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것처럼 세상이 돌았다. 하퍼는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수면제에 취한 사람들이 곧잘 자해를 통해 수마를 쫓아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으나, 당장은 그런 방법을 쓸 수 없었다. 두 명이 수행하는 작전에서 그런 식으로 동행인의 짐이 되어서야 곤란한 법이었다. 그는 무너져 내리는 벽에 등을 대고 발치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다이어 중사. 괜찮아?”
특히 곁에 어린애 하나를 끼고 있으면서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보고 배우면 안 될 일이었으니까. 하퍼는 엷은 웃음소리와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하…이 정도면 멀쩡하지 않습니까? 전략 속행하겠습니다.”
“작전 수행에 차질이 생길 상태라면 보고해.”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명백히 찜찜해 보이는 기색으로 가득했다. 검은 눈썹은 머지않아 미간에 붙을 것 같았으며 동공은 평소보다도 더 수축한 상태였다. 평소에는 올라가 있는 눈가마저 미묘하게 내려와 있는 그 낯이란. 군인이 되어서 그렇게 뚜렷하게 기분이 드러나는 표정이라니, 상대답긴 했다.
순간적으로 목 안에서 간지럽게 웃음이 끓었다. 하퍼는 총을 고쳐 들면서 그간의 계획을 복기하려 했다. 그들은 이번 도시 탈환 계획의 핵심 인력으로서 서쪽 공터까지 크리처를 몰고 오는 업무를 맡았다. 크리처 무리가 쪼개지는 사단이 발생했으나, 원래 계획이라는 게 틀어지라고 있는 것이니 큰 걸림돌은 아니었다. 다소 빠르게 라이를 쓰는 바람에 쓰러져 잠들기 직전의 상태까지 몰렸다는 것도, 뭐, 나름대로 수습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그러나 웃고 싶었던 기분은 제노의 이어지는 행보에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동행인의 상태를 슬쩍 확인한 제9사단 중령은 괴물들이 모여 있는 공터로 직행했다. 그의 무겁고 뚜렷한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크리처 무리가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제노를 발견한 그것들의 아가리에서 붉은 타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벽에 등을 대고 있던 하퍼는 귓가에 손을 댔다. 통신 단말의 전파가 지직거렸다.
“중령님, 돌아오세요.”
“어리광은 밤에나 부려 줘, 중사.”
공터의 부서진 거울 파편에 제노 스펜서의 얼굴이 반사되어 담겼다. 검게 변한 공막이 유리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이 휘몰아칠 때 도시에서는 짙은 먼지의 냄새가 났다. 나부끼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며 하퍼는 벽을 짚었다. 혼자 둘 수는 없었다. 외치는 목소리가 바람보다 뚜렷한 음색으로 주변에 메아리쳤다.
“나한테 이까짓 놈들이야 별것도 아니거든!”
크리처가 휘어진 발톱을 날렸다. 제노의 머리 방향이었다. 같은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어쩌면 아예 흐르기를 멈췄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하퍼는 걸음을 내디뎠다. 유리에 맺혀 있던 검은 머리 남자의 상에 피가 묻었다. 두 사람이 갈긴 총에 맞은 크리처가 무너질 때 제노의 팔에서도 피가 흘렀다.
기어코 상처를 입었음에도 제노 스펜서는 돌아보지 않았다. 총구를 내린 하퍼가 비틀거리며 선 뒤에야 몸을 돌려 안부를 물었을 따름이었다. 패널티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하퍼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광경 때문인지 현실감이 없었다. 산발적으로 향취와 과거의 정경이 머리를 채웠다. 피 냄새, 제노 스펜서의 시신, 그의 꿈, 주사기에 담긴 903-4.
다가오는 제노를 보면서 하퍼는 문득 생각했다. 역시. 당신의 완벽한 죽음을 향한 갈망은 건재하구나.
***
군은 도시 내에 진지를 꾸렸다. 치료와 주변 정리가 일단락되고 수습이 끝나자 제노가 하퍼를 불렀다.
“다이어 중사, 나 좀 보지.”
하퍼는 자신을 부르는 상대를 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나 갸웃 기울여 보이고 있노라니 제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래. 누굴 부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하…바로 임무라도 나갑니까? 이러다가 골로 가면 곤란한데….”
“임무 말고. 다른 급한 일.”
임무 의의 급한 일이라면 무엇이길래. 결혼이나 미래 계획 얘기라도 시작할 작정이라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대놓고 이야기를 나눴다가는 소문만 날 게 뻔했다. 설마하니 그런 얘기를 꺼내고자 대놓고 부른 것은 아니겠지만. 하퍼의 손목을 냅다 잡은 제노는 근방에서 흘끔거리는 다른 대원들을 향해 소리를 쳤다.
“할 일들 해!”
비밀 연애에 대한 남자친구의 희망 사항을 존중해 주는 건 알겠는데. 평소 태도와 그리 잘 맞지도 않으니 수상쩍기만 한 고함이었다. 하퍼는 멋쩍게 웃으며 제노의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따로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야영지의 숙소 방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멀어질수록 어쩐지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은 묘한 감각이 일었다. 얼마간 앞서가려고 걸음을 서두르던 제노가 우뚝 멈춰 섰다. 그는 하퍼의 길을 막고 서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어떤 얘기 하는 거예요, 여보?”
“아까부터 말이 없잖아.”
그게 아까 말한 ‘급한 일’인 걸까. 괜한 웃음이 샜다. 하퍼는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숙이라는 의미에서 손짓했다. 제노가 몸을 기울이자 그는 상대의 뺨에 입술을 눌러 붙였다. 맞닿은 살갗 위로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퍼는 의도적인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제노는 그대로 고장 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뻔한 말 돌리기였다. 그러나 당장 진실에 대해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사람은 한 명이 아니지 않았던가. 상대가 결국 어울려 주고야 말 것이라는 추정 속에서 하퍼는 아직 기울어져 있는 목에 팔을 걸었다. 이마가 부드럽게 부딪혔다. 제노의 눈을 마주하는 한 쌍의 눈매가 웃음으로 휘어졌다. 속삭일 때면 숨결이 상대의 입술에 닿는 거리였다.
“어때요, 이제는 말하고 있지요?”
“그게…그렇긴 한데….”
하퍼의 입술이 연인의 것에 포개졌다가 떨어졌다. 찰나의 정적, 제노의 팔이 상대의 허리에 감기면서 재차 입술이 붙었다. 하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천천히 내리감았다. 입이 벌어지면서 저 좋을 대로 밀고 들어오는 혀가 안에 있던 살을 짓눌렀다. 그것은 볼 안쪽의 점막을 헤집고 혀 밑의 여린 살을 들쑤셨다. 어깨가 짧게 떨리면서 생리적인 침음성이 샜다.
“으음….”
목에 감긴 팔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멈칫했던 제노는 도리어 손으로 허리를 감싸 쥐면서 입천장을 따라 혀를 미끄러뜨렸다. 단단하고 뜨거운 살이 목구멍 언저리를 짓누르자 재차 긁는 신음이 튀었다. 하퍼는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받아 감고 느릿하게 빨기 시작했다. 내부의 공간이 수축하며 깊은 곳에서부터 선명한 물소리가 일었다.
목과 뺨으로 열이 올라왔다. 허리에 닿아 있던 제노의 손길이 등줄기를 타고 느릿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가 날개뼈를 지분거릴 적에 하퍼는 헐떡이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닿는 곳이 죄 타는 것처럼 저린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누가 올 수도 있는 장소에서 계속하기는 곤란할 수도 있는 작업이었다. 그가 빠져나가려는 것처럼 허리를 뒤척이는 찰나 혀가 내부의 젖은 구석을 찔러들었다.
“…….”
하퍼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려면 약간의 집중이 필요했다. 상대는 사랑스러울 정도로 제멋대로였으므로, 당장은 몰입하며 넘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검은 머리카락 틈새로 파고들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을 섞고 있을 적이면 서로를 속속들이 알게 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고독으로 점철되어 제정신으로는 도통 감당하기 힘든 삶이라는 것 밑에서 타인의 온기는 유일하게 슬픔을 덜어 줄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고통은 경감할 수 있는 것이지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인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으므로. 몸을 붙인다고 해도 살갗마저 없애지는 못해 영혼과 영혼 사이 장벽이 남기 때문에. 하퍼는 제노에게 기대는 대신 그를 끌어당기면서, 하퍼가 그의 연인을 아는 것과 같이 제노도 저를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에는 책임이 타르처럼 달라붙었다. 오래전부터 영웅 되는 자들은 훌륭히 명을 다함으로써 고결성을 쟁취하였다. 그것은 숭고해야만 한 자에게 부과되는 책무였다. 죽음으로써 그들은 전설이 되었고, 의무를 수행하였고, 영원히 완전하게 남았다. 제노 스펜서는 여전히 완벽한 죽음을 원했다.
보호받은 것들은 그 보호자의 삶을 영원히 지고 살아야만 했다. 그들이 헛되이 죽는다면 저를 보호한 희생자의 투자 역시 의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곧잘 스스로 보호자의 전철을 밟았으며 상실이 자성自成예언과 같이 찾아올 것을 두렵게 생각했다. 하퍼 다이어는 어린 연인에게 기대지 않았다.
하퍼는 재차, 자신이 저의 연인을 아는 것과 같이 그의 연인 또한 하퍼 자신을 알 것이라고 여겼다. 아마도. 입을 맞출 적에 그들은 서로에게 진실하였으나 같은 입으로 상대를 기만하였다. 그것은 의도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상흔 때문에 발생하는, 실로 본능적인 소통의 방식이었다.
그리하여 중요한 문제는 어느 도시 밑에서 산다는 악어와 같이 입맞춤 밑으로 사라지고야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수가 적어진 이유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아서. 얄팍하게 덮어 놓은 바를 헤집어 엎고 싶지 않아 입맞춤을 선택했다고 해도. 그 온기마저 무익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가?
불이 붙기 전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공포는 아닐 것이었다. 불씨가 크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주인님이 곁에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귀 끝이 내려갔다.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던 허슈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면서 곁을 돌아보더니, 다시 밭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람들이 횃불을 들자 긴 그림자가 죽은 초목 위로 드리워졌다. 지역의 자작이 허슈에게 설명했다.
"마침 좋을 때 나와 주셨습니다. 밭에 있는 해충의 알이나 유충을 태우기 위해 농지에 불을 붙이는 중입니다. 풍년도 기원할 수 있죠.“
일하는 모습을 소백작에게 보여줄 수 있어 제법 뿌듯한 기색이었다. 마론의 꼬리가 느리게 부풀었다. 허슈가 말했다.
"좋은 기원 방식입니다."
"마저 보고 가시겠습니까?"
"오래 탈 것 같으니 쉴 만한 곳에 들어가 구경할까 합니다."
"들판이 보일 만한 곳이라면 이 근방에선 평민들 여관 정도입니다만…."
"평민의 생활을 잠시 경험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이쪽으로.“
봄을 목전에 둔 계절은 살을 엘 듯이 서늘했다. 허슈가 주변 영지를 돌아보고 다른 귀족들과 교제할 필요가 있었던 탓에 그들은 근방 자작의 관장 지역까지 나온 참이었다. 눈이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만 둘러봐도 흰 둔덕이 수북했다. 으레 들불이 쉽게 이는 계절은 봄이었다. 겨울에 이런 종류의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은 당연히 예상 밖의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불을 붙였다. 들불이 그리 빠르게 번지지 않는데도 마론의 뺨에 열기가 올라왔다. 죽은 풀로 뒤덮인 밭은 이미 폐허와도 같은 잿빛이었고 지나치게 넓었다. 기다리는 말들이 콧김을 내뿜었다. 목소리가 먼 곳에서 울렸다. 두어 걸음 앞에 선 허슈가 몸으로 시야를 가린 채 손을 내밀었다. 마론의 눈에 초점이 들어왔다. 그의 주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렀다.
"자아, 마론, 이리 온.“
어째서 그 목소리는 그렇게도 다정한지. 버팀목이 되기에는 이렇게 정신이 나약할 때 그의 허슈는 왜 그리도 ‘온전한 것인지’. 그럴 수는 없었다. 같은 것을 알아차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론은 손을 잡았다. 제대로 된 집사 노릇을 해야 했다. 할 수 있었다. 그는 허슈를 마차로 인도해 들인 뒤 바로 맞은편에 앉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풍성한 꼬리가 허리에 감기듯이 말렸다.
사용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 알고 있었다. 밭이 불타오르며 화염의 빛이 마차 안까지 들이쳤다. 마부가 고삐를 쥐었다. 달리는 바퀴가 새하얀 길에 한 쌍의 평행선을 그렸다. 마론은 밖을 보지 않았다. 허슈를 인도해 들인 이후로도 놓지 못한 손이 가늘게 떨렸다. 소백작은 마차의 창을 닫고 잡은 것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여기. 곁에 앉아도 좋아.“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른 채 마론은 아이처럼 불렀다.
”주인님.“
허슈는 답하는 대신 팔을 벌렸다. 마론은 곧바로 그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면 옷깃에서는 뚜렷한 라벤더 향이 났다. 기분이 나빴다. 먼 곳에서는 재의 냄새, 가까운 곳에서는 도저히 지워버릴 수 없는 꽃의 내음. 참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끓어오르다가 겨울 공기에 부딪히며 짓눌렸다. 맥박이 내달렸다. 내려간 한 쌍의 귀가 떨리며 주인의 뺨을 스쳤다.
”…주인님.“
허슈의 옷은 섬세한 금실로 장식되어 있었고 의복은 녹아내리는 눈송이처럼 부드러웠다. 아름다움 자체를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만의 신을 곁에 둔 신자라면 마땅히 숭상하는 자를 믿고 따라야 할 터인데. 화염이 겨울의 끝을 향해 내달리는 거대한 업화와 같이 일어났다. 그것을 등지고 달리는 마차에서 마론은 허슈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닿아 있는데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소백작을 원하는 자들이 지나치게 여럿이었다. 남들이 볼 줄 아는 것이 겉껍데기뿐이라고 해도 그랬다. 꽃내음이 코끝을 짙게 스치자 진정으로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 치밀었다. 사람이 놓은 불길이 곧 온 밭을 덮을 것이었다. 곤충의 몸이 산 채로 익고 둥지가 녹아내리는 동안 그것은 한참을 타오르며 살아 있는 존재를 남기지 않으리라. 허슈가 사용인의 등에 부드럽게 팔을 감았다.
”마론, 여기 봐.“
마차가 흔들렸다. 마론이 고개를 들었다. 벌어진 입술이 그의 것에 가까워졌다. 절대 닿지는 않고 오직 초대에 응하기를 기다리듯이. 솜털을 스치는 숨이 온난했다. 사람의 얼굴을 한 신이 전하는 무언의 요구에 신자는 복종했다. 마론의 혀가 틈새로 미끄러져 입천장을 짓이겼다. 그것은 갈구였다. 허슈의 팔이 그의 목에 감기며 무게중심이 변화했다. 사용인의 손이 기대 오는 주인의 허리를 받쳤다.
온기 어린 겨울, 주인을 만난 초겨울. 그대로 되감아 늦가을과 잊을 수 없는 여름을 스치고, 아카데미에 입학한 봄을 지나 그 귀족의 손을 잡기 이전, 더 먼 과거를 되짚어 보자면…화재와 함께 마론에게서 사라진 것은 핍박자뿐만이 아니었다. 불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허슈는 당장 그가 쥔 모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랑스럽되 연약하고 외로운 신이 모든 죄를 사해 주려 한들 근원에 자리한 두려움이 사라질 수는 없었다.
안으로 들어간 살이 목구멍 근처의 여린 점막을 쑤셨다. 맞닿은 몸에서 신음이 샜다. 마론은 집요하게 깊고 내밀한 부위를 헤집다가 내부를 훑어 올렸다. 허슈가 가는 떨림과 함께 느릿하게 그의 움직임을 받아냈다. 그가 빨아들일 때마다 깊은 곳에서 물소리가 일었다. 단단해진 혀에 입 안 점막이 달라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흘러든 타액이 목구멍으로 넘쳐 들어가자 아래에서부터 컥컥거리는 신음이 샜다. 마론은 상대의 뺨을 잡고 부드럽게 애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포개지는 입술 탓에 혀가 더 내밀한 부위까지 미끄러져 들어갔다.
젖은 소리가 귀 안에서 선명했다. 한 손으로는 목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뺨을 쥔 사용인은 주인을 욕망했다. 부족했다. 놓칠 것 같았다. 입술 사이로 액체가 흘러 허슈의 턱이 젖었다. 그의 떨리던 눈가가 느릿하게 감길 즈음 가슴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가 육신 사이 공간을 채웠다. 달아오른 얼굴의 허슈가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자 손가락이 머리카락 아래 숨겨진 목덜미를 헤집었다. 찌르는 것 같기도 했고 그러쥐는 것 같기도 했다. 눌린 옷이 바스락거렸다.
”으응….“
마차가 번화가로 접어들며 밖에서부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맥박 소리가 커졌다. 어떤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또, 애초에 그들의 관계에 있어 주인의 것과 사용인의 것을 구분하는 행태는 무의하지 않았던가? 허슈의 목 안에서 웅얼거리는 침음이 가늘게 샜다. 마론은 상대의 풀린 눈을 응시하며 치열을 따라 마찰하고 혀 아래를 들쑤시듯 건드렸다. 배덕감이 일었다. 은밀한 자리를 찔린 상대가 바르르 떨었다가 몸을 더 기울였다.
허슈는 꼭 이런 순간이면 소백작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마론의 주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더 달가운 사람처럼 굴었다. 그리고 아마 그 몸짓에 거짓은 없을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테니까. 적어도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마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입술이 떨어지며 맑은 액이 사이로 흘러내렸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마론은 손수건을 꺼내 허슈의 얼굴을 닦아 주고는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