만 그건 아니다, 이거냐?”
“제이. 본론.”
제이는 헛기침을 하더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짚었다.
“반 부르주아 지하 조직에 대해선 들어 봤어?”
“응.”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일단 요새 도는 마녀사냥의 복귀 얘긴 알지? 그걸 지지하는 세력 중에는 실제로 마녀가 존재한다고 믿는 파가 확실히 있어.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반부르주아 지하 조직 같은 걸 척살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기 좋으니까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고. 두 입장 모두 실존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는 잠시 기다리다가 주변 신사들이 삿대질하며 싸우기 시작한 이후에야 말을 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까 지하 조직 쪽에서도 요새 난리가 났대. 그쪽에서는 대체로 마녀의 존재를 믿기보다는, 부자들이 자기네를 척살하기 위해서 이 마녀사냥 건을 제시했다고들 생각해. 오히려 부자들이 콜레라나 흑사병을 빈민들에게 퍼뜨리고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 뭐든 근거를 찾으려고 탐정을 고용하고 있는 것 같아.”
“나, 나한테 찾아온 애, 애도 그렇게 고요, 고용된 탐정의 조, 조수인가?”
“아마 그렇지? 근데 뭐, 우리 지역 탐정들은 변변한 증거를 못 찾고 공치기나 하니까 다른 지역의 유명한 탐정한테 일 다 뺏기기 직전이라더라.”
탐정 조수의 정보 접근 방식을 곱씹자니 일을 뺏길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단조로운 표정을 유지하면서 물었다.
“그 유명한 타, 탐정이 누, 누군데?”
“있어, 오스본 씨라고. 구마니 귀신이니 하는 문제에 미쳐서 조사 성과가 남들보다 잘 나온다더라? 머리카락도 희끗희끗한 갈색이라서 딱 어떻게 생겼다고 설명하긴 어렵고. 알 하나 달린 안경 쓰고 다니는데 이것도 뭐, 한두 명이 쓰고 다니나….”
“으응.”
“아무튼, 그래서. 주겠다는 정보는 뭐냐?”
나는 그에게 피고용인들이 사용하는 건강 지도 사본을 넘겨주고 돌아왔다. 마을의 형태만 잡힌 백지도에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곳을 점으로 표기하고 질병의 전파 추정 경로까지 대략적으로 기재해 놓은 물건이었다. 외출할 때 병을 옮기 쉬운 곳에 방문하지 말고, 오염된 물을 떠 오지 말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그림이었는데 저택의 시종들은 이것을 꼭 베껴서 가지고 다녀야 했다. 전파 추정 경로에 기반해, 우리 마을의 질병은 위생 문제로 인해 자연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까지 내리자 제이는 영 아쉬운 기색으로 입맛을 다셨다.
적당히 만족하고 돌아왔을 때 저택은 묘하게 분주했다. 식재료를 가져다 놓고 손을 씻는 동안에도 평소와는 다르게 재료를 챙기러 오는 동료들이 없었다. 난 로비로 나와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저택 한 편의 마구간에서는 말 돌보는 아이가 동물의 등에 끈을 맸고, 어떤 아이들은 옷을 들고 끊임없이 2층과 1층 사이를 오르내렸다. 바쁘게 움직이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나를 발견한 집사장이 손짓했다. 그는 계단 위에 있었다. 다가가서 공손히 서자 그는 내 키를 가늠해 보는 것처럼 시선을 움직이더니 창백한 입술을 달싹였다.
“오늘 저녁 높으신 분들께서 연회에 참석하실 예정이네. 무도회장에서 필요한 것을 챙겨 드리는 일을 맡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들께서 연말 파티에 대해 언급했던 저녁이 떠올랐다. 집사장은 저택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있으니 적당히 근무 이력이 있고 마침 눈에 띄는 사람에게 일을 시켰겠거니 했다. 문제는 내가 연회 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지점이었다. 집사장이 자리를 떴다. 이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있는 사이 작은 딜런이 다가와 손을 잡아끌었다.
“누나, 옷 입고 준비하래.”
눈썹을 올려 보이자 딜런이 콧대를 올리며 추가로 설명했다.
“역시 내가 설명하러 와 주길 잘했지? 메이드용 드레스 입고 따라갔다 오기만 하면 된대. 근데 저택에 있는 드레스가 맞을 법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누나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그러더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는 제이가 말한 ‘다른 지역의 유명한 탐정’에 관해 다른 녀석들에게 좀 더 물어보고 주의하라고 당부할 계획이었으나, 지금처럼 분주한 가운데 화제를 꺼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 급하지 않으니 다녀와서 대화를 나누어도 될 일이었다. 나를 굳이 기다렸다는 점은 의외였지만 의아함 또한 이후의 번잡한 준비 절차 속에서 흐려졌다. 마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는 달려야 도착하는 곳에 연회의 초대장을 보낸 저택이 있다고 했다. 정확히 어디 있는 곳인지, 누가 사는 곳인지도 불명확했다. 만일 내가 마부 역을 맡아야 하는 상황이었더라면 아마 동이 틀 때까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주인님들은 완연한 밤이 되었을 때 저택을 나섰다. 지팡이를 짚은 페러그린이 늙고 사악한 뱀처럼 천천히 로비를 가로지를 때 곁에서 파우스트가 어깨를 부축했다. 나는 그들의 뒤에서 트렁크 가방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겼다. 뜨락의 어둠 속으로 들어서자 그제야 밤보다 검은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에서 저택의 문이 내뿜는 빛이 서서히 가늘어지는 동안 나는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 마차의 문을 열었다.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고 있으면 파우스트가 먼저 탄 뒤 페러그린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서 서늘한 향수 냄새가 났다. 혹은 향수가 아니라 옷자락이 일으킨 실바람의 내음이었을지도 몰랐다.
문을 닫고 마부석에 올라섰을 때 옆자리에는 자주 보지 못한 얼굴이 하나 앉아 있었다. 마부의 얼굴은 주인님들이나 집사장의 것처럼 창백해 보였는데, 그것이 단순한 착각인지 아니면 정말인지는 주변이 어려워 불명확했다. 저택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래 몇 년 정도가 흐른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부와 대화를 나눈 적은 상당히 드물었다. 그는 내가 트렁크를 안고 타는 것을 보다가 고삐를 쥐었다. 검은 말 네 마리가 부드럽게 발을 굴렀다. 발굽의 소음 사이로 마부가 조언했다.
“도착하기 전에 향수를 꺼내서 마차와 나와 당신 옷자락에 뿌려요.”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의 바퀴는 잘 포장된 도로 위에서 우아하게 미끄러졌다. 등 뒤에서 이따금 목소리가 들렸는데, 의미를 정확하게 분간하기는 어려웠으나 아마 주인님들께서 서로 긴히 나눌 말이 있으시려니 했다. 바람이 반시의 비명처럼 귓가를 스치는 가운데 어떤 음성은 교활하니 속살거리는 투로 이어졌고 또 어떤 단어는 따뜻하되 절제된 음색으로 흘러나왔다. 폭군과 악마가 그들의 계약에 대해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꼭 같은 부류의 사람 아닌 자들이 지옥에 대해 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마차가 마을을 벗어날 무렵 나는 트렁크를 열었다.
안에는 정체불명의 꾸러미 몇 개와 더불어 우아하게 생긴 향수병 하나가 들어 있었다. 스포이트 형태의 동그란 주머니가 달린 제품이었다. 난 그것을 들어 머리 위에서 두 번 주머니를 쥐어짰다. 누를 때마다 분사된 미립자가 머리카락을 스쳐 마차에 흩뿌려졌다. 흰 레이스가 어깨와 치맛자락 아래에 달린, 검고 치렁치렁한 드레스에도 향수가 뿌려졌고 마부의 옷깃에도 묻었다. 작업을 마친 뒤에는 물건을 도로 집어넣었는데 그때까지도 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에 남아 있던 냄새마저 완전히 없앤 것만 같았다.
마차는 늘 넓은 길을 탔으나 우리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항상 인적이 드물었다. 인기척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앞서 달리는 마차나 행인이 보인 적은 없었다. 오직 창을 밝히는 등불과 방향 모를 곳에서 들려 오는 바퀴 소리만이 우리가 실존하는 길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종종 불가피하게 속도가 느려질 때마다 마차 안에서는 미행이나 악타이온의 저주 이야기가 들려 왔다. 소음에 문장이 끊기고 단어가 불명확하여 온전히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시간이 비었으므로 달빛에 취한 것처럼 제이에게 들은 이야기를 꺼낸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마부는 조용히 경청했다. 구름이 몰려왔다가 걷히기를 몇 차례, 마침내 말들이 한 건물 앞에서 멈췄다.
“마차는 여기에서 대기하고 있겠어요.”
마부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내렸다. 문을 열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파우스트가 먼저 땅을 딛었다. 밤과는 도통 어울리지는 않는 금발의 미남은 황색 장식이 달린 토가 형태의 의복에 짙푸른 망토로 몸을 감싼 채였다. 근래의 무도회에서도 그리스식 옷차림을 자주 취하는지는 의문이었으나 흡사 로마의 황제가 그 옷을 입고 나타난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 내리는 페러그린은 옆머리를 땋은 채 검고 고풍스러운 문양이 수 놓인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분명 미인의 얼굴이었으나, 언제나처럼 시선을 거두면 순식간에 인상이 머릿속에서 흐려졌다.
마차의 문을 닫고 뒤따라가면 앞에 펼쳐진 것은 분명 하나의 성이었다. 그것은 주인님들의 저택보다 조금 더 컸고 지붕이 뾰족하게 높았는데 곳곳에 박혀 있는 가고일의 머리도 눈에 띄었다. 넓은 정원에서 앙상한 과실수가 몸을 떨었고 남아 있는 상록수는 바람이 불 때마다 미지의 언어로 속삭였다. 마차가 적절한 곳에 정차했던 덕에 주인님들은 금방 문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치 모양의 입구로 들어서면 공기가 순식간에 온난해지며 빛이 주변을 감쌌다. 나는 문득 바닥의 이상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앞쪽에서 페러그린이 속삭였다.
“듣게, 예상대로 불청객이 따라왔네.”
그가 짚는 지팡이가 나른하고 느릿하게 돌바닥을 찍었다. 걸음이 멈추자 파우스트가 미소 짓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모이라이는 노래를 뮤즈에게 맡깁니다. 편히 머무시지요, 슈가.”
그들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난 고개를 숙였다. 움직여도 굳게 선 인영이 뒤에서 말했다.
“본인은 본인의 주인을 모시는 시종이오.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려고 그리 보시오?”
나는 몸을 반 돌렸다. 시야의 가장자리에 어느 남자의 모습이 걸렸다. 그는 일부가 희게 센 갈색 머리의 소유자였으며 한 눈에는 모노클을 끼고 있었다. 차림새는 어딘가에 있을 법한 집사를 닮았으되 분명 내가 모시는 집사장과는 모습이 달랐다. 분명 따지는 투로 캐묻는 문장이었으나 목소리에 기이한 환희가 머물렀다. 그의 커다란 눈이 페러그린과 파우스트를 똑바로 응시했다. 한 걸음 다가서면 그의 몸에서 시취와도 같은 역한 내가 올라왔다. 탄내가 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페러그린을 모사하듯 속삭였다.
“그대들은 물에 뜰 것인가, 가라앉을 텐가? 불로 지지면 비명을 지르겠는가, 아니면 타지 않겠는가? 이미 여기에 무엇이 차려져 있는지 알게 되었으니 그대들은 나를 막을 수 없소이다. 얼굴을 기억하며 그대들이 떠나온 곳 또한 알고 있으니, 부디 오늘 밤을 즐기시오!”
남자는 말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을 탐하는 자처럼 게걸스럽게 입을 놀렸다. 파우스트가 여유 있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오스본인가?”
그가 말했다. 페러그린이 연인의 목소리에 맞춰 고개를 기울였다.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현기증이 일었다. 실로 기이하기 짝이 없는 감각이었다. 직전까지 정신이 누군가의 꼭두각시처럼 휘둘리고 있다가 이제야 이성이 돌아온 것 같은, 형용하기 어려운 그 느낌이란. 오스본은 이러한 변화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떠나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그렇소.”
“어리석은 짓을 하는구나. 무엇을 위해서지?”
“그대들이 모를 리 없을 터인데, 아름다움을 위해서요.”
그가 보이지 않는 성물을 떠받드는 것처럼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한 손의 끝은 파우스트를, 다른 손은 페러그린을 향했다. 그는 흡사 광인과도 같은 얼굴로 지껄였다. 목소리는 온유하고 침착하였으나 시선은 그 누구도 보지 못하는 환영에 닿아 있는 것만 같았다.
“몇 달 전, 동료의 처형을 최초로 목격했을 때 난 최초의 희열을 느꼈소. 삶은 죽음을 향한 여정이니, 단 한 순간 생명의 모든 것을 불사르며 피어오르는 죽음은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다오. 사건 이후 나는 그와 같은, 그보다 더한 천상의 미학을 즐기고 싶어 노력하였으나 평범한 사람의 죽음을 반복하여 지켜보는 것에는 질려 버리고야 말았지.”
그가 말하는 동안, 나는 내부의 연회 음식들과 사물 배치가 독특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핑거 푸드보다는 고기가 들어간 음식이 많았고 음료가 특히 많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이 으깬 자주벌레 빛깔 혹은 붉은 황토색을 띠었고 구석에는 통이 하나씩 자리했다. 마침 페러그린이 손짓했고, 나는 가방을 세워 그의 의자가 될 수 있게 비치했다. 가까이서 본 그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머무르고 있었다. 떨어진 곳에서 오스본의 입술이 말했다.
“어리석은 자들은 사람의 형상을 취한 이형의 영혼 따위는 중세 이후로 사라졌다고 믿더군.”
“너는 아니라는 것이고.”
“내 앞에 당장 천상의 불길을 태울 장작들이 있는데 어떻게 달리 믿겠소?”
“그리고 그 죄를 그리도 기쁘게 시인하는구나. 여기에서 말이야.”
“선수를 치면 누구도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더군. 언제나 그러하였지. 동료를 밀고하여 화형대에 올리면 올릴수록 나의 평판은 높아지고 내가 본디 무엇을 탐구하는 자인지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소이다. 이번이라고 다르겠소?”
남자는 가장 가까운 곳에 놓여 있던 붉은 푸딩을 움켜쥐어 낚아채더니 내 손에 쑤셔 넣으려 하기 시작했다. 주먹을 쥐려 하자 손가락 사이로 물컹한 점액이 밀려들었다. 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것은 푸딩이 아니었다. 질척이는 핏덩이가 철벅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뿌리치려는데 사내가 소리쳤다.
“여기에 인간이 있으니 가져다 치우시오!”
시종들이 다가왔다. 나는 굳은 듯이 서 있었다. 대처는 그들이 한 발 더 빨랐다. 한 쌍의 시종이 오스본을 제압하더니 복도 깊은 곳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사위를 울리는 추접스러운 고함 속에서 페러그린이 내게 몸을 기울였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디저트 만드는 시종들에게 부탁하면 손 씻을 물을 줄 걸세. 원하면 구경하다 와도 좋다만 향수는 머리에 한 번 더 뿌리게. 돌아갈 때까지 가방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거든.”
파우스트가 페러그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함께해 주실지요, 그대?”
“영광이네.”
지팡이를 짚은 주인님이 부축받아 무도회장 중앙으로 나아가는 동안 나는 깨끗한 손으로 트렁크를 고쳐 들었다. 오스본을 끌고 간 자들은 무도회장 입구 근처에 마련된 간이 칸막이 너머로 사라졌다. 그들을 따라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자면 주인님들이 자세를 잡고 서는 모습이 보였다. 악단의 연주가 멈추자 페러그린이 파우스트에게 깊게 기댔다. 칸막이 너머에서는 시종들이 오스본의 입에 쇠꼬챙이 따위를 쑤셔 넣고 있었다. 울컥 쏟아지는 피와 함께 성대가 망가진 인간이 쌕쌕대며 울부짖었다.
그들은 발치에 작은 북이 설치된 의자에 인간을 앉힌 뒤 사지를 가구에 고정했다. 보아하니 밑면에는 바퀴도 달려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강한 악력에 붙잡힌 팔다리가 핀셋에 눌린 곤충의 몸처럼 경련했다. 중앙에 머리가 나올 수 있는 구멍이 뚫린 상자가 몸 전체에 씌워졌다. 검은 벨벳이 상자를 두르고 있었기에 피가 줄줄 새는 와중에도 색깔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았다. 두 명의 작업자는 반으로 나뉜 모양의 접시를 한 쌍 들고 칼라처럼 장착시켰다. 목도리도마뱀 모습으로 변한 인간이 버둥거릴 때마다 북이 둥둥 울렸다.
마침 현악기 연주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들이 혀를 자르고 도끼로 머리뼈를 가르는 동안 주인님들의 춤을 감상했다. 그들은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된 인간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찬란했다. 머리 위에서 거대한 샹들리에가 눈이 아플 정도로 새하얀 빛을 뿜었다. 광채가 반사되어 빛나는 대리석 홀은 흡사 대낮의 정원처럼 밝았다. 춤추는 자들이 걸음을 뗄 때마다 얼어붙은 호수처럼 맑은 바닥이 움직이는 이들의 상을 담았다. 페러그린이 파우스트의 발등에 자신의 신코를 올리고 있었다. 그가 연인이 이끄는 대로 일렁였다.
시종들은 마침내 피로 만든 퐁듀 분수 같은 무언가를 그대로 밀고 무도회장으로 들어섰다. 웨이터가 황금 티스푼을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손님들은 싱싱한 뇌를 떠서 입에 담았다가, 음미한 뒤 찌꺼기를 마련되어 있던 타구에 뱉었다. 상자 속에서 북이 울리며 콰르텟의 연주에 박자를 맞췄다. 나는 돌아가려는 시종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손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손 씻는 물을 그릇에 담아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석류까지 하나 제공했다.
실로 화려한 정경이었다. 나는 머리카락과 손목에 향수를 다시 뿌리고 벽에 서서 연인의 춤을 구경했다. 연주가 고조되면 파우스트와 페러그린이 빙글 돌았다. 둘씩 모인 이들이 움직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공간은 흡사 궁궐과도 같이 넓었으며 얼음으로 만든 조각상이 반짝이며 사방에서 분위기를 냈다. 나는 석류를 반으로 쪼개 세 알을 입에 넣었다. 농밀한 과일의 향기가 코로 밀려들었다. 개인적으로 평하자면 화형식보다는 춤이 더 좋은 구경이었다. 적어도 이것은 이 밤이 끝날 때까지 영원할 아름다움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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