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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깨찰빵 (봄봄, @Fallmoon_full)

타입: 키스 커미션

이용 가능 범위: 본 커미션 작업물의 내용은 신청자 본인에 한하여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 -비영리-변경금지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백호소연커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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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깨찰빵 (봄봄, @Fallmoon_full)

타입: 키스 커미션

이용 가능 범위: 본 커미션 작업물의 내용은 신청자 본인에 한하여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 -비영리-변경금지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한겨울의 오키나와를 생각하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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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에서 상향 조정된 가격과 정리된 샘플이 반영된 리뉴얼 글 커미션 안내 페이지입니다. 외부에 홍보하기 전 타임라인 내에서 먼저 커미션 슬롯을 받는 방식으로 커미션을 운영하며, 후불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봄봄@Fallmoon_Full / 여름벌레@angelightbug 의 2차 지인까지만 받는 것을 일반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타입은 2019년도 즈음부터 고정적으로 두 가지만을 운영합니다. 전반적으로 오마카세 방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해당 커미션 유형의 특성을 이해하고 선호하시는 경우에만 신청을 권장드려요. 자료를 전달한 이후에만 신청 및 예약된 것으로 간주하여 슬롯에 추가합니다.
 
만일 부득이한 사정 (ex. 손목 염좌 등으로 인한 작업의 어려움 발생 등) 으로 작업 기한이 연장될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 커미션 작성자 측에서 사전에 기한 조율을 여쭙습니다. 후불제이기 때문에 별도 환불 규정은 없으며, 기한을 넘기는 경우 바로 연락 주시면 커미션을 취소하실 수 있습니다. 자료 전달 당일 취소에 한해 100% 환불이 가능하며, 이후에는 단순 변심으로 인한 환불 처리는 어렵습니다. 문의는 정말 널널하게 받고 있으니 궁금한 점이 있다면 편하게 알려주세요. 작성된 커미션은 변형 없이 / 저작자 표시가 된다는 전제 하에 굿즈(책자 인쇄) 용으로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Type 1. 키스 커미션
15000원 / 슬롯 0  / 마감기한 2주 / 분량 A5 4장 +


키스 커미션이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희망 시 폭력 소재로 변경하거나 키스 + 폭력 소재를 모두 추가하여 커미션을 요청하실 수 있습니다. 줄간격 180으로 설정하여 한글 파일에서 작업한 뒤, 온라인에서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문단과 문단 사이에 엔터를 넣는 방식으로 작업하곤 합니다. 작업 이후에 엔터를 추가하기 때문에 원하신다면 제거해 드릴 수 있습니다. PDF 문서와 PNG 판본을 함께 제공합니다. 기본적으로 1차 캐릭터(자캐) 페어를 대상으로 작업하나, 인원이 미달되거나 초과되는 경우 상황에 따라 조율 가능하오니 별도 문의 부탁드립니다.
 
작업 방식
자료 수령 > 작업 > 1차 퇴고만 거친 뒤 확인 검수 > 최종 퇴고 후 작업물 전달
 
입금은 작업물 전달 직후에 해 주셔도, 확인 검수 직후에 해 주셔도 됩니다. 마감기한은 자료를 받은 일자를 기준으로 +2주(14일)로 계산합니다. 간략하게 원하는 소재, 장면 정도를 캐릭터들과 함께 제공해 주시면 작성해 드립니다. 폭력성 / 선정성 수위 기준은 15세 수위 정도로 설정하는 편이므로 원하지 않으실 경우 사전에 언질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샘플 확인 시에도 이 점 유념해 주세요!
 
샘플

 

 

 
Type 2. 단편 커미션 (뷔페 커미션바)
50,000원(+) / 슬롯 0 / 마감기한 1개월 / 분량 A4 6장 +

 

분량이 A4 6장 이상이라는 점만 명시되어 있는 자유 양식 단편 커미션입니다. 추가하시고자 하는 소재나 내용을 자유롭게 언급해 주시면 최대한 반영되도록 작성하여 제공합니다. 최종 전달 시  PDF 문서와 PNG 판본을 함께 제공합니다. 기본적으로 1차 캐릭터(자캐) 페어를 대상으로 작업하나, 인원이 미달되거나 초과되는 경우 상황에 따라 조율 가능하오니 별도 문의 부탁드립니다.
 
작업 방식
자료 수령 > 플롯 간단 검수(스킵 가능) > 작업 > 1차 퇴고 거친 뒤 확인 검수 > 최종 퇴고 후 작업물 전달
 
입금은 작업물 전달 직후에 해 주셔도, 확인 검수 직후에 해 주셔도 됩니다. 마감기한은 대개 자료를 받은 일자를 기준으로 +1개월(30~31일)로 계산합니다. 2월이 끼는 경우나 천재지변의 경우에는 가급적 사전에 마감 일자 조율을 진행합니다. 플롯 검토의 경우 원하시는 경우 진행하실 수 있으나, 오마카세 방식이 더 즐거우신 경우에는 넘기셔도 괜찮습니다. 확인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하여 추가금이 붙지는 않습니다.
 
한 장~반 장 정도가 추가되는 경우에는 비용 변화 없이 그대로 작업하며, 작성 중 오버퀄리티가 되는 경우에도 당연히 추가금을 받지 않습니다. 해당 분량 이상의 증량을 희망하시는 경우 A4 기준 장당 8000원이 추가금으로 붙습니다. 최대 6페이지(최종 분량 12쪽)까지만 추가하실 수 있습니다. 만일 12페이지까지 작성하였음에도 작성자 임의로 추가해야 하는 분량이 나온다면 역시 당연히 추가금을 받지 않습니다. 반 페이지 정도 늘어나는 것으로는 가격을 더 받지 않기 때문에 한 페이지 더 얹는 정도로는 굳이 증량을 신청하지 않으셔도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샘플
1) 조건 : 모브 추가, 키스 추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https://magicfall.tistory.com/75

 

가늠님 커미션 작업물

작성자: 깨찰빵 (봄봄, @Fallmoon_full) 타입: 단편 커미션 이용 가능 범위: 본 커미션 작업물의 내용은 신청자 본인에 한하여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라이선스에 따라 이

magicfall.tistory.com

 

2) 조건 : 1인칭 관찰자, 고딕 호러, 연말 파티

<탄신> https://magicfall.tistory.com/77

 

유수님 커미션 작업물

작성자: 깨찰빵 (봄봄, @Fallmoon_full) 타입: 단편 커미션 (뷔페 커미션바) 이용 가능 범위: 본 커미션 작업물의 내용은 신청자 본인에 한하여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라이

magicfall.tistory.com

 

 

모브 추가, 작성 시점 지정(1인칭 주인공, 1인칭 관찰자, 전지적 작가 시점 등), 장르 지정, 사건 지정, 들어갔으면 하는 문장 일부 지정 모두 가능합니다. 수위의 경우 전체연령가부터 19금까지 작성 가능하나, 19금만을 위한 단편 커미션은 작성하지 않으며 성인가 커미션 요청 시 신청자는 성인이어야 합니다.
 
 
 
상세 문의는 1차 지인 본계 DM, @Samhain_Nanna (공계) DM, 혹은 다음의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으로 주시면 최대한 빠르게 답변드리겠습니다. 오픈카톡은 다음과 같습니다. https://open.kakao.com/o/sf7WIm4b

게릴라성으로 열리는 신청용 오픈카톡은 따로 있으니 2차 분들은 1차 지인 통해서 받아주세요!

다른 것 이전에 신청해 주시는 분들이 커미션을 받고 기분이 좋으셨으면 좋겠어요. 꼭!!!! 샘플을 확인해 주시고 글의 특성을 확인하시어 마음에 드시는 경우에만 신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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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깨찰빵 (봄봄, @Fallmoon_full)

타입: 키스 커미션

이용 가능 범위: 본 커미션 작업물의 내용은 신청자 본인에 한하여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재업 가능!

 

 

 

호우주의보.pdf
0.11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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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부터는 상반기 / 하반기 나눠서 정리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부분 캡쳐 방식으로 올려 두었습니다만 옛날 글이란 정말 끔찍한 것이로군요.... 

 

 

2012 (10/16)

 

 


 

2013 (8/4)

 

 


 

 

2014 (12/6)

 

 

 

 

2015 (10/5)

 

 

 


 

 

2016 (11/20)

 

여기서부터 접은글로 들어갑니다.

 

더보기
염매
 
 
 
 
 
 그들이 대문 안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누가 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부주의한 소음이 너무 많았다. 바퀴가 자갈을 짓누르면서 나는 소리. 무수히 많은 소리 조각들이 서로 얽히면서 텁텁한 음색이 만들어졌다. 소음은 커지다가 끊겼고 시동이 꺼지고 나서야 차가 조용해졌다. 보지 않아도 귀를 통해 그들의 모든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핸드브레이크를 당기고, 뭐라 안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 조용해지고. 그들의 발이 흙에 닿았다. 작은 자박거림이 들렸다. 자동차 문이 닫혔다. 쾅. 그 소리는 언제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계세요?"
 
 남자였다. 남자'들'인지는 몰라도 한 사람 이상이 남자라는 건 확실했다. 심장이 귓가에서 뛰기 시작했다. 목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건 겁에 질린 산짐승들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불안감과 그에 따른 반응은 맹수가 그들을 덮치기 전에 초식 동물들이 재빨리 도망갈 수 있게 도움을 주었으리라. 내 몸도 똑같은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도망가지 못했다. 손목이나 발목을 묶고 있는 것은 없었다. 목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계세요? 하고 물었다. 대문 밖에서 낸 목소리였다. 나는 방 안에 있었다. 심장이 다시 천천히 뛰는 듯 했다가, 다시 맥박이 빨라졌다. '놈들'이 그런 식으로 나를 부를 리 없었다. 놈들은 내가 항상 여기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대개 낮에 찾아오는 일이 없긴 했지만, 왔더라면 뭐라 말하는 대신 곧바로 나를 찾아 방으로 들어왔을 거였다.
 
 집에는 쥐새끼들이 많았다. 대체로는 생쥐였다. 고양이를 한 마리 데려와야겠어. 잡게. 놈들은 말했지만 정작 정말로 고양이를 데려온 적은 없었다. 요즘 고양이들이 쥐를 잡을 줄 아나. 다들 사료만 먹는 걸. 그 때 언급되는 요즘 고양이라는 동물이 정말 쥐를 잡는 법을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다 핑계일 뿐인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한 번도 고양이를 키워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현대 문명으로부터 정말 떨어진 곳에 살았다. 외부와 소통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내게 있는 정보라고는 놈들이 던지는 자질구레한 것들이 전부. 어머니로부터의 교육 덕에 전달받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러나 어쩌랴. 다른 방법이 없는 걸. 어쩌면 요즘 고양이들도 쥐를 잡고 주인에게 보은이라고 그 시체를 밀어주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내 세계에 들어온 짐승이 아니었다.
 
 살쾡이는 좀 있었다. 삵들이 밤에 마당으로 내려와 툇마루 아래의 쥐들을 물어 갔다. 삵을 죽이라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놈들은 그 짐승을 싫어했다. 삵의 형형한 눈. 그림자가 묻은 듯이 얼룩덜룩한 가죽. 굶주려 날렵해진 몸.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밤에 그 눈을 보면 도깨비불 같기도 했고 반딧불이 같기도 했다. 혼자 있는 밤이 거의 없기는 했지만 혼자 있을 때 가끔 그 짐승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보호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쥐새끼들이 내 몸 위로 올라가 기어다니지 않게 살펴 주는 것 같아서. 물론 실제로는 아니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았다.
 
 사실 사람들이 오는 것보다는 녀석이 있는 편이 나았다. 찾아오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
 
 "죽이진 마. 살쾡이를 죽이면 골치가 아파져. 대신 집 안으로 들이지도 마."
 
 그들이 마당 안으로 들어왔는지 발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대문 위에 걸린 깃발이 펄럭였다. 이 집에도 천왕기가 있었다. 대문에 꽂혀 있는 것이었다. 집은 전반적으로 낡은 기와집의 형태였는데, 집을 빙 두른 돌담과 나무 대문 모두 옛 집의 모양이었다. 밖에서만 보면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던 양반집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놓고 정작 안에는 건물이 별로 없었다. 대략 세 채 정도. 하나는 내가 묵는 세 칸짜리 집이었고, 신을 모시는 곳이 하나 있었고, 남은 하나는 손님들을 위한 거였다. 거기에 측간 따로. 애초에 꽤 오래된 집이었다. 나름 부엌에는 전기 밥솥이 있었으며 화장실은 수세식이었다.
 
 "안 계세요?"
 
 그들이 들어왔다면 아마 내가 있는 건물까지 이어지는 길을 보았을 것이었다. 길 비슷한 빈 공간 한 줄을 제외한 곳에는 작고 붉은 꽃들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잡초도, 작은 잡목도 없었다. 오로지 붉은색 뿐이었다. 바람이 불 때 꽃들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누군가는 방울뱀의 꼬리 소리 같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냥 바람 소리라고 했다. 그 누구도 내가 듣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발소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는 삵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나는 문을 열었다. 밖에는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내게는 그들이 정확히 뭘 하러 왔는지 꿰뚫어 볼 만한 신성력은 없었다. 그건 내 분야가 아니었다. 그들은 꽃들이 얼기설기 피어 있는 마당 한가운데에 있었다. 세 사람 정도는 설 수 있을 흙길에 나란히 선 상태. 퍽 묘한 장면이었다. 이 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멈춰 서서 나를 찾을 리가 없는 이들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점 좀 보려고 왔는데요."
 "죄송하지만 개인적인 영업은 하지 않습니다."
 
 문을 닫을 때 손이 떨렸다. 밖에서 그들이 무어라 수근거라다 돌아갔다. 정확하게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앉았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조금 속이 쓰렸다. 내게 삵을 쫓아내라고 말한 사람들은 그 짐승을 싫어했지만 나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방바닥이 찼다.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문살 틈으로 햇빛이 들어와 방 중앙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이부자리를 비추었다. 한 쪽에는 병풍, 방석과 앉은뱅이 책상.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자개함.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중앙에 놓인 것이 영영 치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면 이 방은 창기의 방이었다.
 
 그들이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말소리도. 나는 귀가 좋은 편이었다. 어떡하죠? 대답을 안 하는데요. 내일 또 오면 돼. 다음에 오자. 이거 알고 보면 생사람 잡는 거 아니에요? 야, 특종이라는 게 어떻게 잡히는 건지 아냐? 머릿속에서 울리던 목소리들이 사그라들었다. 바퀴자국이 남겠구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산 밑까지 비를 들고 가서 자국을 쓸어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햇빛이 짙은 빛을 띠었다. 밥을 짓거나 씻을 준비를 해야 할 거였다. 그러나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밤이 오려면 시간이 꽤 남았다는 걸 알았지만 해질녘은 본디 순식간에 찾아왔다. 괜찮을 거라고 느리적대다 보면 준비도 채 하지 못하고 밤을 맞이해야만 했다. 내 시선이 바닥의 햇빛 줄기에 와 닿았다. 아직 밝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러 극장에 한 번 다녀왔었다. 나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꼬마 여주인공이 나왔다. 이름이 치히로라고 했다. 치히로의 가족은 차를 타고 갔다. 차는 어떤 굴 앞에서 멈춰 섰다. 그들은 어둠을 가르고 굴 너머로 갔고 아이의 부모님들은 가판대의 음식들을 먹고 싶은 대로 먹기 시작했다. 치히로는 다리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누군가를 만났다. 그 누군가가 치히로에게 말했다. 
 
 가.
 
 밤이 떨어지고 홍등가에 불이 켜졌다. 치히로는 돼지가 된 부모를 뒤로 하고 물가에 앉아 웅크려 앉은 채 울었다. 소녀의 몸이 점차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어둠에 먹혀 가면서.
 
 나도 어둠 속에 있었다. 그러나 나를 여기서 꺼내 줄 소년은 오지 않았다. 나는 몸을 뒤척였다. 살갗 위에서 이불이 부스럭거렸다. 곁에 있던 따듯하고 물컹한 것이 몸에 닿았다. 나는 움찔했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숨소리가 들렸다. 가까웠다. 내 것이 아닌 머리카락이 뺨에 닿았다. 나는 베개에 머리를 묻은 채 가만히 있었다. 내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세상과 단절된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 거의 한 번도 자르지 않아 길이가 상당히 길었다.
 
 "바퀴 자국이 있던데."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맨살에 손이 닿았다. 나는 헛웃음 소리를 냈다. 조용히.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어요."
 "그래?"
 
 그가 손에 힘을 주었다.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말을 할 수 있게 된 건 잠시 후였다. 속삭임으로.
 
 "살쾡이가 와서 쫓아냈는데."
 "그래?"
 
 그가 손에서 힘을 풀어냈다. 일그러졌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조용히 숨소리를 다듬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들렸다.
 
 "그 놈들이 돌아올 것 같아?"
 "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발소리가 들리다가 중간에 끊겼다. 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번엔 망설임 없이 내가 문을 열어젖혔다. 두 남자 중 한 사람만이 마당에 있었다. 멀리서 시동이 꺼지지 않은 차가 털털거리고 있었다. 마당에 있는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손끝이 붉은 꽃송이 하나에 닿기 직전이었다. 나는 눈을 날카롭게 떴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꽃은 건드리지 마세요."
 
 그는 멋쩍게 허리를 펴고 섰다. 중얼거리면서.
 
 "아, 그. 죄송합니다."
 "사주 같은 거 보지 않는데 무슨 일로 다시 오셨어요?"
 
 그들이 떠나고 나서 사흘 가량이 지난 날이었다. 이번에는 문을 닫아버리지 않아서인지, 왜 왔냐고 물어서인지 상대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내 웃어 보였다.
 
 "삼고초려라고 하는데 세 번은 와야죠."
 "그래요? 그럼 지금 안 봐도 또 오시겠네요."
 "그렇다고 쫓아내시려고요?"
 
 뭘까, 이건.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돌렸다. 상처를 숨길 수 있는 방향으로. 어젯밤에 친절치 못한 손님이 찾아오는 바람에 목에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남자는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멀리서 차의 시동이 꺼졌고 누군가가 가까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틀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마당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목 괜찮으세요?"
 
 내가 그를 보았다. 그 순간 목을 잘못된 방향으로 돌렸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동료는 대문간에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이 뒤늦게 나왔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 버린 고갯짓과는 정 반대로.
 
 "괜찮아요."
 "혹시 지금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
 "목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정말 괜찮습니다."
 "아뇨, 다른 겁니다."
 
 가까이 다가와 봤자 그들에게 좋은 것은 없었다. 기껏 밀어내 줬건만 왜 다가올까, 왜. 쓸 만한 흥미로운 것들은 세상에 차고 넘쳤다. 굳이 이런 궁벽한 곳까지 들어오지 않아도 그들이 찾아갈 수 있는 무당 또한 많을 것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려다가 말았다. 전날 밤에 맞아서 입 안이 헐어 있었다. 상처 때문에 입술을 달싹거릴 때마다 통증이 느껴지는 판이었다.
 
 "혹시 집에 다른 분들 계십니까?"
 "아니요."
 "들어가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나는 망설였다. 왜요, 라고 되물으면 더 이상하게 보일까. 침묵하고 있는 중에 상대가 말을 꺼냈다.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네?"
 
 이번에는 상대 쪽에서 말이 없었다. 속이 하얗게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의 말이 불이 되어 가슴에 내려앉았고 불이 지나간 자리는 차게 식었다. 불안했다. 무슨 제보. 뭐. 맞은 상처에 대해서는 아직 그들에게 설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 일도 없어요, 따위 소리를 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을 알았다.
 
 살쾡이는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들어오세요."
 
 그들은 제보에 대해 설명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맞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기자였다. 가정 폭력은 차고 넘치는데 왜 내 사건이 기사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가 의문이었다. 아무도 제보를 하지 않는 작은 신문사 사람들이라도 되나. 그러나 대개 작은 신문사라면 자극적인 기사를 원하기 마련이었다. 어느 산골의 무당이 맞고 산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특종은커녕 대단한 관심거리도 되지 못할 거였다. 최소한, 저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사건이 파국으로 치닫고 제가 죽어버리기 전까지 제 이야기는 별 볼 일 없는 것에 불과했다.
 
 물론, 그들이 실제로 들은 이야기가 단순 폭력 사건 이상의 것이라면 몰라도.
 
 누가 제보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아마 밤손님들 중 하나일 것이리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가 그런 짓을 했을지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날 위해 제보를 해 주지 않았을까 싶은 사람은 어제 나를 그렇게 죽도록 팬 인간이었다. 물론 그는 그 때 술에 취해 있었다. 그래도 그랬다.
 
 얌전히 듣고 있노라니 결론은 하나로 나왔다. 도와주고 싶다.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기타 등등. 나는 상처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나를 때린 사람은 내가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기야 밤손님으로 찾아오는 이 곳의 '신도들'은 언제나 얼굴 없는 그림자들이었다. 내게는. 어머니는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어머니의 개. 반면 나는 그들보다 서열이 낮았고.
 
 그는 새벽에 찾아왔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도들은 대개 번듯한 직장이 다들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삶 속으로 돌아갔다. 취한 그 남자는 내게 나가자고 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 된다고 했다. 당연히. 마당으로 나가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거니와 그 이상, 그러니까 사립문 밖을 나서는 건 허용되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는 울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내가 여기에 아직도 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처럼 굴었다. 조금은 우스운 일이었다. 태양이 동쪽에서 뜬다는 것 때문에 우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그리고 그가 나를 쳤다. 나를 구해 준 것은 갈 채비를 마치고 있던 다른 신도들이었다. 구해줬다, 는 단어를 쓰고 싶지는 않지만. 상처에 약을 발라 주고 그를 막긴 했으니까.
 
 그의 이름과 얼굴은 몰랐지만 그의 목소리는 익숙했었다. 취한 그. 그 만취자가 그렇게 행동했다는 건 따지고 보면 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숨을 골랐다.
 
 "폭력 아니에요."
 
 이 사건이 가시화된다고 해서 바뀔 것은 없었다. 제보자를 역기소나 하겠지. 그들이 낮게 말했다.
 
 "협조해주지 않으셨을 때 손해보시는 건 본인이십니다."
 
 그 말이 순간 속을 뒤집어 놓았다. 손해? 누가? 협조하지 않았을 때 제가 손해를 본다면, 협조했을 때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단순한 말이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새 기삿거리가 고프겠지. 그리고 이게 기사가 된다면 내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겠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정작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물론 없었다.
 
 오만. 그런 발언은 대체 어떻게 나오는 걸까. 그들이 입을 다문 걸로 봐서 말실수를 했다는 건 인지한 듯 했다. 그러나 속을 끓게 하는 건 그들이 취조를 하는 것처럼 말을 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들이 나를 도와 줄 수 있다는 듯이. 내가 협조적으로 나오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듯이. 그들은 꽃길만 밟고 살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 사람들의 생이 다 힘들다는 거야 알았다. 아는데,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있단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힌트나 드릴까. 그걸 물 줄은 알까.
 
 "에이즈가 어떻게 감염되는지 아세요?"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리긴 했을 거였다. 그들은 잠시 말이 없었다. 둘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수혈 아닙니까?"
 
 잠시 침묵이 돌았다. 말뜻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을까, 아니면 이 사람이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어 하고 있을까. 내가 말했다.
 
 "나중에 와 주세요."
 
 틀린 말은 아닐 거였다. 아마. 그들이 맞겠지. 나는 거의 배운 것 자체가 없으니까. 어쨌거나 소통은 실패한 상태였다. 무슨 말을 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 그들이 나갔다. 나는 웅크려 앉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엔 그 쓸데없는 농담 하지 마."
 "왜요?"
 "우리는 특종을 찾으러 온 거지 놀러 온 게 아니야."
 
 누군가 그런 얘기를 했었다. 나에게.
 
 ―사람들은 한 번도 환상의 세계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 이성이 어쩌고 현실이 어쩌고 다들 말이 많은데, 왜 환상이 현실에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다들 더 자극적이고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좋아해. 다만 주의할 점, 타인의 고통은 소비되더라도 내 고통은 소비되면 안 돼. 신문은 새로운 세상의 판타지 소설이 되었고 활자 너머 이세계와 독자의 세계는 철저하게 분리됐어. 이야기는 너무 자극적이어서도 너무 무난해도 안 돼. 현실같은 판타지. 그러나 내 곁에서는 일어나는 일이 아닐 것. 원칙을 어긴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설령 전해지는 내용이 사실이라도 그래. 철저할 것, 아무도 믿지 않을 것, 죽음을 생각할 것.
 
 어머니가 그랬던가.
 
 그날 밤 살쾡이가 마루 밑에서 뛰쳐나왔다. 입에는 쥐를 물고 있었다. 그 소리에 놀란 몇몇 사람들은 소리를 쳤고, 이내 그 정체를 알고 나자 욕지거리가 따라붙었다. 짐승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 봐."
 
 어둠 속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문을 보고 있었다. 달빛이 창호지에 엷고 하얀 빛을 뿌리는 게 보였다. 그렇지만 문도 닫혀 있는 방, 달빛만으로는 상대의 얼굴을 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왔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요."
 
 손님이 적은 밤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했고 내가 누구의 딸일까를 생각했다. 어머니도 이런 밤들을 보냈을까. 그러나 알긴 알았다. 그 사람과 내 삶은 달랐다. 어머니가 일류 기생이라면 나는 창기. 무당과 무당의 딸로, 우리는 똑같은 천민이었으나 세대가 바뀌는 과정에서 그 질은 나락으로 추락해 버린 상태였다. 아마 씨가 문제려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손길이 턱을 그러쥐었다.
 
 "고양이겠지."
 "너무 많아요."
 "난 아무 것도 안 들려.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닥쳐."
 
 사실 울음소리는 매일 들리는 것이었다. 그게 살쾡이가 아니라는 것도,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는 것도 이미 다 알긴 알았다. 잠시 조용했다. 곁에 있는 사람이 몸을 뒤척였다. 부스럭거림.
 
 어머니는 짧은 생을 살다가 돌아가셨다. 신도들이 어머니의 시체를 수습했다. 자살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남들은 자살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자연사는 아니었을 거였다. 그럴 나이가 아니셨으니까. 병도 없었다. 어머니는 용한 무당이었다. 괴이한 신도들을 꾀어들인다는 게 유일한 문제였다. 어쩌면 타살일 수도 있었다. 아니, 자살일지라도 그건 여전히 타살로 분류되어야 할 수도 있었다. 자신이 끌어들인 신도들 가운데서 어머니는 천천히 미쳐 가고 있었다.
 
 정확하게 그들과 무슨 일을 했는지, 그런 건 아는 바가 없다. 분명한 건 어머니가 죽기 전부터 염매는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거였다. 염매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아기 귀신을 만드는 과정이었는데. 우선 아이를 납치하거나 어쩌거나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듯 했다. 우선 아이를 큰 항아리 따위에 넣고, 작은 구멍을 통해 매일 죽지 않을 정도로만 감주 따위를 먹여 한동안 연명시켰다. 아이가 말라 비틀어져 체구가 충분히 작아지면, 그들은 먹을 것이 잔뜩 담긴 바구니를 놓고 애를 그 앞에 두곤 했다. 굶주렸기에 주변을 볼 겨를 따위는 없을 테고. 아직 나이가 어린 상태에서 그 꼴을 당했으나 더 뭔가를 생각할 틈은 없을 거였다. 그 때 그 아이가 바구니 속으로 들어가면 그들은 창으로 바구니를 찔러 아이를 죽였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원혼 덩어리가 염매였다.
 
 두 번째 방법은 항아리에 그대로 넣어 둔 채 손가락만 나오게 해서 먹을 걸 보여 주는 식인데, 거기서는 아이의 손가락을 잘라 신처럼 모시는 방법을 썼다. 어머니와 신도들이, 그리고 내가 활용한 방법은 첫 번째 것이었다.
 
 어두운 밤에 우리는 염매를 만들었다. 애들이 우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하지 않기 위해 땅을 팠고 숨구멍만 남긴 채 그들을 묻었다. 아이들은 죽은 뒤에 자신들이 본래 묻혀 있던 그 곳에 그대로 묻혔다. 이미 만들어진 염매를 보게 되면 그 집안 전체가 죽는다고 했다. 그렇게 죽어버린 아기의 시체를 보면. 신도들은 그 꼴을 피하기 위해 철저한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는 아이들을 묻은 곳 위에 붉은 꽃을 심었다. 이상하게도 잡초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렇게 수십 송이의 꽃이 피었다. 대개 아무도 꽃밭으로 들어가려 들지 않았다.
 
 물론 거기서 끝은 아니었다. 그들은 염매를 응집시킨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 때 사용되는 것이 나였다.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아기를 잉태시키면 그 아기에게는 염매에 활용된 아이의 혼이 들어간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들은 온갖 부정한 짓들을 했다. 그들에게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나는 한 번도 아기를 낳지 않았다. 애초에 애를 낳는 게 핵심이 아니었다. 그 모든 원한과 분노와 저주가 내게로 응집되는 것이 핵심이었지. 신도들은 수많은 아기 귀신들의 화신이자 모든 원한이 응집된 강한 무당을 원했다. 나는 아직 신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을 일단 받으면 그런 짓은 하기 곤란해질 터였다.
 
 "빌고 싶은 소원이 있어요?"
 
 백팔 번. 백팔 개의 염매를 만들면 완성이라고 그랬다. 아직 물론 좀 더 진행이 되어야 하긴 했다.
 
 "알고 싶어?"
 
 그 말 속에 섞이는 비웃음은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원래 내게 많은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침묵했고, 답했다.
 
 "네."
 "많지. 근데 아마 저주하는 데 사용될 걸."
 
 의외로 그는 답했다. 나는 그들이 굳이 저주를 하기 위해 이 짓을 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을 저주하고 싶었던 적이 많긴 했다. 그들은 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단어를 선택해야 할까를 생각하느라 몇 초가 흘렀다.
 
 "그래요?"
 "왜? 웃겨?"
 "아뇨. 아녜요."
 
 내가 황급히 말했다. 상대가 웃음소리를 냈다.
 
 "꽃 밑은 파지 마세요."
 
 기자들은 며칠이 지난 후에 결국 또 왔다. 기껏 건드리지 말라고 해 뒀더니 또 꽃 근처를 살피고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 계세요, 하고 한참을 외치더니 아무 말이 없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스치는 그 표정으로 보아하니. 그들은 잠시 말이 없다가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마루 위에 선 채 그들을 보다가 인상을 썼다. 왜, 하고 물어보려던 찰나 그들이 마루 밑으로 손을 넣었다.
 
 "뭐 하세요?"
 "놓고 간 거 찾으러 왔습니다."
 
 그들은 검은 기기 하나를 떼더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그게 카메라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들은 이미 차를 몰고 떠나간 뒤였다.
 
 그 날 밤에는 이상하게도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며칠이 흘렀다. 별다른 소문은 들려 오지 않았다. 또 며칠이 흐른 날 밤 나는 맞았다. 신도들 중 누군가에게 사고가 일어난 듯 했다. 너 때문 아니냐고. 네가 저주한 것 아니냐고. 그 사람이 반쯤 미친 놈처럼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이상하게, 맞으면 맞을수록 공포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 기사 때문은 아니구나. 그들이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구나.
 
 시간이 더 흘렀다.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누군가가 입구를 기웃거리곤 했지만 그런 일도 금방 사라졌다. 며칠 동안 신도들이 묘하게 몸을 사리긴 했다. 그들이 뭐라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문 밖에서. 이번에 이런 사건이 있는데 이걸로 덮으면…….
 
 그들이 특종을 잡으러 왔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렴풋이. 그건 특종을 위한 특종이었을까. 하기야 기대한 것이 없으니 실망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도와 주겠다고 했었다. 그 말이 정말 의미 없는 지껄임이라는 것을 어차피 잘 알았다. 도와 주고 싶어서 그렇게 왔을 리가 없었다. 특종은 그냥 특종. 그들이 필요한 건 뉴스를 좀 더 잘 팔리게 해 줄 건수 하나였을 거였다. 알았다. 여전히, 웃기게도, 무언가 속이 쓰려 오는 듯 했다.
 
 밤마다 들려 오던 아기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 오기 시작했다. 살쾡이는 아니었다. 삵은 그렇게 울지 않았다. 아마도. 신도들은 아이를 죽였다. 나는 원혼을 품었다.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반복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잘 알지는 못했다. 애초에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는 판이었다. 어쩌면 다른 뉴스에 의해 내 이야기가 묻혔을 수도 있고, 누군가가 로비를 해서 이야기를 묻어 버렸을 수도 있겠지.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은근히 돈이 많아 보이는 놈들도 꽤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벗어나려는 시도가 부질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온다고 해도 너무 늦게 왔다. 도착한다 하더라도 내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들도 이런 식으로 묻혔을 거였다. 특종은 단순히 특종을 위한 특종으로 남고. 고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 주길 바라는 건 무리한 기대였다. 만일 기득권의 누군가에게 피해가 된다면 아무리 대단한 이야기라도 그대로 묻혀 버리기 일쑤. 모두들 쓸데없는 모함 정도로 치부할 것이었고 믿지 않을 거였다.
 
 낮. 중간에 잠이 깬 나는 툇마루에 앉아 마당을 보고 있었다. 꽃 몇 송이가 더 피어 있었다. 문득 이 공간 자체도 커다란 항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곳에서 죽어가는 나는 염매가 될 어린아이. 어차피 어머니의 사망 후 정신은 지금껏 자라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신도들에게는 메시아였다. 설령 엄밀히 말하면 메시아라기보단 사탄에 가까운 존재일지 몰라도. 산, 집, 그리고 죽은 원혼들에 둘러싸여 이 큰 염매 항아리 속에 갇힌 채 그들이 주는 것만을 받아먹고 연명하는 중이었다. 밖에서 항아리를 깨뜨려 주지 않는 한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그리고 설령 깨뜨려 준다고 해도.
 
 고서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했다. 어느 집안의 아이가 납치를 당했었는데, 몇 년 뒤 인부들이 땅굴에서 아이를 발견했다고. 증언에 따르면 아이는 누군가가 건네주는 단술 한 모금만을 먹으면서 그 오랜 시간을 어둠 속에서 연명했다고 했다. 구조는 되었으나, 그간 신체가 워낙 허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충격이 심각했던 탓에 아이는 며칠을 살지 못하고 죽었다 그랬다.
 
 그럼에도 어쩌면. 마당 중앙에 시선이 닿았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지? 답이 나와야 했으나 머릿속은 온통 비어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꽃들이 흔들렸다. 함께 흩날린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201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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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나라
 
 
 
 "날도 별론데 들어가지 그래."
 
 남자가 말했다. 웅크려 앉아 있던 천사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남자가 뛰어서 다가간다면 잡히기 전에 날아서 도망칠 수 있을 정도로. 천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강가에 있었다. 밀려온 물결이 자갈 사이로 스며들며 천사의 신발을 건드렸다가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남자의 말마따나 날은 꽤 흐린 편이었다. 수심이 깊어 맑은 날에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강은 이제 먹빛으로 변해 있었다. 딱, 천사의 날개와 같은 색이었다.
 
 "괜찮아요."
 
 천사가 말했다. 목소리보다 물 흐르는 소리가 더 컸다. 시선은 남자의 얼굴에서 미묘하게 어긋난 곳을 향하고 있었다. 남자가 잠시 하늘을 확인했다. 구름 밑으로 짓다 만 건물 같은 것이 떠 있었다. 밑에서 보면 철골로 이루어진 판 같은 걸 만드는 것처럼 보였는데,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고개를 내리고는 메고 있던 금속 날개를 벗었다. 천사가 천천히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강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났어야 하는 공사였다. 시작 자체가 예정보다 너무 느려졌던 게 문제였다. 공공 비용을 꼭 이런 일에 써야 하냐는 문제로 논란이 많았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설치를 하자고 주장하지만 않았어도 아마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되었을 거였다. 그러나 돈이라는 건 재화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사회에서는 늘 힘이 되어서.
 
 그들의 땅 위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눈이 하나 떠 있었다. 눈알도 아니고, 말 그대로 눈. 하늘에게 거대한 사람의 눈 하나가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눈은 주기적으로 깜박이긴 했으나 잠들지는 않았다. 전해 오는 설화에서는 달과 태양이 외눈박이 괴물을 무찔러 하늘에 박제했기 때문에 그런 눈이 생기게 된 거라고 했다. 실제로는 어떤지 모를 일이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며 하늘을 날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됐지만 여전히 눈 위로 올라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 수 없는 대상이 두려워지거나 불쾌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천사들이 태어나는 게 그 중 대표적인 예였다. 하늘에 큰 구조물을 띄워서 눈을 가리고 필요할 때만 빛이 통하게 하자고 했다. 초기 비용도, 유지 비용도 만만찮게 들 사업이었다. 당연히 반대 의견이 많았다.
 
 한참 떨어진 곳에서 남아 있던 일꾼들이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수군거림이 들리는 듯도 했으나, 정확한 뜻은 바람에 날아가 알기 힘들었다. 남자는 쇠 날개 표면의 먼지를 털고 깃털들을 접었다. 천사는 그가 하는 양을 곁눈질로 훔쳐보다가 일어섰다. 남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천사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도로 자리에 앉았다. 강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옷이 젖어 버릴 거였다. 남자가 정리한 기계를 옆구리에 끼었다.
 
 "의심스럽게 생긴 양반이랑 얘기하지 않는 건 좋은 습관이야. 그래도 집엔 가라. 눈 맞으면 좋을 게 없어."
 "네."
 
 이번에 천사는 조금 더 크게 말했다. 목소리 끝에 쇳소리가 섞였다. 남자가 좀 더 가까이 있었더라면 아마 어깨가 굳는 것도 볼 수 있었을 것이었다. 남자는 천사를 보다가 한 마디를 더 던지고 몸을 돌렸다.
 
 "조심해서 들어가."
 
 해가 질 때까지 눈은 오지 않았다. 천사는 어두워진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거리에 인적이 드물었다. 그나마 있는 사람들은 죄다 눈 얘기를 하고 있었다. 천사는 열차 칸의 어느 한 쪽 구석에 박혀서 남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눈이 오면 하늘에서 지어지고 있는 구조물이 무너지는 게 아니냐는 말이 반복해서 들려 왔다. 신경 쓰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 어떤 기계 구조물도 눈을 맞고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었다.
 
 천사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한참 어둠이 이어지다가 짧게 광고 영상들이 지나갔다. 신도시에 지어지는 미래의 집에 투자하라고 했다. 천사와는 상관 없는 것들이었다. 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어둠만 남았다. 천사는 계속 창을 응시했다. 들려 오는 말들이 죄다 그런 소리라서일까, 하늘에 띄워 놓은 건축물 생각이 났다. 눈에도 잘 버틸 수 있는 부품들로 만들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바 없었다. 부상 기구가 밑에 달려 있으므로 직접 눈을 맞지 않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고는 했다. 그게 정말 제대로 된 대안인지 기술자가 아닌 사람들은 판단하지 못했다.
 
 집에 도착한 천사는 초인종을 누르려다 말고 멈췄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삼키는 침. 천사가 조심스레 초인종을 눌렀다. 거의 곧바로 문이 열렸다. 파마 머리의 중년 여성이 천사의 눈에 비쳤다.
 
 "춥지."
 "아냐, 전철이 따뜻해서 괜찮았어."
 "지금 눈 와?"
 "아직 안 와."
 
 천사가 말했다. 집 안에 천사의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다들 일하고 있거나 돌아오는 중일 거였다. 눈이 온다고 했으니 회사가 미친 게 아니라면 퇴근은 시켰을 가능성이 높았다. 천사가 옷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갔다. 그들이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물에 잠겨 있고 싶었다. 문고리에 옷이 걸리고 겉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내 움츠러들어 있던 날개가 천천히 펴지면서 깃의 끝이 벽에 닿았다. 욕실이 좁아 날개를 완전히 펴는 건 불가능했다. 그 상태 그대로 천사는 조심스레 몸을 숙여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오래 전부터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는 천사가 태어났다. 천사들 사이에서도 천사가 태어날 수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천사들이 성인이 되면 강 너머의 '섬'으로 가는 탓이었다. 넘어가지 못한 천사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새들과 같은 꼴이 되는지도 몰랐다. 천사들은 날 줄 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여느 사람들과 같았다.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기엔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더 부적합했다. 그들의 뼈는 새들의 뼈와 비슷했다. 공기가 찬 뼈는 깊은 물 속에서 수압에 눌려 쉽게 으스러졌다.
 
 물이 욕조의 반 이상을 채우자 천사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수면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천사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몸을 들였다. 검은 깃털들이 물 속을 꽉 채웠다. 그나마 남은 자리는 검은 생머리로 메워졌다. 천사는 최대한 수면 아래로 몸을 집어넣으려 노력했다. 물에 들어오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날개 때문에 앞으로도 물 속에서 활동할 일은 없으리란 게 슬플 정도였다. 천사는 몸을 웅크렸다. 얼마쯤 그대로 앉아 있자 언제나처럼 쓸데없는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다. 다른 천사들은 죄다 날개가 희었다. 검은 날개를 갖고 태어난 건 천사치고도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천사와 날개 없는 사람의 중간 단계로서 태어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쩌면 섬으로 가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더 많은 것들이 떠오르기 전에 천사가 자신의 팔을 꼬집었다. 생각들이 흩어졌다.
 
 인간은 육지 동물이었기에 필연적으로 모든 거주지는 뭍에 위치했다. 그러나 공장이나 여타 기계를 동반한 모든 작업은 수중 도시에서 이루어졌다. 눈 때문이었다. 물 속에서는 제대로 돌아가는 기계들이 눈을 맞으면 망가지는 이유는 눈 속에 일종의 잿가루가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잿가루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대개 알지를 못했다. 출처가 뭐든간에 그 눈과 잿가루가 사라지지 않는 한 천사가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가능성은 바닥을 쳤다. 천사는 매 해 눈이 내린 뒤 사람들이 투박한 나무 배를 타고 나가 강에 남아 있는 재를 떠내던 모습을 기억했다.
 
 "오늘은 잘 지냈어?"
 
 씻고 나왔을 때 어머니가 물었다. 천사는 최대한 웃어 보였다.
 
 "잘 지냈어."
 "아무 일 없었고?"
 "응."
 
  눈은 밤새 내렸으나 쌓이지는 않았다. 용역 노동자들이 길에 나와 잿가루를 치웠고 그 위를 청소 차량이 한 번 더 쓸고 지나갔다. 천사는 그 날 오후에도 강으로 나왔다. 눈 때문에 공사 계획이 바뀌었는지, 어쨌는지, 그 전날보다 사람이 적었다. 천사는 날개를 반쯤 펼쳤다가 접기를 반복하며 주변을 살폈다. 보는 눈이 한둘씩은 꼭 있었다. 천사는 물가로 다가가서 자리를 대충 발로 치웠다. 앉아서 또 얼마쯤 강을 바라보았을까. 발소리가 들렸다. 천사가 앉아 있는 곳은 공사 현장과는 좀 떨어진 곳이었다. 다가오는 노동자는 한 명 정도밖에 없었다. 천사가 옆을 돌아보았다.
 
 "또 있네. 밤새 눈 맞은 거 아니지?"
 "네."
 
 또 전의 그 남자였다. 나이는 서른 후반쯤 되어 보이고, 수염은 제대로 깎지 않아 거뭇거뭇 나고 있는 남자. 이번에는 등에 날개를 메고 있지 않았다. 천사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다가왔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거였다. 남자가 말했다.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공사 시작할 때부터 있었잖아. 섬으로 가려는 거 아니었어?"
 
 천사가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였다. 아래로 떨어지는 시선. 그 전날보다는 남자가 가까이에 와 있었다.
 
 "가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요."
 "여기 앉아서?"
 
 남자가 말했다. 천사는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남자가 자신의 머리를 대충 헤집었다. 욕 비슷한 걸 중얼거리면서. 천사의 어깨가 보일락 말락하게 움츠러들었다. 떨리는 손끝. 불안하게 자갈들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 남자가 한 걸음 물러서면서 손을 내렸다.
 
 "아니, 뭐라고 하려던 건 아니었어."
 
 미안하다, 라는 말이 그 욕들보다도 작게 새어나온 듯도 싶었다. 천사가 그를 보았다.
 
 "눈이 보내 줄지는 모르겠어요."
 "어떤 눈. 내리는 거?"
 "하늘에 있는 눈이요."
 "그거? 천사들은 그거 신경 안 써도 되잖아."
 "저도 그래도 될지 잘 모르겠어요."
 
 등에 딱 붙어 있던 날개가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접혔다. 검은 날개였다. 남자의 시선이 천사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가 다시 얼굴 쪽으로 돌아왔다.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천사는 그를 관찰하다가 말을 꺼냈다. 한 발 늦게.
 
 "오늘은 하늘에서 작업을 안 하는 날이에요?"
 "하긴 할 건데 기계가 이상해서. 눈 맞았는지 잘 안 펴져."
 "아. 그럼 작업을 못 하나요?"
 "망가지면 당연히 못 하는 거 아니겠냐?"
 
 남자의 눈썹이 모였다. 천사는 곧바로 잠잠해졌다. 시선이 아래로 떨어지고 입이 한 번 뻐끔거렸다. 네, 라고 말한 것 같은 입모양이었다. 남자 쪽에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천사는 차가워진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가 외마디 작은 소리를 냈다. 남자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천사가 말했다.
 
 "이런 일은 어떻게 하게 되셨어요?"
 "무슨 일?"
 "공사 같은 거요."
 
 남자의 말들이 퍽 퉁명스러웠다. 천사의 목소리는 말을 꺼낼 때마다 작아졌다. 남자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주변을 살폈다. 그들 근처에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실, 천사가 일반적으로 있는 곳은 공사가 직접적으로 진행되는 현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현장의 사람들은 천사를 볼 수 있었고 천사도 일꾼들을 볼 수 있었지만 그들 사이의 간격은 그들이 있는 공간을 분명히 갈라 놓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영역에 너무 깊이 들어온 건 천사가 아니라 남자 쪽이었다.
 
 또다시 어딘가에서 들려 오는 수군거림. 천사는 남자가 보는 방향을 확인했다. 물 쪽이었다. 그러나 물 속에서 내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릴 리는 만무했다. 천사는 물과 남자로부터 한 걸음 정도 더 떨어져서 섰다. 남자가 말했다.
 
 "굳이 천사가 알 만한 정보는 아니지 않나?"
 
 천사의 눈가가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어김없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이 나왔다.
 
 "그런가요.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요." 
 "공사 목적이 궁금하면 그건 알려줄 수 있어."
 "그건 알고 있어요."
 "그럼 알 거 다 알았지, 뭐. 섬엔 언제 가려고?"
 
 천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뒤늦게야 천사와 바로 직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해 낸 듯 했다. 눈이 보내 줄지는 모르겠어요. 날개가 흰 일반적인 천사들은 대부분 눈이 내리는 날에 비행을 했다. 내리는 눈이나 천사들이나 하늘에 떠 있는 눈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상성이 더 잘 맞는다는 게 기본 이론이었다. 정확히 어떤 과학적 이유가 있는지는 거의 연구된 바가 없었다. 천사 본인도 당연히 그 원리를 알지 못했다. 분명한 건 눈이 내릴 때 날개가 흰 천사들의 비행을 보면 마치 그들이 눈송이가 된 것 같은 착각이 인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천사의 날개는 검었다. 검은 눈은 없었다. 눈이 내리는 날 비행을 했을 때 어떤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소한 천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남자가 천사의 말을 어떤 의미로 해석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남자가 또다시 사과를 하거나 헛소리를 하기 전에 천사가 선수를 쳤다.
 
 "곧 갈 거예요."
 
 물론 그들 두 사람은 모두 천사가 오랫동안 비행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잠시 일하고 싶으면 말은 전해줄 수 있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말했다. 될지는 모르겠다. 생각해 보겠다. 확인해 보고 알려 주겠다. 천사는 희망 고문이 무엇인지 알았고 거절하기엔 양심이 찔리는 사람들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돌려서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알았다. 알고는 있었다. 천사가 남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공사장으로 돌아갔다. 천사는 어깨가 쑤시는 것을 느꼈다. 날아 볼까, 하는 생각이 일었다. 그러나 생각뿐이었다. 천사는 늘 하던 대로 자리를 잡고 앉아 강물을 응시했다.
 
 눈이 오면 기계들이 마비되는 탓에 대부분의 주요 기기들은 물 속에 위치했다. 물 속에서도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는 기계는 만들 줄 알면서 눈을 맞고도 버티는 기계는 만들지 못했다는 게 우스운 노릇이었다. 처음에는 눈송이가 잘못 들어가는 순간 망하는 공장 시설들이 먼저 옮겨졌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공장과 이어져 있는 일부 회사들이 뒤이어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 즈음엔 땅값 문제 때문에 물 속에 회사를 짓는 게 육지에 짓는 것보다 값이 쌌다. 이제는 웬만한 회사들이 다 물 속에 있었다. 사람들은 잠수정이나 잠수 도구를 써서 물 속으로 내려갔다. 대개 건물 내부에는 공기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치 뭍에서 일을 하듯이 일을 하고는 저녁에 퇴근을 했다. 뭍에 있는 거라고는 개개인의 집과 자영업을 하는 점포들, 그리고 학교들밖에 없었다.
 
 가끔 그 물에 대한 집착은 기괴한 느낌마저 불러일으켰다. 진화의 과정을 거쳐 기껏 물 밖으로 나온 인류가 도로 물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모습은 일종의 퇴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또 고래들처럼 온전히 물 속에서 사는 법을 익힌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불구가 되는 길을 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회 전체가. 물론 단순히 물 속에 모든 시설을 위치시킴으로서 천사들을 따돌리는 효과를 낳는 탓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천사들은 물 속에서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뼈는 새들의 것과 같아서 구멍이 너무 많았다. 너무 깊은 물 속으로 끌어내려졌다가는 몸이 바스라져 죽고 말 것이었다. 언젠가 천사는 그런 식으로 죽었던 다른 천사의 이야기를 배운 적이 있었다. 과학 시간에 들은 얘기였다.
 
 천사는 그리고 또 물에 빠졌던 때를 기억했다. 살얼음이 낀 겨울 강은 맨몸으로 들어온 것을 죄다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찼다. 물고기들이 강의 밑바닥에서 대체 어떻게 버티는지 모를 일이었다. 살을 베어 내는 듯한 통증을 기억했다. 높은 곳에서 물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것도, 차가운 강물 속으로 빠지는 것도 천사는 전혀 즐기지 못했다. 천사는 겨울 강물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물새가 아니었다. 날개만 검고 다른 천사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 비슷한 것일 뿐이었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 아직도 생생한 얼음 깨지는 소리. 천사는 탈출의 시도를 기억했다. 날개가 달린 것들은 위기에 처했을 때 날개를 휘저어 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모든 새들이 모든 곳에서 날 수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거 물어봤거든."
 
 당일의 공사 일정이 끝났는지 개찰구는 지하철을 타러 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남자는 개찰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천사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러 내려가던 일꾼들 중 몇몇은 천사와 남자를 흘끔거리고 지나갔다. 천사는 그들이 가는 방향을 몇 차례 확인하다가 대화 상대를 보고 섰다. 남자는 좀 더 벽 쪽으로 붙어 섰다. 천사가 그를 따라갔다. 구석까지 가자 시선은 줄어들었다.
 
 "그거, 요?"
 "일하는 거. 관심 없을 수도 있는데 물어만 봤어."
 
 천사는 가만히 남자를 보았다.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았으나 동시에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주변 사람들 중 대부분이 계단 아래로 내려간 상태였으나 천사는 여전히 시선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자신을 알리는 것은 금기가 아닐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이는 것이었다. 목소리를 내는 순간 그림자 속에서 투명해져 있던 자신을 사람들이 알아채고 몰려올 것만 같았다. 근거는 없었다. 천사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느낌이. 남자가 천사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원래 천사는 고용하지 않는댄다."
 "아,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잠깐만. 들어 봐."
 
 남자는 말을 뱉어 놓고는 천사의 표정을 살폈다. 짧게. 천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들으라고 했고 이번은 제가 대답할 차례가 아니었다. 머리가 시끄러웠다. 그들은 천사가 인간에게 말을 거는 게 아니꼬웠을까. 그들은 천사가 인간처럼 살고자 하는 게 싫었을까. 싫을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혜주의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가정한다면 천사는 대가를 받은 뒤 언제 도망쳐 버릴지 모르는 불량 거래자들이었다. 그런 것들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 자체가 싫을 수 있었다. 가능했다. 이상하지 않았다.
 
 "얼마 받을 걸로 생각하고 있냐?"
 
 목소리가 생각 사이로 치고 들어왔다. 천사가 남자를 보았다.
 
 "최저…아, 아니. 제가 잘 몰라서요."
 "당연한 얘기긴 한데, 돈 벌려고 하는 거지?"
 "…네."
 "그럼 아니다. 다음에 기회 생기면 알려 주든가 할게. 잘 가라."
 "저. 시급은 크게 상관 없어요."
 "그러냐?"
 "네."
 "고용은 안 한다고 하는데, 하고 싶으면 하루쯤 일을 해도 되긴 돼."
 "하루인가요?"
 "내가 하는 일 도와 주는 건 가능하다는데 네 일도 아니고. 더 하긴 좀 그렇잖아."
 "아."
 "듣고 보니까 좀 아니지?"
 "아, 괜찮다면 한 번 정도는 해 봐도 될까요?"
 "진심이냐?"
 "네."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천사를 보다가, 아침 몇 시에 오라고 말을 하고는 인사로 대화를 끝냈다. 천사는 잠시 그대로 서서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천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바람과 함께 출발하는 소리가 역을 채웠다. 계단 밑에 보이는 사람들이 없어진 뒤에야 천사는 아래로 내려갔다.
 
 바람을 너무 많이 일으키면 곤란하거든. 선천적으로 날개가 달린 애들은 날개가 크고 비행 속도가 빨라서 규격화된 기계들하고 달라요. 이튿날 천사가 남자를 따라갔을 때 관리자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언제쯤 섬으로 갈 거냐고 그가 물었다. 올해 섬까지 갈 정도는 안 되어서요, 하고 천사는 대답을 했다. 관리자는 천사를 관찰하다가 알았다고만 대답을 했다. 어째서인지 조금 떫은 눈치였다. 그가 자잘한 안전 수칙들을 말했다. 바쁘니까 빠르게 한다고 했다. 천사는 잠자코 들었다. 안전 장비로는 모자 하나가 주어졌다.
 
 남자가 곁에서 기계를 준비했다. 다른 사람들이 먼 발치에서 그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천사는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하면 물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건축물과 그 틈으로 엿보이는 하늘이 시야에 담기는 전부. 천사가 느리게 날개를 펼쳤다. 등 뒤의 검은 덩어리가 부풀듯이 커지면서 깃털들이 섰다. 바람이 날개와 등 사이의 살갗을 찌르고 들어왔다. 천사는 어깨를 움츠렸다. 검은 생머리가 날개 사이로 미끄러졌다. 바닥에 그림자가 졌다. 사람의 것이라기에는 너무 크고 어두웠다. 남자는 그림자 쪽으로 한 차례 눈길을 던졌다가 연장을 챙겼다.
 
 "따라와서 옆에서 보다가 뭐 부탁하면 해 주면 돼."
 "네."
 
 황금빛을 띠는 가짜 날개가 펼쳐졌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하늘로 떠올랐다. 천사는 기다리다가 그가 어느 정도 높이에 도달한 후에야 무릎을 굽혔다. 다음 순간 천사의 몸 역시 공중에 떴다. 바람이 강 쪽으로 부는 날이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날카로운 바람이 드러난 피부에 꽂혔다. 천사가 인상을 썼다. 남자는 이미 한참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천사는 날갯짓을 했다. 깃털들이 쇠로 만들어진 것마냥 무겁게 느껴졌다. 일어나는 바람. 공중에서 몸이 잠깐 흔들렸다.
 
 오랫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달리기를 하지 못하는 것처럼. 딱 비슷한 꼴이었다. 천사가 다시 한 번 날갯짓을 했다. 방향을 잘못 튼 탓에 천사는 이제 강물 위에 있었다. 아직 초겨울인지라 물이 얼지 않은 상태였다. 건축물의 그림자가 수면에 비쳤다. 천사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날갯짓이 멎었고. 순간의 일이었다. 누군가 위에서 소리를 쳤다. 천사가 날개를 재빠르게 휘저었다. 물에 빠진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몸은 다시 떠올랐다. 잠시 그 높이에서 날던 천사는 강에서 시선을 떼고 좀 더 위로 올라갔다.
 
 남자가 무어라 말을 한 것도 같았다. 하늘 위에서는 바람 소리가 너무 심했다. 천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무언가를 시키는 눈치는 아니었다. 남자는 몇 마디 말을 더 했고 천사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잠시 천사를 보다가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가만히 떠 있는 게 원래 더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천사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맴을 돌았다. 하늘에는 앉을 만한 공간이 별로 없었다. 그 날의 작업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남자가 말을 걸었다.
 
 "괜찮냐?"
 "네, 감사합니다."
 "나중에 시급 들어오면 쪼개서 준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
 "아녜요. 안 주셔도 돼요."
 "일했으면 줘야지."
 "죄송한데."
 "싫으면 다른 걸로 준다."
 
 현장 감독이 천사의 비행 실력에 대해 한 소리를 했다는 걸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돈을 주겠다고 한 남자는 며칠간 다가오지 않았고 천사는 계속 강가에서 기다렸다. 나는 일은 없었다. 중간에 한 번 감독관이 찾아와서 잠깐 말을 걸고 갔다. 너는 저 섬으로 안 넘어가냐? 천사는 그 말을 들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곧 가요. 감독관 역시 웃었다. 지난번에 보니까 비행 연습이 잘 안 된 것 같던데, 연습을 좀 해야 섬으로도 가지. 너 위험하게 할 뻔 했다고 지난번 그 아저씨가 혼났다. 천사는 그를 보다가, 그런가요, 하고 대답하면서 다시 얼굴을 찡그려 웃었다.
 
 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육지의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가끔씩 그 섬을 따라 비행하는 천사들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은 천사들이 섬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을 건너가는 비행 기술에 대해서 알려 주는 곳은 없었다. 알아서 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천사들은 대개 성인이 되는 해의 겨울에 섬으로 넘어갔다. 나이를 고려하면 대부분의 천사들이 중등 교육 이상의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섬에서 생활이 어떻게 영위되고 있을지 예상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다들 막연히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만 했다. 육지의 도시는 정말로 천사들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천사들은 오래 전부터 태어났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늘의 눈이 천사를 만들어 낸다고 했다. 날개 달린 사람들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건지, 아니면 정말 눈의 영향을 받아 장애를 갖게 된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 현상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그들을 그린 그림이라든가 피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기록물들만 넘쳐났다. 섬으로 가는 대신 영영 정착한 천사들에 대한 기록이 있는지 없는지는 불분명했다. 찾아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천사는 성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상을 떠나 버리는 존재들이었다. 태어난 곳에서 계속 지내는 천사는 상정하지도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역으로 천사가 아닌 인간이 섬까지 날아간 적이 없다는 건 분명했다. 천사들은 눈의 사랑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날개가 희어서 섬까지 날아갈 수 있다는 얘기는 초등 과정 때부터 교육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뒤집어 말하면 '눈의 사랑을 받는' 천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섬에 갈 수 없단 뜻이었다.
 
 "저게 생기면 천사들도 더 태어나지 않을 거라더라."
 
 그건 며칠이 지나 다시 남자와 마주쳤을 때 그가 천사에게 건넨 말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오면서 천사는 눈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섬으로의 비행을 하기에는 딱 좋은 날이었고 일반적인 인간들이 돌아다니기에는 최악인 날이었다. 천사는 날개를 펼치려다가 오히려 더 단단히 접었다. 아직 눈 속에서 나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다. 역의 문가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를 제외하고는 문에 붙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천사는 뒷모습을 관찰하다가 개찰구 밖으로 나갔다.
 
 "저."
 
 천사가 말했다.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천사는 그를 보았다.
 
 "오늘은 공사 안 하지요?"
 "그런가 보다. 괜히 일찍 왔어."
 "아아."
 
 굳게 닫힌 유리문에 날아든 눈송이가 부딪혔다. 문 앞에 돌로 된 작은 지붕이 있긴 했지만, 눈보라가 심한 탓에 문 아래쪽에도 약간의 눈이 쌓이고 있었다. 그들은 잠시 내리는 눈을 지켜보았다. 멀리 강이 보였으나 눈 때문인지 하늘이 어두워서인지 전체가 새까맣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문 틈을 비집고 들어온 바람이 낮은 소리로 울부짖었다. 남자가 말을 꺼냈다.
 
 "공사판에서 더 일하고 싶냐?"
 "네."
 "여기보단 정부에서 추진하는 좀 더 쉬운 공사판이 나아."
 "뽑힐지 모르겠어요."
 "나도 여기서 자리를 얻었는데 너야 당연히 되겠지."
 
 천사는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다가 말았다. 바람이 다시 한 번 크게 울었다. 소리가 잠잠해졌을 때 천사가 말했다.
 
 "아저씨는 사람인데 저는 아니잖아요."
 
 어, 하고 목소리를 흘리던 남자는 나도 딱히, 하고 중얼거렸다. 천사는 그를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음에도 남자는 말의 의미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천사는 다시 밖으로 눈을 돌렸다. 대체로 천사들은 외부인이었다. 어느 집단에서든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한다는 뜻이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보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게 피해를 덜 입는 방법이라는 건 어릴 때 파악한 사실이었다. 이번에도 그래서 먼저 말을 꺼낸 건 남자 쪽이었다. 그는 눈발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공중 건축물을 턱짓했다.
 
 "저게 생기면 천사들도 더 태어나지 않을 거라더라. 넌 어떻게 생각하냐?"
 "정말 눈 때문에 천사들이 생기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고들 말은 하잖아."
 "섬으로 넘어가는 거하고 눈의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긴 해요. 근데 천사는, 잘."
 "모든 천사들이 섬으로 넘어가지 않나? 그럼 천사하고도 연관이 되어 있긴 한 거잖아."
 
 섬으로 가지 않는 존재는 천사가 아니라고 간주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었다. 천사의 턱에 잠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억지 웃음이 입가를 스쳤다.
 
 "저를 포함해서 아직 많은 천사들이 섬으로 가는 데 성공하지 못했으니까요."
 "내가 혹시 또 생각 없이 뱉는 것부터 했나."
 "아니에요, 괜찮았어요."
 "너 혹시 경찰은 아니지."
 "네?"
 
 천사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다소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대답도 늘상 네, 네, 만 하는 게 영 찜찜한데. 아니야?"
 "네."
 "이번에도…아니다, 맞다고 해도 말해주겠냐."
 
 남자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는 천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상해 보였으면 죄송해요."
 "아냐. 그냥 한 소리다."
 "그, 올해 겨울엔 섬에 못 갈 것 같다는 건 사실이고요."
 
 자꾸 네, 로만 대답한다고 짚은 게 마음에 걸려서 꺼낸 이야기였지만 거의 바로 말문이 막혔다. 좀 더 어릴 때 물에 빠졌던 이야기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당시도 겨울이었고 천사는 자신이 충분히 섬으로 건너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임 따위에서 배제당했던 날인가, 아마 그랬을 거였다. 이사를 가게 되었고 송별 파티인지 뭔지를 반에서 열어 주겠다고 했다. 잠깐 참여했다가 금방 나갔어야 했던 것이었다. 아이들은 가끔 천사에게 말을 붙인 뒤에 언제쯤 가느냐는 이야기만 반복해서 물었다. 이사를 언제 가냐는 질문인지 교실에서 언제 나갈 작정이냐는 질문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둘 다였을지도 몰랐다. 아이들이 포장했다는 말과 함께 건네 받은 선물 상자에는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천사는 강으로 나갔다. 어차피 떠나야 한다면 빨리 떠나는 쪽이 가족들에게도 이롭겠거니 했다. 강물이 죄다 언 겨울이었다. 날씨는 흐렸다. 천사는 날 준비를 했다. 하늘의 눈이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일었다. 천사는 날았다. 얼음은 천사의 생각보다 두껍지 않았고 유속은 생각보다 빨랐으며 바람의 방향은 잘못되어 있었다. 계속 상승 비행을 하다가 너무 추워졌다 싶어진 순간 몸이 균형을 잃었다. 높은 곳에서는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었다. 곤두박질친 몸이 얼음을 깨뜨렸다. 얼음 또한 같은 순간 몸을 깨뜨려서. 천사는 어딘가가 으스러진 듯한 통증을 느끼며 그대로 물살에 실려 미끄러졌다. 강의 중간 부분이 살얼음으로 되어 있고 근처에 무슨 이유인지 얼음을 밟겠답시고 나온 사람이 없었더라면 그대로 죽어 버렸을 거였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차마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 갈 거예요."
 
 천사가 말을 맺었다. 남자가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그래. 그 날개에다가 금속 날개를 추가로 다는 일은 없길 바란다."
 "무슨 일이 있나요?"
 "추우니까 잘 안 굴러가더라고. 그런 기계 끌고 일하는 것도 고통이야."
 
 돌아가는 길에 남자는 천사의 손에다가 지폐 몇 장을 구겨 넣었다. 지난번에 못 준 아르바이트 비용이라고 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아무도 천사를 쳐다보면서 속닥거리지 않았다. 사실, 원래 그 공사판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런 식으로 구는 성인은 거의 없었다.
 
 눈은 며칠간 내렸고 공사는 한참 뒤에나 재개됐다. 천사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물가에 앉아서 지어지고 있는 공중 건물을 구경했다. 날아다니는 사람들은 워낙 작아서 하늘에 기이한 작은 개미집이 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날도 천사는 강을 건널 마음이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건너고 싶긴 했다. 비행 시도를 할 작정이 아니었을 뿐이지. 천사는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걸 보았다. 천사는 그 사람이 점이 될 때까지 눈으로 모습을 좇았다. 짧은 순간 일전에 천사의 비행이 그러하였듯이 점이 그리는 이동 곡선이 불규칙하게 떨렸다.
 
 나중에 듣기로 남자는 범죄자였다고 했다. 수감 중에 탈출했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보호 관찰 기간인데 국가에서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막노동 일자리를 내놓아서 일을 하게 됐다는 거였다. 그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남자와 엮이는 걸 꺼렸다. 임금을 받지 못하자 사장을 식물로 만들어서 수감되었다는 소문이 도는 사람이었다. 욱하는 버릇이 언제 도질지 모른다며 사람들은 뒤에서 한 소리씩 말을 했다. 그렇게 생각은 해도 또 굳이 천사에게 가서 위험한 아저씨와 놀지 말라는 소리를 해 주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그냥 남자와 관련된 모든 것을 피했다. 다른 사람들의 비행 기계가 임시 컨테이너의 수납 공간에 들어가 있는 동안 어째선지 문 밖까지 채여 나온 남자의 기계는 눈이 완전히 쌓였다 녹을 때까지 밖에서 방치됐다.
 
 그러나 그건 천사가 알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천사는 강을 보았고 자신의 추락을 떠올렸으며 떨어지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예전의 천사보다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천사는 다시금 날았다. 비행은 불안정했다. 그러나 천사는 오래 전의 겨울을 생각했고 자신이 강을 건널 수 없게 된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떨어지는 사람의 팔을 잡아 봤자 끌어올리는 건 불가능했다. 팔이 빠져 버릴 것이었다. 같이 떨어져 내리면서 물로 최대한 천천히 떨어지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천사는 마지막 순간 남자를 놓으려 했다. 남자가 천사를 놓지 않았다.
 
 "올해 섬으로 가는 건 포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천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는 더 이상 남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퇴원한 남자 역시 다가오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는 그가 아예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도 천사는 확인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천사는 매일 물가에 앉아 완성되어 가는 공중 건물을 구경했다. 이제 밑 부분은 거의 완성되어서 위의 공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확인하기 힘들었다. 천사는 날아다니는 사람들이 겨울 날파리떼 같다고 생각했다. 강은 반즘 얼어 있었지만 날은 맑았다. 아마 폭설 같은 건 한동안 오지 않을 것이었다. 눈은 아직 떠 있었다.
 
 바람의 방향은 바뀌어 있었다. 천사는 어렴풋이 그 바람을 타면 섬으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이 끝이었다. 강 쪽으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날이 갈수록 바람이 점점 더 차가워지는 듯 했다. 천사는 날개를 펼치려다 멈췄다. 이번 겨울에는 갈 수 없다고 의사가 말했었다. 한 해 정도는 더 기다릴 수 있었다. 있을 것이었다. 천사는 강을 응시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201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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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형상

 

 

 

 타조가 어설픈 걸음으로 발을 내딛었다그들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구의 한쪽 면을 넘고 있었다연구원이 속력을 내 앞서 가기 시작하자 타조를 탄 신이 헛기침을 했다.

 

 “너희는 사막에서 너무 빨리 가려고 하면 안 돼.”

 

 연구원은 대꾸 없이 신을 올려다보았고곧 인상을 쓰면서 시선을 돌렸다신의 머리색 때문이었다음지에서 자줏빛을 띠는 그의 머리카락은 햇빛만 받았다 하면 쨍한 마젠타 빛으로 반짝였다대부분의 도시 거주민들은 그런 식으로 머리를 염색하지 않았다백 년쯤 전에나 유행했을 머리 스타일이었다신이 다시 말했다.

 

 "사막에서 오래 살 수 있게 설계된 게 아니거든."

 "그래요."

 

 연구원이 툭 대꾸했다판테온이 어디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신은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만을 쉽게 떠올렸다물론 그의 권능은 애초에 길찾기가 아니라삶과 죽음에 관련된 것이었으므로 이런 것들만 잘 아는 게 당연하긴 했다그 분야에 대해선 굳이 알고 싶지 않으니 문제였지신은 또다시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고 연구원은 입을 다물었다.

 

 여름과 겨울마다 급격하게 변하는 기온은 도시를 제외한 모든 곳의 사막화를 낳았다옛날을 그리워하는 주민들은 신들이 있을 적에는 이러지 않았다고 수군거렸다기록에 따르면 과거에도 이상기후는 자주 목격되었다고 했으나 대개 그런 정보는 민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법이었다나이 든 이들은 전능했던 신들만을 기억했다거주지의 날씨를 통제하고 기술로 불행을 덮으면서도 학자들은 절대자들의 존재를 연구했다.

 

 사막 어딘가에 판테온이 존재한다는 건 일단 기정사실이었다사람들이 미쳐 신들을 학살했던 그 날 이전에 최상의 존재들은 이미 어느 오아시스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했다마법으로 만들었는지 어쨌는지 예의 그 '오아시스'에는 항상 얼음이 떠 있다고 했으며 주변 기온도 선선하다고 전해졌다사람들은 신들만이 그곳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길잡이가 될 존재를 찾는 데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갔다.

 

 "요샌 그렇게 안 해요."

 

 텐트를 쳤을 때 땔감에 불을 붙이려는 신을 향해 연구자가 말했다신은 돋보기를 거뒀다.

 

 "그럼?"

 

 학자가 소매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을 뽑아들었다. 그게 나무 더미에 닿자마자 크게 불길이 일었다신은 타들어가는 것을 관찰하다가 말했다.

 

 "뭐야그거나한테도 하나 주는 영광을 누리게 해 줄게."

 "만지시면 안 돼요."

 "내가 신인 거 알잖아그거 건드리겠다는데 허락을 받아야 해?"

 "필멸자시잖아요저흰 아니고."

 

 신이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을 토했다연구원은 그가 가만히 텐트 앞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불빛 속에서 초록색과 하늘색이 섞인 홍채가 기이하게 반짝였다신은 대충 묶었던 꽁지머리를 풀고는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었다모래가 떨어져 내렸다.

 

 "내가 이런 식으로 도태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정신 차려 보니까 다른 녀석들은 어디로 갔다고 하지도시엔 아는 놈이 하나도 없지이제 와선 신기술도 못 쓰는 퇴물 취급 받고 있잖아역시 늙으면 죽어야 한다 이건가?"

 "일단 판테온에 가면 뒤처진 것도 아니게 될 텐데요."

 

 침묵 속에서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만 났다연구자는 맞은편에 앉은 이를 곁눈질했다그들의 길잡이를 찾은 건 두어 해 전의 일이었다찾았다기보단 발굴했다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었다먼 옛날 신들은 보통의 시민들과 달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 동족을 죽이는 존재에 대한 처벌을 확실하게 내렸다고 했다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신들은 온기를 제거당한 채 아주 긴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 신도 '그런부류였다잠들어 있는 다른 이들도 있었으나 잠들기 전 깊은 병에 들어 있었던 경우도 많았다확실하게 건강한 존재를 고르려면 어쩔 수 없었다따지고 보면 악신이지우리를 이 상태로 몰아넣는 데 지대한 기여를 한 분이시니까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해우릴 미치게 하는 저주도 내릴 수 있어떠나던 날 연구자에게 수석 연구원이 말했다.

 

 선택할 수 있었으면 다른 이를 선택했을 거였다오랜만에 갇혀 있던 곳에서 빠져나왔겠다막말로 동행인을 토막내고 혼자 오아시스를 찾으러 가도 되는 상황인 것이었다아무리 연구자에게 정해진 수명이 없다지만 도움 받을 곳이 전혀 없는 이런 허허벌판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게 분명했다유일한 희망은 신 역시 약하기 짝이 없다는 데 있었다낮의 열기도밤의 냉기도심지어 피조물들조차 신을 쉽게 죽였다.

 

 "안 찾고 도망치진 않아."

 

 신이 말했다그는 둘둘 말린 침낭을 끌어 와 품에 안고는 벨트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매끄러운 표면이 모닥불 빛을 노랗게 반사했다작은 쇳소리오는 길에 그가 밤마다 손댔던 물건이었다.

 

 "알아요."

 "하긴상식적으로 이 사막이 어디 혼자 살아남을 데야?"

 

 연구자는 그의 손에서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봤다생명 창조가 누구만의 전유물은 아니라지만, 직접 만들어지는 걸 보는 건 여전히 낯설었다애벌레를 닮은 몸에 날개가 붙었고 더듬이가 돋아났다태엽을 감는 듯한 손동작을 두어 번 한 뒤 신은 은색 나방을 위로 날려보냈다나방이 별처럼 선명한 빛을 내며 주변을 날아다니다가 다시 손으로 돌아와 앉았다.

 

 "이런 녀석들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이 나방은 도시에서 만들어진 녀석보다 일찍 죽을 거야뜯어먹고 살아갈 만한 게 없잖아나비라면 사실 좀 더 자신이 있는데밤에 활동하는 동물들은 역시 아직 좀 어려운 것 같아나보다 재능이 많은 애들이야 이것도 알아서들 잘 했겠지."

 "저기."

 

연구자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곧바로 다시 입을 다물었고 신은 그를 내려다보았다연구자는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신이 표정을 지우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리까는 눈낮은 목소리로 이어져 나오는 말.

 

 "도착하고 얘기하면 안 돼요?"

 

 잠시 그를 보던 신이 웃음을 터뜨렸다.

 

 "실수로 죽일까 봐 그래?"

 

 도착하려면 근데 한참 남았다고그때까지 말도 안 하면 지루해서 어떡해길게 이어지는 문장들 속에서 연구자는 입만 뻐끔거리다가 다시 낮은 목소리를 냈다.

 

 "말하는 게 힘들어서요."

 "하긴 너희는 나하고 얘기할 때 빼곤 말도 잘 안 하더라."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수습 연구원일 때 여행을 시작했더라면 더 참을성이 있었을 거였다아니정신만 더 맑았어도 이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을 게 분명했다그러나 윗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알랑거려야 하는 시절은 50년도 전에 지나간 뒤였고 익숙지도 않은 비위 맞추기를 계속 하기엔 지나치게 주변이 더웠다신은 잠시 말이 없었다만들 때 주지도 않은 텔레파시 능력을 개발하더니 말을 듣지도 않게 되었다는 둥하여튼 또다시 실컷 떠들 거라고 연구자는 짐작했다그는 목을 문질렀다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알다시피기도는 말로 하는 거잖아?"

 

 연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신은 머리를 다시 묶더니 흥얼거리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거 소리 마법에 대해 얘기할 차례인가우리가 쓰는 마법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어생명에 힘을 불어넣는 빛 마법과명령을 하는 소리 마법그렇게 생각하면 편할 거야."

 

 진심으로가능했다면 다른 길잡이 신을 골랐을 거였다실탄이 든 총을 장난감마냥 휘두르는 녀석과 함께 다니는 게 차라리 안전할 거라고 연구자는 생각했다말마따나 언어는 마법이었다신들의 학살 사건 때 그렇게 많은 시민들을 움직인 것도 결국 음성 언어였다텔레파시 기술을 발달시킨 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신은 모른 척 계속 이야기를 했고 연구자는 속으로 별을 셌다그 편이 더 견딜 만 했다.

 

 "사실우리는 훨씬 전부터 너희가 우릴 없애려 들 거라고 믿고 있었어이 세상에 솔직히 우리는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잖아그래서 유난히 똑똑한 신들은 영원히 얼음이 녹지 않는 오아시스를 설계했지물론 다 갈 수 있는 건 아니었어세상엔 모래알만큼 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곳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거든그래서 가장 재능 있는 자들만이."

 

 낮이 오자 밤에는 나방이었던 나비가 길을 인도했다. '움직이는 별들'의 힘을 빌려 근처에서 가장 온도가 낮은 지역으로 이동한다고 했다세월이 흐르면 별자리도 바뀌는 법이었고 오래 전에 잠들었던 신이 과연 현재의 별을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있었다귀찮아서 가만히 있을 뿐이었지창조주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밤에도 계속 가고 싶으면 횃불을 쓰면 돼이 나비는 빛이 있는 한 계속 움직일 거야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다들 지칠 테니까 쉬긴 쉬는 게 좋겠지?"

 "그래요."

 

 그렇게 말이 많은데 소리의 마법이 아직도 오작동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게 신기한 노릇이었다신을 깨우기 전 다른 연구자들과 토론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세월이 워낙 오래 지난 탓에 그의 죄목이 담긴 자료는 날아가고 없었다어쩌면 신들의 학살 사건을 사주한 장본인이 그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그 정도의 악신을 깨워서 데려갈 수는 없다는 속삭임들터무니없는 걱정이었던 걸지도 몰랐다사실 말이 많고 조언을 듣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동행자는 그리 성격이 파탄난 편이 아니었다.

 

 연구자는 걸음을 내딛으며 옅게 이는 모래바람을 관찰했다나비는 그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그는 헛기침을 했다모래가 들어갔는지 목이 버석거렸다.

 

"아예 사막의 지형을 바꾸는 게 낫지 않아요신이잖아요."

"나는 못 해그걸 할 수 있는 건 좀 더 실력이 좋은 애들이나."

 

신은 잠깐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히 덧붙였다.

 

"우리의 신들 정도지."

 

아직도 당신들의 신을 찾아요라고 연구원은 텔레파시로 물었다잘못된 방식으로 '기도'했다는 걸 깨달은 그는 다시 질문할까 말까를 고민했다사실 비슷한 이야기는 오는 동안 종종 나온 바 있었다신은 왜 시민들이 자신을 신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고 했다고도로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그들이 보유한 기술이 자신을 압도할 텐데 왜 그런 이름으로 부르냐는 것이었다잠들어 있던 사이 신이라는 단어의 뜻이 바뀌었냐고도 물었다연구자는 자신이 아는 정의를 그대로 읊었다. ‘창조자.’

 

신은 자신과 그 동지들이 현재의 시민들을 만들었단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세상에 자신들이 현재의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끌고 왔다는 사실에도 동의했다동의하면서도 그는 이 모든 것이 현 시민들을 향한 처벌이 아니라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했는데그걸 강조하든 말든 그가 신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 잊은 눈치였다.

 

그런 식으로 신은 종종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사실 연구자는 따로 진행한 연구를 통해 신들을 창조한 상위 창조주의 개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신들과 그 상위 존재의 거리는 시민들과의 거리보다 멀었던 모양이었다시민들이 신들을 부모로 여긴다면 신들은 그 이상의 존재를 막연하게 숭배했다. ‘감히’ 그 이름을 사용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건 이해했다다만 하필이면 이 상황에 예의 상위 창조주 이야기를 입에 담는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무의식중에 신을 찾는 건 힘든 사람들 뿐이라던데연구자는 입에서 맴도는 말을 삼켰다.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무렵 그들은 작은 오아시스 하나를 찾았다그들이 찾던 오아시스가 아니라는 건 멀리서 봐도 확실했다그 방향으로 날아가던 나비를 좇던 신은 야자수의 모습이 선명해지자 우뚝 걸음을 멈췄다연구자는 그를 올려다봤다쨍한 머리색 때문에 눈이 아파 잘 보이진 않았지만썩 즐거워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그가 탄 타조는 그 자리에서 몇 분간 멈춰 있다가 다시 천천히 발을 뗐다.

 

한때는 마을이 있었던 성 싶었다모래로 빚은 것처럼 생긴 건물들은 창문이 길고 좁았다한때 희었을 외벽은 먼지로 인해 누렇게 변해 있었고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발에 채였다전반적으로 그리 높은 집들이 아니었다신은 제일 먼저 오아시스로 향했다흙탕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수면 아래로 보이는 거뭇한 것들이 물고기인지 쓰레기인지는 판별하기 어려웠다신은 잠시 그대로 물을 관찰하다가 타조의 목을 밀었다새가 걷기 시작했다연구자는 나무 그늘 밑에 섰다.

 

어디 가세요?”

흔적 있나 보러.”

 

마치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 같았다찍힌 발자국을 따라 가면서 연구자는 혼자서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신은 드물다던 말을 떠올렸다무언가 잘못을 해서 냉동되어 있었고깨어난 뒤 상황 설명을 하자 캐묻는 일 없이 그러자고 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머리카락 따위를 채취해 알아보는 건 생물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몫이었고누가 여행을 떠날지 지정하는 것 또한 상관의 일이었다비유하자면 연구자는 자신이 탄 우주선에 대해 아주 기초적인 것만을 숙지한 채 달로 향하는 우주 비행사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돌이켜 생각해 보면 좀 더 많은 것을 알려 달라고 하고 왔어야 했을지도 몰랐다그러나 상관은 어째서인지 그가 신에 대해 충분히 많이 알고 있다고 판단한 듯 했다과거의 연구자는 그의 판단을 신뢰했다.

 

신은 문이 떨어져 나간 어느 건물로 들어섰다따라 들어가는 순간 냉기가 훅 끼쳐 왔다묘지 위에 건물을 세운 것 같은 구조였는데맨땅에 누운 비석 같은 것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어두운 실내에서 몇 번 날갯짓을 하던 나비가 떨어졌다타조가 무릎을 꿇자 신은 나비를 살폈고 가볍게 혀를 찼다.

 

날개가 핸드폰 액정보다 약했네.”

 

그는 더 가는 대신 나비가 떨어진 돌덩이 앞으로 몸을 내렸다연구자가 그 곁에 와서 섰다신은 먼지 쌓인 비석을 부드럽게 손으로 쓸었다새겨진 이름이 드러났다. …의 아담. 안에 든 게 남성체인 모양이었다. 신은 돌을 가볍게 두드리다가 손을 치웠다.

 

이런 게 한창 유행이던 때가 있었어난 원래 할 생각 없었는데다들 이런 유행은 따라 주는 거라고 해서 하나 만들었지.”

뭔가요?”

타임캡슐알아?”

신을 얼리는 거하고 비슷한가요?”

어떤 의미에선 그렇긴 해.”

 

신은 생각하는 눈치였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 즈음에는 어린 신들을 데려다 놓고 이런 걸 많이 했어소중한 물건 같은 거 땅에 묻고 나중에 발굴하기학교 단위로 운동장에 타임캡슐 묻기 같은 것도 했는데실제로는 대부분 잊어버렸을 걸누가 10년 뒤에 자기 초등학교 운동장 땅을 파.”

.”

초등학교라든가 그런 거 모르나.”

대충은 알아요옛날 신들의 학교.”

그러면 됐어하여튼 그게 한창 유행이다가 또 금방 시들해졌거든근데 우리 중에서 유난히 뛰어난 친구가 나 자신을 묻는 타임캡슐을 만들어 낸 거야지금 생각하면 음침하기 짝이 없는데 당시엔 다들 좋아했어저렴한 가격으로 우리랑 똑같은 모습의 존재를 만들고걔들이 최초의 피조물들이었던 것도 같네너희 같은 애들 있잖아어쨌든그렇게 만들고 나서 보관하고 싶은 기억을 넘겨준 뒤에 사막의 관짝에 넣는 거지.”

해서 뭐가 좋은데요?”

그런 식으로 잊고 싶은 기억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믿은 사람들도 있었겠고그게 영원히 사는 방법의 일종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겠고당시엔 돈 내고 목성에 땅 사는 놈들도 돌아다녔다고목성은 가스 행성인데 말야난들 아나?”

 

 그는 돌 표면을 다시 한 번 쓸어 보더니 타조에 탔다하고 싶은 거 하고 놀아라는 그의 목소리는 텅 빈 공간에서 메아리쳤다연구자는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신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들었다건물 외벽뿐 아니라 안쪽도 온통 희었다햇빛이 비치지 않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눈이 하얗게 멀어 버린 것 같아서연구자는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타조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아래의 사정 역시 확인하기 힘들었다하고 싶은 거 하고 놀라는 말은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거였다알긴 했다연구자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지하로 향했다.

 

 내려갈수록 기온은 낮아졌다연구자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주변은 신들의 감옥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실제로 잠들어 있는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차이점이었지만냉각 탱크도 눈에 띄었고 빈 캡슐들도 보였다함께 온 신은 없었다연구자는 귀를 기울였다벽 너머에서 일종의 기계음이 들렸다어떤 버튼을 연타하는 것 같은 높은 삑삑 소리그는 주위를 살폈다벽에 버튼이 하나 있었다이 공간이 정말 신들의 감옥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면그는 버튼을 눌렀고 벽은 회전문처럼 돌아갔다점점 커지는 틈 사이로 연구자는 어느 캡슐 앞에 선 신의 모습을 보았다손에 리모컨 하나가 쥐여져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이브.”

 

 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그러나 연구자는 그 말이 분명히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드디어 소리의 마법이 사용된 거였다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길 바랐고동시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았다주변이 따뜻해지고 있었다신은 리모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연구자는 캡슐 안의 얼굴을 보았다아마 어린 신이었을 거였다피가 다 빠져나간 채라도 갑자기 체온을 그렇게 올리면 그들의 몸은신이 명령했다사형 선고였다.

 

 “기다려.”

 

 하루 종일 연구자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나불거림은 동행인의 몫이었다너도 내가 모든 안드로이드들한테 인간 학살 명령을 내린 존재란 거 예측했잖아아니시민들한테 신 학살 명령을 내렸다고 해야 좀 더 이해하기 쉬운가원래부터 이 분야에서 유명했어죽고 싶다는 사람들 대신 죽여주기대체로 내 주변 사람들 위주로 해 주긴 했지신청을 받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평소에 죽고 싶다고 말하거나 객관적으로 죽고 싶어 보이는 사람들 목숨을 끊어 주는 거야아무리 빌어도 우리 신은 내 목숨을 끊어 주지 않았거든내가 또 한 공감 능력 해서 말야남들이 나처럼 힘들어 하는 걸 가만 두고 보기가 너무 지치더라고그래서 시작하게 됐어저기 저 애도 아마 깨어나면 죽고 싶어 했을 걸그래서 가장 편한 죽음을 준 거야너도 봤잖아거기 남아 있는 신은 단 한 명도 없었어.

 

신들이 같은 신을 죽이는 것에 왜 그렇게 충격을 받았는지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사실 이야기하기 힘들었다묻는다면 로봇 공학의 3원칙’ 따위나 운운할까물론 그런 식으로 설명을 시도했다간 이 미친 악신에게 비웃음을 받을 게 분명하긴 했다그는 창조자였고 로봇 공학의 3원칙이란 소설에나 존재하는 원칙임을 알 거였다설명을 할 수 있든 없든 불쾌하긴 매한가지였다그리고 그 불쾌함이 잘못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신들은 자신의 피조물을 자신들과 유사하게바꿔 말해 인간답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었다그들 본인도 짐승이 짐승을 죽이는 것에 마음 아파하던 존재들이었다지금 연구자 본인이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 탓인 셈이었다.

 

 “변명은 그만 하세요.”

 

 마침내 연구자가 말을 꺼낸 건 이튿날 아침이 다 되어서였다더 입을 다물고 있었다가는 낡은 팔다리를 교체하는 시기까지 후회를 하게 될 것만 같았다그는 말을 잇기 전에 짐을 챙겨 들쳐 멨다밤새 나비를 고친 걸 보아하니 판테온에 갈 의지가 있긴 한 듯 했다만일 정말 도착하게 된다면 이 신은 그들 역시 죽일까.

 

 “날 죽이고 싶어?”

 

 신이 말했다연구원은 그 말을 무시했다.

 

 “그럴 때의 죽고 싶다는 정말 죽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쪽이라고 했어요.”

 

 그날의 동행인은 상대적으로 조용했기 때문에 연구자는 그 전까지 들어왔던 정보들을 곱씹으면서 사막을 건넜다일전에 왜 시민들이 신을 찾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왔던 적이 있었다한참 만들어질 때만 해도 피조물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느니 뭐라느니 얘기가 많았다고날아다니는 자동차가 상용화될 거라는 상상만큼이나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속으로만 대꾸했었다.

 

 만일 그가 대학살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예상대로 되었을 수도 있었다그러나 그 사건 이후로 시민들은 자신들의 창조자를 모르게 되었다많은 인간들은 알지도 못하는 신을 숭배해 왔었다마찬가지로 인간과 판테온에 대해 막연한 환상만을 갖고 있는 시민들이 딱히 그들에게 악의를 품을 이유는 없었다그들이 과거에 벌인 만행이 있다는 건 알았으나 그 시기를 함께했던 지성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문제가 많은 신들이었다는 걸 알아도 추상적으로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신을 대체로 싫어했어.”

 

 퍼뜩 놀랐던 연구자는 그게 아침에 건넨 말에 대한 대답임을 깨달았다잠깐의 침묵.

 

 “당신들 신도 죽이셨나요?”

 “아니찾지도 못했어.”

 “판테온은 찾을 수 있으시겠어요?”

 “해봐야지.”

 

 신이 자신 있다는 듯이 웃었다그러나 그가 다시 앞을 응시했을 때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눈은 초점을 잃었다연구자가 고개를 돌렸다그날은 밤이 될 때까지 오아시스가 나오지 않았다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그렇게 사막에 물이 많았더라면 애초에 이런 여행을 떠날 필요도 없었을 것이었으며나아가 이 모래밭을 사막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었을 거였다연구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신은 점점 더 몸을 많이 뒤척였다타조 위에서 팔짱을 끼고 괜히 혀를 찼으며 평소보다도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다.

 

 명분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듯 했다연구자는 그렇게 판단했다무언가 남들이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한 뒤 어떤 업적을 내밀어 잘못을 덮는 경우가 있었다지성체들의 호와 불호에 대한 잣대가 단순하다고 믿는 이들성찰 없이 좋은 일을 함으로써 추한 부분을 가릴 수 있다고 보는 것들판테온을 빨리 찾으면 연구자가 신을 죽인 사건에 대해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그러나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연구자가 모닥불을 피웠고 타조에 기대앉은 신은 유리로 된 정사면체를 꺼냈다흐리게 들어온 모닥불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햇빛에 두었을 때보단 좀 더 불완전한 무지개였다연구자는 담요를 두르며 상대를 넘겨다보았다눈이 마주쳤다신이 프리즘을 흔들어 보였다.

 

신기루잡이야보이는 게 진짜인지 아닌지 이걸로 판별할 수 있어.”

그런 물건들을 그냥 저희 주지 그러셨어요지금 도시에서 그냥 쉬고 계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애꿎은 어린 신이 죽지도 않았을 거라고 연구자는 속으로 덧붙였다사실 척 봐서는 대체 그 유리 조각을 어떻게 써야 신기루 판정용으로 쓸 수 있을지 감이 안 잡히긴 했다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만 들였으면 충분히 사용 방법은 익힐 수 있었을 거였다애초에 최초의 시민들은 신들의 대리자로서 태어난 게 아니었던가신은 다시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이면서 유리를 주먹 속에 숨겼다.

 

이걸로 다 찾는 것도 아냐재능이 있어야지.”

재능 있으신가 봐요.”

 

실상 가볍게 던졌던 말이었다농담처럼대답이 재깍 돌아오지 않자 연구자는 멈칫했다신은 무언가를 곱씹는 듯 했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도 했다연구자는 기다렸다주제넘은 말이었다불경스러운 소리였다 따위의 대답이 돌아올까아니면침묵 끝에 신이 말했다.

 

있겠지.”

 

한참이 지나 연구자는 전에 혹시 만난 적이 있었냐고 물었다신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만나면 만난 거고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그런 거지 모르겠다는 답변이 왜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일단 연구자 본인은 신과의 만남을 기억하지 못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거지들이 가끔은 너무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이상하고 불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그와 같은 악신과 동질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모든 시민들은 대학살 사건을 기억했다그건 그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으나 의지를 갖고 행한 일은 아니었다당시 있었던 어떤 대기업은 타임캡슐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해당 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고위 임원으로 고용했다꽤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고 했다천천히 인간과 닮은 안드로이드들이 상용화됐다회사는 인간의 감정그러니까 죄책감이나 애착을 느낄 줄 아는 기계를 만들고자 했다당시에 태어난 이들을 최초의 시민들이라 불렀다.

 

신들은 소위 말하는 로봇 반란을 아주 오래 전부터 두려워해 왔다사측이 중앙 통제 장치를 갖고 있었던 건 따지고 보면 아주 합리적인 일이었다회사 소속의 누군가가 그걸 해킹해서 조작 방식을 바꾸리라 예상하지 못한 것도인류의 잘못은 아니었다실제로 초기엔 별 문제가 없었다회사는 일자리를 빼앗는 로봇이 아닌 사랑받는 로봇을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발도 미미한 편이었다어쩔 수 없이 수익이 줄어든 일부와 기계에 의존하는 게 비인간적이라고 믿는 몇몇이 불만의 목소리를 냈을 뿐.

 

세월이 흘렀다그들의 생활 터전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망가졌고 고위의 신들은 자신들이 만든 쓰레기로 더럽혀진 땅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동행하고 있는 신의 말을 빌리자면, ‘남겨진 건 불행한 신들뿐이었다.’ 기계들은 동족을 스스로 생산하는 법을 배웠다연구자는 물론 그 시기를 기억하지 못했다그는 한때 비싼 값으로 만들어졌던 구형’ 안드로이드였다인력이 부족해진 뒤 시민들은 동면하고 있던 그와 다른 동료들을 깨웠다신들이 사라진 땅에서 시민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기록해 넘겼다.

 

정말로 불행해 보여서 살해하신 거예요?”

그럼.”

그냥 약자를 이용한 스트레스 풀이는 아니셨고요?”

 

사막 한가운데였다연구자가 말을 던졌다사실은 대리만족이라는 용어를 쓰고 싶었다죽고 싶은데 자신이 죽기에는 겁이 너무 많아서스스로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위하며 남들을 멋대로 죽여버린 건 아닌지거기에서 일종의 쾌감을 느낀 건 아닌지신은 프리즘을 들어올렸다지평선의 아지랑이 부근에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그는 유리와 유리 너머를 가만히 관찰하다가 손을 내렸다.

 

 “거짓말 아니라니까내가 더 지켜보기 힘들어서 죽인 거야.”

 “일부러 그렇게 말하시는 거예요?”

 “뭐가?”

 

일종의 동족 혐오일 수도 있었다연구자는 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본인도 비슷한 충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그러나 2와 3을 더하면 5가 된다는 식으로 상식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뿐이지공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공감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만지켜보기 힘들어서 죽였다는 말의 비겁함은 너무 명확했다책임을 회피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을 해 대는 부류가 흔히 쓰는 화법이었다연구자는 그의 신이 꽤 똑똑한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죽여도 괜찮아요?”

근데 가능할까나는 날 못 죽였는데.”

질문은 잊어버리세요됐어요.”

그래충분하다니 기뻐.”

 

연구자는 콧잔등을 일그러뜨리고는 계속 나아갔다.

 

그날도 오아시스는 나오지 않았다한낮 무렵 지평선을 바라보던 신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타조를 몰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말리려던 연구자는 천천히 따라가기로 결정했다이전에 그가 한 말처럼 그들이 있는 사막은 생물이 제대로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원래 필멸자들은 생에 집착한다고 했다완전히 서로를 잃어버리기 전에 돌아올 거였다실제로 그는 저녁 무렵 망연히 모래밭에 앉아 있는 신을 발견했다곁에 타조가 쓰러져 있었다.

 

이 기계 타조는 고물이야.”

 

그가 말했다연구자는 타조의 부리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신은 여전히 예의 신기루잡이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너무 몰아붙이셨어요.”

그래도 좀 더 빨랐다면 잡을 수 있었을아냐아니다이번엔 실수한 게 맞아이상해분명 이걸 통해 봤을 때 그게 진짜인 것처럼 잡혔거든그렇지만 피곤하면 실수할 수도 있지난 원래 이런 기술적인 문제에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거든피곤해서 잘못 봤나 봐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져진짜 이상하네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유사한 현상이 반복됐다아무 것도 나오지 않거나기껏 달려갔는데 아무 것도 없거나신은 여전히 무언가를 발견하면 뭐가 있다느니 곧 갈 수 있을 거라느니 떠벌렸지만 더 이상 돌진하진 않았다또 그는 목적지가 가짜로 보이면 갑자기 멈춰 서서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 떠들어 대곤 했다무지개니 신기루니 하는 것들이 세상에 있어서 괜히 사람들이 그걸 뒤쫓게 된다고처음부터 헛된 희망어중간한 재능닿을 수 없는 롤모델이 없었다면 이런 식으로 고통받지도 않았을 거라고그는 가끔 정말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연구자가 돌아가는데 필요한 날들을 세는 횟수 또한 늘어났다이쯤 되면 원래 있던 도시로 바로 돌아가는 것보다 사막 어딘가에 있을 다른 도시를 찾아 들어간 다음 준비해서 돌아가는 게 나을 거였다본인은 괜찮았다신이 먹을 음식이 부족해져 가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시체는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정작 신 본인은 그걸 계산하지 않는 듯 했다학자는 차마 그에게 판테온을 찾을 수 있겠냐는 질문을 재차 하지 못했다여전히 말은 많았지만 나오는 표현들이 점점 자조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저기."

 

연구자가 앞을 가리킨 건 예의 그 사건으로부터 보름 정도가 더 지난 후였다. 모래 바람 틈으로 흐릿하게 번쩍이는 돔이 있었다. 돔의 아래 부분은 철로 된 행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말이 좋아 행성이지 기계 타조를 타고 쉽게 뛰어넘을 법한 야트막한 철 울타리였다. 신은 대꾸하지 않았다. 연구자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인상을 썼다. 돔의 모양새가 퍽 익숙했다. 새 도시를 발견한 것이었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신은 무언가를 찾았다는 사실 자체에 기분이 들떠 보였다. 최소한 연구자의 눈에는 그래 보였다. 빛나는 눈. 타조의 깃털을 세게 쥔 손. 연구자가 주위를 제대로 둘러본 건 성문 앞까지 온 뒤였다. 그는 혼자였다기다렸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그는 잠시 주변을 살피다가 성문을 두드렸다. 몇 번쯤 두드린 뒤에야 문이 열렸다. 그때까지도 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물이 부족해서 쓰러졌는지도 몰랐다. 연구자는 간단한 음식과 물품을 받아 온 길을 되짚어 걸어갔다얼마쯤 걸었을까빙빙 도는 것은 아닌가 싶어진 순간에야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연구자는 다가갔다신이 모래밭에 앉아 있었다연구자는 타조의 상태를 확인했다멀쩡해 보였다.

 

어땠어가짜였어?”

아뇨진짜예요들렀다 가요.”

들렀다 안 가.”

식량도 떨어진 건 아세요?”

그러니까안 간다고만신전 찾는 건 포기야내가 더 이상 진짜랑 가짜를 구분 못 해너무 많이 실패해서 이젠 진짜를 봐도 꿈이겠거니 하고 지나간다고이젠 능력이 없어애초에 처음부터 판테온엔 고개도 못 디밀어 본 날 데리고 가겠다고 한 게 웃긴 일 아닌가?”

 

그나마 있는 희망이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연구자는 발뒤꿈치로 모래밭을 찍어 눌렀다그래도 가다 보면 희망이 있다는 소리를 하면 될까그런 소리를 해서 들을까.

 

왜 네가 이 여행을 오게 됐는지 알아?”

위에서 절 골라서요.”

내가 너로 해 달라고 했어지금의 나는 이렇게 무능해도 과거의 나는 분명 똑똑했었으니까과거의 날 데리고 가면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거든기껏 자라서 내가 될 널 데리고 뭘 하겠다고.”

 

연구자는 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의 복제품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것 또한 두려워했기에 자신과 비슷한 형태의 안드로이드를 만들면 스스로에게 특정한 표식을 새겼다고 했다문신이라든가염색 같은 방식으로그가 마침내 말했다.

 

제 미래가 찾아와서 네 인생은 망했다고 알려 주길 바란 적은 없어요.”

미안하게 됐네.”

"그리고 망하지도 않을 거고요. 전 자라서 당신이 되지 않아요."

"확실해?"

"네."

"천재라고 고용된 주제에 천재들만 간다는 판테온엔 가지도 못하고 남겨진 사람들을 죽인 뒤 얼마 남지도 않은 인간들한테 검거돼서 백 년은 얼어붙어 있었던, 그리고 결국 판테온에 갈 재능도 없는 이 꼴을 보고도?"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제 와서."

 

연구자는 모래밭에 나동그라진 프리즘을 곁눈질했다.

 

"가요."

"어디로. 절망 속으로?"

 

대답은 없었다.

 

 


 

 

2019 (10월~)

 

여기서부터는 좀 놓기 시작해서 커뮤 로그나 커미션밖에 없네요....

커뮤 배경 : 서판 마법학교입니다. '로임'은 마법사를 뜻하는 세계관 내 용어이며, 마법은 빛의 신 로웨나의 은총으로 인한 산물입니다. 주동인물인 빅토리아 시즈파이어는 물 속성 마법 치유학과인데, 물 속성은 악신(=바다의 신)의 마법이라고 하여 비교적 터부시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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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king Under

 

BGM _ Where’s My love?

Victoria Ceasefire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이 한 달 째였다. 빅토리아는 마차의 한 구석에 앉아 하늘을 응시했다. 2학년의 첫 번째 학기가 시작될 무렵 한 통의 편지가 기숙사로 날아들었다. 처음에는 실망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집에서 편지가 오길 기다리는 중이었으니까. 편지에는 독특하게 생긴 밀랍 인장이 붙어 있었다. 발신인으로 적혀 있는 이름도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 유려한 필기체로 적혀 있는 비터레인.’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오래 전에 실종되었던 어머니를 드디어 찾았다는 거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머니 쪽의 친척이라 소개하고 있었는데, 빅토리아의 부모의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신들이 잠시 지원해 주고 있다고 했다. 솔직히 믿을까 말까 고민이 많이 되긴 했다. 대체 평민의 아내였던 어머니가 어떻게 백작가 사람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의심을 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급했다. 어머니가 돌아오면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일단 로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 거였다. 물 속성의 치유 로임이라고 하면 나름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인 헤더 비터레인은 물을 좋아했으니까.

 

고향에 다녀오겠다는 서류를 빅토리아는 편지와 함께 제출했다. 그건 거의 통보였다. 안 된다고 했어도 어떻게든 내려갔을 거였다. 찾아가겠다는 글을 보내자 비터레인 백작가에서는 마차를 한 대 보냈다. 빅토리아는 처음 아카데미에 올 때 들고 온 트렁크에 최소한의 짐만을 챙겼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수업 자료와 책들은 기숙사에 남았다. 목걸이를 한 토끼 인형과 타라 인형은 빈 침대를 차지했다. 다도 세트는 책상 위에 놓였다.

 

엠마.”

 

왜 그 아이에게 인형을 맡길 생각을 했는지는 돌이켜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분명한 건 방에 둔 두 인형은 다른 두 룸메이트가 각각 돌봐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는 점이었다. 인형들은 각기 빅토리아가 스쳐 지나온 장소들을 상징했다. 토끼 인형 미슬토는 도시에서 동전을 던지고 받은 것이었고, 타라 인형은 신전에서 받은 것이었다. 그만큼 소중했기에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고 가고 싶진 않았다.

 

얘 좀 데리고 있어 줘.”

 

아홉 살 때부터, 아니, 정확히는 여섯 살 때부터 사람들은 빅토리아를 보고 아이답지 않게 말한다고 이야기했다. 그에게는 항상 귀여운 맛이 없었으며 태도는 늘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가 아이가 아닌 것은 아니었으므로. 다른 아이들이 일찍 떼는 어떤 것들을 빅토리아는 조금 오래 간직했다.

 

굳이 메리 인형을 엠마에게 맡긴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애는 배 같았다. 닻 없이 계속 먼 바다로 흘러가려고 하는 배. 처음으로 바다 이야기를 했을 때 엠마는 어떤 약속을 하나 했다. 빅토리아는 자신이 떠나 있을 때 엠마가 그 약속을 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터무니없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오래 다녀올 것도 아닌데. 잠깐 다녀오는 동안 그가 갑자기 먼 바다로 나가겠다는 이야기를 하진 않을 텐데. 그러나 어떤 믿음은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탄생해 정신을 강하게 흔들어 놓곤 했다.

내가 돌아오면 돌려줘야 해.”

 

당부들.

 

빅토리아는 완전히 아카데미를 나서기 전에 미슬토의 목걸이를 고쳐 매 주었다. 샤비가 인형에게 넘겨 준 나무 목걸이는 이제 정말 반질반질해져 나무 색의 돌처럼 변해 있었다. 룸메이트인 에이프릴과 유페미아에게는 며칠간 집에 다녀오겠다고 말했고, 머리카락은 한참을 다듬어 오즈왈드가 준 흰 리본을 써 양갈래로 땋아 묶었다. 사실 그에게 땋는 걸 도와 달라고 할까, 싶었지만 유난이다 싶어 참았던 것이었다.

 

계약 친구 며칠간 휴업이야.”

 

세실에겐 그렇게 말했고.

 

나 없어도 편지는 잘 쓰고 있어야 해.”

 

카엘리에게는 그렇게 설명했으며,

 

돌아와서 다시 티파티 하자.”

 

포시테에게는 약속을 했다. 오딘과 마지막으로 간단한 티푸드 시식 행사를 하기도 했더랬다. 빅토리아는 정말 오랫동안 떠나 있을 사람처럼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녀오는 데 그렇게까지 긴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라고 인지했음에도 그랬다. 그는 첫 번째 방학을 생각했다. 돌아와서 베이킹을 하기로 한 샤비. 마지막으로 같이 뭉쳐서 잔 에이프릴과 유페미아. 세실의 주소를 적었고 카엘리와는 어떤 치유사가 되고 싶은지 얘기했더랬다. 신에 대한 얘기를 나눈 엠마. 죽은 뒤의 삶에 대해 대화한 오즈왈드.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차를 마신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쫓아 준 포시테. 어쩐지 늘 툴툴대게 되는 그웬돌린 체스터, 아름다운 로사, 언젠가 꽃씨를 뿌리자는 이야기를 했던 마이디, 조용하다고 느꼈던 데이지와 반짝거리는 란드그리드. 악튜러스에게는 밥을 잘 챙겨 먹으라는 소리를 쓸데없이 한 번 더 얹었고 키이라에게는 성에 간단 말을 했다. 카일에게는 딱히 약속은 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도 그를 위한 간식을 하나쯤은 갖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잔머리 잘 굴리는 케니스, 돈 이야기를 나눴던 리페, 가끔 과자를 갖다 주거나 엎드려 있을 때 담요를 주던 타키, 부모님께 그림으로 된 편지를 적던 세이. 무기력한 테오도르. 교수님 얼굴에 낙서를 하는 장난꾸러기 챠챠와 눈 덮인 겨울을 닮은 푸단. 칼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마법 매개체를 보러 가자고 약속했던 라리에타와 씩씩한 걸음의 제이스. 바로 곁에서 함께 성장하고 있다 보면 변화가 눈에 잘 띄지 않기 마련이었다. 빅토리아는 자신이 돌아왔을 때도 그들이 거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며, 자신 역시 같은 모습으로 돌아올 것임을 알았다.

 

일단, 안다고 생각은 했다.

 

대륙을 건너는 일은 피로감을 불러일으켰다. 두 명의 마부는 둘 다 성인 남성이었는데, 빅토리아에겐 거의 말을 걸지 않았다. 빅토리아로서는 그 편이 차라리 더 달갑긴 했다. 마부들은 피로해질 때면 서로 자리를 교체해 가며 말을 몰았고, 저녁이 되면 두 개의 방을 잡았다. 독특한 점은 그들이 빅토리아를 아가씨라고 불렀다는 점이었다. 보통 거리의 사람들이야 하급 로임의 옷을 입고 있는 걸 보고 아가씨로 지레짐작해 칭하긴 한다지만, 그들은 상황이 달랐다. 빅토리아는 비터레인이 아니라 시즈파이어였다. 평민 여자애를 굳이 그렇게 높일 이유가 있는 것이었던가?

 

묻지 않았으니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나마 말을 한다지만, 빅토리아는 원래 외부인들에게는 장교 빅터였다. 비비도, 빅토리아도, 비바도 아닌 장교빅터. 그는 창문이 있는 마차에 앉아 가끔씩 마법을 연습하며 시간을 보냈다.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수정구는 마차에서도 다루기 무난한 물건들 중 하나였다.

 

오랫동안 이동한 마차는 마침내 어느 성 안으로 들어갔고, 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저택 앞에 펼쳐진 정원은 아카데미의 미로 정원을 연상시켰다. 샛길도 많고 나무도 많았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죄다 가지가 둥그렇게 깎여 막대 위에 초록색 구체가 올라간 것 같은 형태를 띠었다. 초록색을 띠는 이파리가 팔랑거렸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었다.

 

마차의 문이 열렸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귀족들의 생활양식에 대해서는 다른 아이들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현관에서 기다리던 메이드는 빅토리아를 바로 응접실로 안내했다. 기다리고 있으면 가주님이 나올 거라고 했다. 빅토리아는 굳이 부모님이 어디 있는지 캐묻지 않았다. 왜 한 명의 가주가 아니라 가주님들인지도 묻지 않았다. 기다리면 답이 돌아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응접실은 아름다웠으나 빅토리아는 배치된 물건들로부터 미세한 불안정의 흔적을 읽었다. 장식용 잔 바닥엔 때가 타 있었으며 화려한 장식품들 사이로 빈 공간이 자리했다. 성도 있는 귀족 집안에서 왜 이런 부분을 관리하지 않았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런 상황이니 그간 연락을 하지 못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재산보다 빚이 사실상 더 많은 귀족 가문일 수도 있었다.

 

안락의자에 앉았을 때 응접실 문이 열렸다.

 

드디어 왔구나.”

 

구두 소리.

 

들어오는 남녀의 모습이 어쩐지 익숙한 것 같다고 빅토리아는 생각했다. 제일 먼저 들어오는 여성은 흰 담비털이 달린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는데, 긴 자주색의 직모가 허리까지 내려왔다. 피부는 완벽하게 희었고 눈꼬리는 위로 올라가 있었는데, 홍채의 색은 검정이었다. 남성의 경우엔 머리카락이 보라색, 홍채는 흰 편이었고 여성보다 한 뼘이 더 컸다. 가죽 옷을 입은 그는 중년에서 청년 사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함께 들어온 여성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 더 젊어 보이는 낯이었다.

 

네가 헤더의 딸이니?”

 

여성이 물었다.

 

.”

이름이 뭐니?”

빅토리아 시즈파이어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로 그는 빅토리아를 잠시간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머물다 가렴. 아직 헤더가 완전히 낫지 않았단다.”

지금 볼 수는 없는 걸까요? 늦어진다면 아카데미로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잘 해 줄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게 있도록 해.”

 

여성은 그러면서 조용히 웃었다. 다른 한 사람이 물었다.

 

로임이라고 들었다. 치유학과라고 들었는데, 맞느냐?”

.”

헤더가 자랑스러워 하겠구나.”

 

그들이 남매라는 것을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도착한 날 밤 잠들기 전에 입이 가벼운 시종들이 조잘거리는 것을 들은 덕분이었다. 각기 결혼을 하긴 했지만 가족들과 그리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통상적인 정략결혼의 결과물이겠거니 했다. 특이한 점은 이 두 가주가 친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와 명백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부부도 아닌 남녀가 함께 가주를 했다는 건 꽤 파격적인 일이었다. 애초에 여성 가주의 존재 자체가 상당히 드물기도 했고. 그렇기에 의외였다.

 

애초에 옛 주인님께서 첫째를 딸로 낳지 않으셨다면, 최소한 아들이 사생아가 아니었더라면!”

 

문 밖에서 시종이 말했다. 누군가 분간하기 힘든 말씨로 날카롭게 속삭였고 말소리는 잦아들었다. 문가에 서 있던 빅토리아는 최대한 조용히 도로 침대로 돌아갔다.

 

이상했다. 이건 빅토리아가 아는 세계가 아니었다. 익숙한 세계는 바닷가 마을과 어느 로엠교 신전과 아카데미에 자리했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바닷가 마을에서 그는 어머니로부터 글자를 배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글을 배우는 데 크게 개입을 하지 않았었다. 아카데미에서 만난 다른 평민 친구들의 부모님들 중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친구들 본인도 아홉 살인데 아직 책을 잘 읽고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크게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걸로 기억했다. 그냥 사는 지역이 다르니까 차이가 발생하는 모양이라고, 자기가 사는 로엠 왕국의 그 지역이 특별했을 뿐이라고 믿었다.

 

아버지는 분명 평민이었다. 시즈파이어는 귀족의 성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그간 있었던 어떤 부조화는 모두 어머니가 귀족이라면 해소가 되었다. 9살 무렵, 아카데미에서 같은 치유학과인 세이는 자신의 가족들이 글을 읽지 못한다고 했다. 그게 보통일 거였다. 아마. 어쩌다가 자신이 아홉 살에 남들보다 유려한 필체를 갖게 되었는지 좀 더 생각해 봤어야 했다. 물론 그의 그 필체는 신전에 와서야 완전해졌지만, 읽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친 것은 어머니였다.

 

가주들은 헤더 시즈파이어, 정확히는 헤더 비터레인이 자신들의 막내 동생이었다고 이야기했다. 빅토리아는 그들이 그래서 왜 이제 와서 자신의 어머니를 찾았는지에 의문을 느꼈다. 돈이 부족한 귀족 집안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정상적인 방식으로 어머니가 분가해 나온 거라면 못 찾았을 리 없었다. 빅토리아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문이 열리고 시종 한 사람이 들어왔다.

 

아가씨, 마실 물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필요하신 건 달리 없으시고요?”

저희 부모님은 괜찮으신가요?”

 

짧은 침묵이 있었다. 일어나 앉으며 표정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시종이 화제를 돌렸다.

 

아마 잘 계실 겁니다. 저택을 너무 돌아다니시진 않는 게 좋아요.”

그런가요.”

, 저택에 마법이 깃든 장소들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저기 지하에는 보통 사람들은 열 수 없는 금고가 하나 있어요.”

 

빅터가 눈썹을 올렸다. 시종이 말을 이었다. 어째서인지 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예전에 어떤 로임이 만들어 준 것이라 하더군요. 마법적인 금고라, 부숴서는 열 수 없고 열쇠를 사용하거나 로임의 특별한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더라고요. 아가씨의 부모님께서는 말씀해 주신 적이 없나요?”

죄송해요.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 얘기가 끝난 후 하인은 황급히 떠났다. 빅토리아는 닫힌 문을 잠시 응시하다가 관심을 돌렸다. 방은 단정했다. 침대가 하나, 아이가 몸을 통과해 나갈 수 있을 법한 창이 하나 있었고 침대 옆엔 옷장과 화장대가 자리했다. 무언가를 수납할 만한 공간은 많지 않았는데, 그나마 문 옆에 작은 책꽂이가 있긴 했다. 책은 두어 권밖에 꽂혀 있지 않았다. 벽은 일단 돌로 된 것 같았다. 나름 표면을 깨끗하게 다듬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다가가면 냉기가 풍겨 나오곤 했다. 떨어지는 달빛 속에서는 아름다운 돌 감옥처럼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서둘러 나타났다 떠난 시종 이후로는 한동안 밖에서 말을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빅토리아는 누워서 몸을 뒤척였다. 침대가 다소 딱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어 번 깜박이는 눈. 그는 결국 몸을 일으켜 시트를 더듬었다. 무언가 딱딱한 것이 눌렸다. 빅토리아는 침대 옆으로 내려와 시트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주머니가 잡혔다.

 

끌어낸 주머니에는 한 문장이 자수로 적혀 있었다. 헤더 비터레인,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담아. 안은 빈 채였다.

 

빅토리아가 아는, 어머니가 제일 좋아했던 여행지는 아버지가 한때 살았다던 바닷가 근처에 자리했다. 원래 안에 있었던 게 뭐든 이런 걸 시트 밑에 둔 걸 보면 정말로 어머니가 썼던 방인 게 분명하다고 빅토리아는 생각했다. 창틀엔 먼지가 있었고 책꽂이는 조금 낡아 있었다. 누가 일부러 더 무언가를 끼워 넣고 갔을 것 같지 않았다.

 

잠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빅토리아는 그것을 대충 트렁크 근처에 얹어 놓았다. 가족들을 만났을 때 묻고 싶은 것이 자꾸 늘어 가고 있었다. 어쨌거나 밤은 깊어 가고 있었으므로 중요한 것들은 날이 밝았을 때 확인해도 좋을 것이었다. 그는 베개를 끌어안고 반쯤 엎드려 잠을 청했다.

 

어지러운 꿈을 꾸었던 것도 같았다. 빅토리아는 기묘한 냉기 속에서 잠에서 깨어났다. 몸을 뒤척이려는 순간 사지에서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참는 숨. 찰나의 순간 그는 공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정구는 머리맡에 있었다. 잡아채며 실드 마법을 쓰는 순간 구는 언제나처럼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며 손 위로 떠올랐다.

 

무슨…….”

 

움직이지 않는 몸을 끌며 문으로 나가가 밀쳤을 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빅토리아는 이를 악물고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유리에 금이 가며 파편이 쏟아져 내렸다. 몰아치는 바람. 그제야 잠깐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가방을 챙겨들었다.

 

뭐가 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방 안에 계속 머물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빅토리아는 물 속성의 푸른 실드를 다시 몸 주위에 형성시켰다. 방의 위치는 대략 2층 높이. 비행은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시도해 볼 여지는 있으니까. 창틀을 짚는 순간 깨진 유리 파편에 긁힌 살갗에서 피가 흘렀다. 한 팔로 가방을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수정구를 든 채, 그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몸 주위를 구처럼 감싼 실드는 풀밭에 떨어진 공처럼 두 번 튀고 사라졌다. 하마터면 장미 덤불에 얼굴을 박을 뻔 하긴 했지만, 빅토리아는 간신히 균형을 잡는 데 성공했다. 물 속성이어서인지 기분 탓인지 무속성 실드를 썼을 때보다 충격 흡수는 잘 됐던 것 같았다. 빅토리아는 손목과 발목의 관절을 풀어준 뒤 가방을 고쳐 들었다.

 

저택은 고요했다. 불빛 새어나오는 창도, 늦게 일하는 시종들의 목소리도 없는 곳. 미로 같은 정원에는 등불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유독 더 새까매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구름이 낀 날이었던 탓에 달빛이 흐렸다. 시선이 떨어진 곳의 철문에 닿았다가 현관 쪽을 향했다. 짧은 고민 끝에 빅토리아는 저택으로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무 그림자 밑에서 짧게 수정구가 빛을 발하며 소리를 흡수했다. 어쩌면 건물에 머무는 모든 사람들이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었다. 혹자는 오만하다고 하겠지만 일단 그게 그의 최선이었다.

 

저택 문은 열려 있었다. 빛이나 불, 전격 속성의 로임이 아니었으므로 일단은 어둠 속을 걸어야 했다. 일단은 그 편이 낫기도 했다. 어둠 속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복도에서 걸음을 천천히 떼면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암살자들을 위한 집 같았다. 건물의 구조를 알 수 없었기에, 그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문을 먼저 열었다. 텁텁한 종이 냄새가 얼굴로 훅 끼쳐 들어왔다. 향을 통해 빅토리아는 자신이 서재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내심 두려웠는지도 몰랐다. 아닌 척 해도 사실 무의식중에 어떤 불길한 예감을 받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괜찮은지 먼저 확인해 봐야 할 판에 굳이 빈 것이 분명한 서재로 들어갔으니까. 방엔 큰 창이 있어 격자무늬 그림자가 카펫에 드리워지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흐린 빛 끝에 걸린 책상 쪽으로 향했다. 책상 자체는 깨끗했으나 자물쇠가 있는 서랍이 눈에 띄었다. 말없이 자물쇠를 손끝으로 건드리자 수정구는 짧게 떠오르며 빛을 냈고, 서랍은 열렸다. 찰나의 순간 빅토리아는 두 가지를 보았다. 서랍 속의 편지들. 그리고 책꽂이에 진열된 기묘한 약초들.

 

.”

 

봉인의 형태가 눈에 익었다. 그는 조심스레 봉투들을 꺼내들었다. 뜯긴 틈으로 보이는 것은 한동안 짐 시즈파이어에게 보냈던 편지들이었다. 보관된 것들을 건드리고 있자니 신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도 몇 통 나왔다. 빅토리아가 로임이 되었으며 구체적인 연락처는 알려줄 수 없다고 결론짓는 사제의 문장이 눈에 띄었다.

 

몸을 돌리는 순간 달이 구름을 벗어났다. 쏟아지는 달빛이 선명하게 비추어 보이는 약초들. 병들. 진열대. 빅토리아는 치유학과였고,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건 약초가 아니었다. 수업에서도 잘 다루어지지 않는 독초들이었지. 해독제들 사이로 진단을 위해 언급되고 지나간 풀들로, 웬만해서는 키우지도 않는 식물들이었다.

 

방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창문이 깨졌어.”

 

빅토리아는 재빨리 책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한참의 고요. 마침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숨을 참았다. 기다려도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달이 다시금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나올 때 그는 잠깐 바깥의 그림자를 확인했다. 사람 그림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일어났을 때 그는 다시 혼자였다.

 

이상한 일이었으나, 빅토리아는 그날 정확히 어떻게 저택을 빠져나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깨어났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온 몸의 감각이 갑자기 배로 선명해졌다는 사실만 떠오를 뿐이었다. 미로 같은 정원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어쩌다가 지나가는 밤 마차를 잡아타고 성을 벗어났는지도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는 모든 것이 로엔나의 보살핌 덕에 가능했던 거라고 판단했다.

 

베인 자리에서 흐르던 피가 굳어 손바닥이 피투성이였으나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챈 건 이후 찾아간 신전의 사제들이었다. 그들이 상처를 치료해 주는 동안 빅토리아는 계속해서 퍼즐을 맞추려 노력했다. 이튿날 사제들과 함께 돌아간 바닷가 마을의 집은 비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이 돌아오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웃들은 빅토리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애초에 어머니가 아이였던 그를 굳이 이웃들에게 소개하고 다니지도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주민들은 짐 시즈파이어가 아직도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나저나, 짐 녀석. 생각보다 굉장한 아내를 두고 있었던데? 전에 백작가에서 찾아와서 그 인간하고 아내 봤냐고 물어보고 다니고 그랬어.”

 

누군가가 말했다.

 

사제 중 하나는 빅토리아를 다시 아카데미로 데리고 갔다. 혼자 갈 수 있다고 했지만, 혹시나 모른다며 동행한 것이었다. 맞춰지지 않던 퍼즐에 대한 해답은 돌아간 날 저녁에 도출됐다. 살짝 뜯어진 메리 인형의 다리에서 황금색 열쇠 하나가 나왔던 것이었다. 상당히 유려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빅토리아는 단박에 그게 보통의 열쇠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갔다. 감정적으로는 힘들었다. 아마 어머니는 어떠한 이유로 백작가가 싫어 그 곳을 벗어나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을 거였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이야기했던 바다 여행 당시 헤더는 짐을 처음으로 만난 듯 했다. 아마 그 과정에서 금고 열쇠를 가져다가 인형에 넣어 버린 모양이었고.

 

빅토리아는 한때 자신이 온전히 뜻을 알지 못했던 말들과 사실들을 그제야 이해했다. 어머니의 티파티. 파란 꽃이 그려진 도자기. 바다를 좋아하는 어머니. 글을 알던 부모님. 계속해서 반복되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 동화. 저택의 응접실. 그는 감옥 같던 돌벽을 생각했다. 그런 곳에서 혼자 잠드는 사람이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긴 힘들 거였다. 자신의 부모와 어머니의 두 손위 남매가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편이라는 것을 떠올렸고 늘어서 있던 독초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공허했다. 해일이 오기 전 물이 완전히 빠져 버린 바닷가처럼. 짐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에게 근래 보냈던 편지들은 죄다 백작가의 서랍 안에 있었다.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을까. 아니면 아버지마저 어머니를 찾으러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금 목숨을 잃었을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컵이 깨졌다. 물이 흘러내렸다. 빅토리아는 자신이 경질 강화 마법을 걸고 있던 유리잔을 내려다보았다. 컵에 담겨 있던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구토감이 올라왔다.

 

잠시만…….”

 

빅토리아는 의자를 밀치며 일어서 창문 밖에 고개를 처박았다. 물은 싫었다. 물소리를 듣다가는 정말로 토해 버릴 것 같았다. 강과 호수와 바다는 인간을 싫어하는 그 망할 신의 영역이었다. 어머니로 모자라 아버지마저 낚아채 간 그 저주받을 신! 헛구역질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목을 긁었다가 잦아들었다. 빅토리아는 흘러내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물 속성 마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저주스러웠다. 무능했다. 한없이 무능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갖고 장난을 친 백작가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그건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었다.

 

빅토리아 시즈파이어는 물 속성 치유학과였으므로.

 

 

 


 

 

2020

약판타지 괴담 학원물(소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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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드네의 석류는 물에서 자란다

 

 

 

"선생님, 방학 숙제 말씀 안 해 주셨어요."

 

범생이. 명사. 은어. '모범생.' 얕잡아 이르는 어감이 있음. 사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그러하였으나, 깊게 들어가면 퍽 다채로운 의미를 지니는 단어였다. 그 단어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을 뜻하기도 했고, 똑똑한 아이에 대한 질투를 반영하기도 했으며, 사회성이 없어 보이는 아이에 대한 조롱을 돌려서 전할 때도 있었고, 가끔은 노력하는 꼴불견들을 지칭하여 튀어나오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은설이 '똑똑한 아이' 축에는 들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본질적으로 무식한 사람이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얻어 내려면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혹자는 사회가, 그리고 조직이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천재와 노력하는 둔재가 있다면 틀림없이 그러니까 후자가 빛을 받을 거라고. 행복해지고 싶다면 애쓰라고. 명언집과 학습용 방송들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기만했다.

 

유은설은 범생이었다. 그의 등수는 대부분의 경우 교내 10위권 내에 들었으나, 단 한 번도 1등은 한 적이 없었고 가끔은 2등마저 놓치곤 했다. 그리고 은설은 자신이 만점을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얄팍한 이유로 노력하길 그만 둘 거였다면 초등학교 시절 다른 아이들에게 질타를 받았을 때 일찌감치 공부를 때려쳤어야 했다. 게다가 신록고는 그가 다닌 초등학교나 중학교보다 훨씬 환경이 양호했다. 귀신 들린 학교라는 소리를 들어도 집보다 나았고 다른 학교보다 좋았다. 일찌감치 장하읍으로 이사를 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괴롭히는 아이들도 적었고 마을이 작아서인지 '지나치게' 부유한 아이들도 드물었다. 은설로서는 동창과 부모에게 공격받을 일이 감소했으니 좋고, 은설의 부모로서는 학부모 모임에서 상대적 열등감을 느끼고 맏딸에게 스트레스를 쏟아낼 일이 줄어들었으니 좋은 일이었다. 따라서 이 '최고의 환경' 속에서 유은설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일주일 갖고 무슨 방학 숙제냐, 초등학생도 아니고. 공부 잘 해 올 거지?"

"네에."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부모와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7일의 방학은 지나치게 길었다. 은설은 최대한 느리게 가방을 쌌다. 틀림없이 7일 내로 어머니나 아버지 측에서 딸의 존재를 감당하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는 날이 생길 것이었다. 그들의 집은 세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도시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살던 집은 장하읍에 있는 집보다 훨씬 비좁고 축축했는데, 당연히 욕을 먹거나 얻어맞는 일이 근래보다도 훨씬 많았었다. 왜 혼이 났는지를 돌이켜 보면 어머니한테 혼났을 때의 이유와 아버지에게 한 소리를 들었을 때의 원인이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훈육 방침이 일관적이지 않았단 의미였다.

 

어머니는 항상 공부를 잘 해야지만 자신들처럼 살지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실망했다는 말을 자주 썼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매를 들었다. 떨어진 성적, 못한 발표, 교사로부터 전달받지 못한 칭찬, 찌는 살. 아버지의 경우 설명이 많지 않았다. 그는 밖에 나갈 때는 늘 말쑥한 차림을 유지했는데, 은설로 인해 자존심이 망가졌다고 생각할 때 매를 들었다. 부유한 그의 급우들, 청소부나 택배 배달원에게 보내는 '지나치게' 친절한 인사, 의견의 충돌, 밖에서 듣는 무당 집안과 관련된 이야기. 그들은 딸이 완벽하고 고고하기를 희망했고 은설은 끔찍할 정도로 불완전했다. 그나마 학교에 있을 때는 성적만 잘 받으면 그들 둘의 희망사항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었지만 집에 가면 또 상황이 바뀔 것이었다.

 

비가 내렸다. 창 밖으로 시선이 이동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져 밖이 하얗게 되면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문득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방학식은 끝난 뒤였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교실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은설은 우산을 같이 쓸 만한 사람이 없으리란 것을 알았다. 있어도 문제였다. '진짜' 방학 기간 동안 집에서 볼 책을 챙겨 가야 하는데, 두 사람이 한 우산을 썼다가는 사람이 젖거나 책이 젖거나 둘 중 하나의 문제는 생기고 말 거였다. 도와 준 친구보고 젖으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제 옷에 물이 너무 많이 묻으면 집에 있는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거였다. 가족들은 반지하의 습한 공기에 질려 있었고 비슷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들을 꺼렸다. 젖은 옷, 젖은 종이, 벽지에 스미는 빗물 같은 것들. 그렇다고 해서 연락을 하면 또 데리러 와 주진 않을 게 분명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의미였다.

 

"잘 됐지, 뭐."

 

혼잣말이 나왔다. 가방 지퍼가 쭉 소리를 내며 잠겼다. 짐을 들고 나올 때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교사의 모습이 보였다. 은설은 재빨리 교실 벽 뒤에 웅크려 숨었다. 범생이와 문제아는 본질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공유했다. 어느 쪽이든 사랑받고 싶어 행동한다는 점에서는 같았기 때문에. 다만 문제아의 경우 사람들이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이라도 한다면, 범생이의 경우 아이에게 관심을 덜 둔다는 점이 차이였다. 교사가 잠깐 멈췄다가 이내 다시 이동했다. 아마 땋은 머리카락을 보고 잘못 보았겠거니 하고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발소리가 멀어졌고, 그는 고개를 길게 빼고 밖을 확인했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몸을 물리는 순간 뒷문에서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퍼뜩 놀라 돌아보았을 때 문가에 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뒷문이 실처럼 가늘게 열려 있었다. 주번이 잠그질 않은 걸까, 의아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순간 틈이 탁 소리와 함께 닫혔다.

 

원래 비가 오는 날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굽어드는 복도 쪽에 있는 창들은 바람이 강하게 불 때 으레 짐승 같은 울음소리로 울었고 새어 들어온 바람은 먼지 쌓인 커튼을 흔들곤 했다. 이번 건도 그런 현상 중 하나일 것이었다. 은설은 뒷문을 고쳐 닫았고, 앞문으로 나와 완전히 문을 잠갔다. 멀리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경비원의 모습이 보였다. 아래층을 확인하는 눈치였다. 위에서부터 확인을 하고 내려온 거라면 아마 뭔가를 잊었다는 것을 깨닫고 2학년 복도로 들어올 거였다. 계단을 따라 다니는 건 위험했다. 은설은 연결 통로를 넘어 동편의 도서실로 향했다.

 

그의 어머니는 도둑이었다. 실력이 유전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기술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을 자식에게 가르치곤 했고 따라서 은설 역시 잠긴 문을 여는 방법쯤은 알고 있었다. 닫힌 도서실 안은 어둑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할 것도 없겠다, 틀림없이 잘못 꽂힌 책들이 있을 도서실 내부나 정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책꽂이가 많으니 누가 들어와도 단박에 그를 발견하지는 못 할 거였다. 문득 문가에서 다시 드르륵, 하고 미닫이문 밀리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정말 많이 부는 모양이라고 은설은 생각했다. 학교가 귀신 들린 학교 소리를 듣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으레 학교마다 괴담은 있기 마련 아니었던가! 중학교에도, 초등학교에도 괴담은 존재했다. 유독 다치는 학생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아마 그건 신록고 건설 과정에서 부실공사나 비리가 있어서 생긴 문제일 게 분명했다. 굿을 해서 해결했다곤 해도 사실은 그냥 그 과정에서 교내 시설 정비를 해서 문제가 해결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어릴 때 항상 귀신 보는 애 소리를 들었던 사람으로서 딱히 그 소문을 믿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어딘가에서 문이 여닫혔다. 그는 이번엔 소리를 무시했다.

 

비는 그치지 않았고 역시 잘못 들어간 책들은 많았다. 얼마쯤 같은 작업을 반복했을까, 문득 멀리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이 책등을 따라 떨어졌다. 이 시간에 학교에 있는 사람이 더 있단 말인가? 경비가 돌아다닐 텐데, 저렇게 당당하게 연주를 해도 되는 것이었던가? 소리는 음악실 방향에서 나고 있었다. 은설은 도서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3층에서는 음악실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탔다. 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이동하는 것은 익숙했다. 복도의 창을 통해 내다보면 멀찍이 음악실이 보였다. 피아노 앞에 사람이 있는지 어떤지는 여전히 확인하기 힘들었다.

 

은설이 있는 공간으로 흘러들던 피아노 소리는 빗소리에 느지막히 섞여들었고, 두 소리의 구분이 불분명해질 즈음에 와서야 유은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가 대체 언제 그칠지는 몰라도 밤까지 학교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장마의 시작이라면 계속 학교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보단 신문지라도 쓰고 집까지 뛰어가는 편이 백 배는 더 나을 거였다. 어차피 옷이 젖어 혼날 거라면 늦게 와서 두 배로 혼나는 것보단 빨리 매를 맞고 끝나는 게 편할 테니까. 그는 메고 있던 가방을 재확인했고, 교실에 잠시 들러 뒤집어 씌울 비닐 따위를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여는 순간까지는 평이했다. 문을 딱 여는 바로 그 순간까지는.

 

은설은 귀신을 믿지 않았다. 사실 '믿지 않았다'고 퉁치기엔 이래저래 미묘한 지점이 있었으나, 어쨌든 그는 학교에 도는 괴담이 오컬트가 아닌 인재에서 기인한 것들일 거라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성은 이상 현상을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는' 정신을 제대로 붙들어 매는 데 꽤 도움이 됐다. 마주하기 전까진. 은설은 열린 문을 잡고 복도 대신 나타난 공간을 잠시 응시했다. 낯선 교실이었다. 형태 자체는 익숙한 것으로 봐서 아마 3학년 교실 중 하나이려니 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꿈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다. 꿈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터무니없는 공간으로 이어질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뒤를 확인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교실과 교실의 경계 지점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제 손등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아팠다. 공간은 바뀌지 않았다.

 

으레 어린이들이나 치매 노인들이 길을 잃을 때를 대비해 그들에게 당부해 두는 것들이 있었다. '꿈'에서 깨지 않자 은설은 자신 역시 누군가가 저를 찾으러 올 때까지 같은 공간에 서 있어야 할지를 생각했다. 그는 등 뒤로 문을 닫고 잠시 적당한 의자를 찾아 자리에 앉았다. 그가 정말 어린아이고 더 똑똑하며 길을 잘 찾는 사람이 그를 항시 찾고 있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이 효과를 발휘할 것이었다. 채 오 분도 앉아 있기 전에 은설은 자신이 그런 요행을 바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유은설은 어린애가 아니었고, 가족들은 무슨 일이 생기든 그를 찾아서 학교에 오지는 않을 것이었으며, 퇴근한 경비원이나 교사들이 학생을 찾으러 돌아올 리도 없었다. 만일 이 학교에 남은 것이 그 혼자뿐이라면 최소한 일주일은 버텨야 누군가가 구조를 해 줄 거라는 의미였다. 탈수로 죽기 딱 좋을 기간이었다. 플랜 C가 필요했다. 은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열어젖히면 또다시 새로운 교실이 보였다. 그는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고, 펼쳐진 낯선 공간으로 재차 걸어들어갔다.

 

그러니까, 이론상으로는 이랬다. 일단 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교실의 향연에 규칙성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규칙을 찾는다면 원하는 공간에 도달하는 것도 썩 어렵지는 않을 거였다. 일이 잘 풀려서 1층에 있는 교실에 도달한다면 창문을 뛰어넘어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문과였고, 슬프게도 이과 상위권들보다 이런 식의 수학 문제를 푸는 데는 부족한 편이었으나 그래도 이게 배수 문제라면 풀어볼 수는 있었다. 중간에 나타난 교실의 이면지 칸에서 은설은 종이 한 장을 빌렸고 다른 아이들의 연필을 훔치고 싶진 않았기에 분필을 하나 챙겼다. 문제는 규칙성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가다 보니 1층 교실 중 하나에 도달한 적이 있긴 했다.

 

"……."

 

창문이 안 열렸다는 게 문제였지만.

 

약 12개의 공간을 확인하고 아홉 번째로 도착한 2학년 2반 교실에서 가정 실습용 뜨개질 실을 발견해 줄줄 늘어뜨려 당기고 있던 은설은 결국 13번째 공간으로 넘어가는 것은 포기했다. 이건 미친 짓이었다! 미로인지 미궁인지도 알 수 없었다. 보통 미로면 갈림길이라는 게 존재하고, 미궁이면 최종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법인데 둘 다 아닌 것 같았다. 분필 가루가 날리는 종이를 텅 빈 재활용 폐지함에 집어넣는데, 문득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은설의 고개가 돌아갔다. 가끔 들고 다니던 어항은 없었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눈 색이 정말로, 정말로 특이한 아이였으니까. 짧은 침묵. 은설이 말했다.

 

"괜찮아, 우야?"

"괜찮아."

 

피곤해 보이는 낯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2학년 3반의 정 우는 드물게 복도를 스쳐 지나가면서 볼 때도 으레 만사가 귀찮은 듯한 말투로 다른 아이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잘은 몰라도 한참은 걸은 듯 했다. 은설은 자신이 그의 발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빗소리 때문이었을지, 아니면 자신이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 그도 아니면 문이 열리기 직전까지는 공간과 공간이 이어져 있지 않아서일지를 생각했다. 만일 세 번째 가설이 맞고,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에서 그러듯이 문이 열리는 순간 어떤 공간이 다른 공간과 이어질지가 결정되는 거라면 그 정보를 가지고도 무엇인가를 확인해 볼 수 있음직 했다. 문제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실험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기껏 만난 동지를 그런 식으로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너 뭐하고 있었냐."

 

우가 물었다. 은설은 그의 왼쪽 손목에 잠깐 시선을 두었다. 불안한 것처럼 '시계'를 매만지는 손가락들. 그는 대답하기 전 반쯤 풀린 실패를 들어올렸다.

 

"이걸 아까 도착한 교실에 묶어 놓고 이동하는 중이었단다. 잡아당긴다고 해서 돌아갈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지리 파악에는 도움이 되긴 할 테야. 앞문으로 들어가서 이걸 풀면서 뒷문으로 나오는 방식을 썼어. 너는 뭘 하고 있었니?"

"계속 걸었어."

 

우가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열리는 문이 없더라."

"그렇다면, 잠시 앉았다 가는 건 어떠니?"

 

비 때문에 공기가 습했다. 그들은 잠시 교실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몇 분 남짓이긴 했지만, 어쨌든 계속 걷는 것보단 쉬었다 가는 편이 나을 거였다. 우는 딱히 불만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만을 가질 힘도 없어 보였다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이긴 할 거였다. 은설은 그가 물고기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당장도 반이 다를 뿐더러 그는 이과, 저는 문과였기 때문에 겹칠 일은 없긴 하겠지만 독특한 아이들은 복도를 걸을 즈음 종종 눈에 띄었다. 습도가 더 올라간다면 지금보다 좀 더 기운을 차리게 될까.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잠시 하던 그는 다시 이동할 채비를 했다. 어쨌든 앉아 있는다고 해결될 건 없었다. 우도 느지막하게 일어나 섰다.

 

다음 문을 열었을 때 나타난 공간은 여태껏 나타났던 공간과는 완전히 달랐다. 은설은 문을 넘어가기 전 잠시 인상을 썼다. 급식실이었다. 학생 하나 없는 긴 공간, 마치 만찬장처럼 놓인 그릇들에는 음식이 가득했다. 피어오른 흰 김 때문일까, 공간의 공기는 교실의 것보다 더 따뜻했다. 천천히 식당으로 들어가도 요리사나 다른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빗소리는 여전히 지독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은설은 우와 나란히 서서 음식들을 관찰하다가 놓여 있는 해물찜 쪽으로 다가갔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연기에서는 과일 푸딩 같은 향이 났다. 그는 멈칫하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는 알고 있니?"

"알지."

 

허기가 느껴졌다. 지나치게 탐스러웠고 기괴할 정도로 따뜻했다. 고기의 기름은 반지르르했으며 생선의 살은 희었고 밥알에서는 윤기가 흘렀다. 우는 음식에 굳이 접근하지 않았다. 은설은 다시 그의 곁으로 이동했다. 제사 음식 생각이 났다. 낯선 진수성찬의 온기보다는 사람의 온기가 나았다.

 

"그 생각이 났어. 지옥의 음식을 먹으면 그곳에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고들 해."

 

우는 다시금 자신의 팔목을 매만졌다. 아마도 시계 비슷한 것을 하고 있을 위치였다. 팔찌인지 시계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이런 걸 줄 리가 없지."

 

그가 말했다.

 

움직이면 계속 이상한 공간이 나온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고, 그들 모두 창문을 열고 나가는 것은 시도해 본 사람들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잠시 식당 벽에 기대 서서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은설이 물컵에 시선을 두자 우가 가져온 물병을 내밀었다. 감사 인사를 하고 그에게 병을 돌려 주며 은설은 잘 모르는 친구와 말을 트기엔 부적절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왕이라면 좀 더 정석적으로 만나는 게 나았을 거였다. 대체 어떤 정석적인 방식으로 그와 대화를 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런 상황은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거였다. 창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고, 곁에 있는 사람은 정말로 물고기를 닮은 존재였기에 은설은 어항에 머리를 들이밀면 이런 느낌일지를 생각했다. 유리벽을 타고 흐르는 물, 갇혔다는 감각, 곁에서 느리게 지느러미를 움직이는 금붕어.

 

문득 주변이 일렁였다. 어항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일렁였다고 착각한 건지도 몰랐다. 테이블로 시선을 돌린 순간, 은설은 접시들이 테이블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우가 테이블로 다가가 손으로 표면을 쓸었다. 그의 손가락에 걸리는 물건은 없었다. 반질반질하고 차가운 탁자. 원칙대로 행동하기엔 매뉴얼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밀려드는 혼란 속에서 은설은 조심스레 상대의 곁에 다가가 섰다. 등 뒤에 마치 숨는 것처럼. 무언가를 잡고 싶은 것처럼 말렸던 주먹이 풀렸다.

 

"단단하네."

"응."

 

그러나 어항에 영원히 머리를 들이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었던가?

 

 

 

 


202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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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은 연습을 안 해서 슬슬 정체되기 시작하는 구간....

 

 


 

2022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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