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형상
타조가 어설픈 걸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들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구의 한쪽 면을 넘고 있었다. 연구원이 속력을 내 앞서 가기 시작하자 타조를 탄 신이 헛기침을 했다.
“너희는 사막에서 너무 빨리 가려고 하면 안 돼.”
연구원은 대꾸 없이 신을 올려다보았고, 곧 인상을 쓰면서 시선을 돌렸다. 신의 머리색 때문이었다. 음지에서 자줏빛을 띠는 그의 머리카락은 햇빛만 받았다 하면 쨍한 마젠타 빛으로 반짝였다. 대부분의 도시 거주민들은 그런 식으로 머리를 염색하지 않았다. 백 년쯤 전에나 유행했을 머리 스타일이었다. 신이 다시 말했다.
"사막에서 오래 살 수 있게 설계된 게 아니거든."
"그래요."
연구원이 툭 대꾸했다. 판테온이 어디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신은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만을 쉽게 떠올렸다. 물론 그의 권능은 애초에 길찾기가 아니라, 삶과 죽음에 관련된 것이었으므로 이런 것들만 잘 아는 게 당연하긴 했다. 그 분야에 대해선 굳이 알고 싶지 않으니 문제였지. 신은 또다시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고 연구원은 입을 다물었다.
여름과 겨울마다 급격하게 변하는 기온은 도시를 제외한 모든 곳의 사막화를 낳았다. 옛날을 그리워하는 주민들은 신들이 있을 적에는 이러지 않았다고 수군거렸다. 기록에 따르면 과거에도 이상기후는 자주 목격되었다고 했으나 대개 그런 정보는 민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법이었다. 나이 든 이들은 전능했던 신들만을 기억했다. 거주지의 날씨를 통제하고 기술로 불행을 덮으면서도 학자들은 절대자들의 존재를 연구했다.
사막 어딘가에 판테온이 존재한다는 건 일단 기정사실이었다. 사람들이 미쳐 신들을 학살했던 그 날 이전에 최상의 존재들은 이미 어느 오아시스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했다. 마법으로 만들었는지 어쨌는지 예의 그 '오아시스'에는 항상 얼음이 떠 있다고 했으며 주변 기온도 선선하다고 전해졌다. 사람들은 신들만이 그곳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길잡이가 될 존재를 찾는 데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갔다.
"요샌 그렇게 안 해요."
텐트를 쳤을 때 땔감에 불을 붙이려는 신을 향해 연구자가 말했다. 신은 돋보기를 거뒀다.
"그럼?"
학자가 소매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을 뽑아들었다. 그게 나무 더미에 닿자마자 크게 불길이 일었다. 신은 타들어가는 것을 관찰하다가 말했다.
"뭐야, 그거? 나한테도 하나 주는 영광을 누리게 해 줄게."
"만지시면 안 돼요."
"왜? 내가 신인 거 알잖아? 그거 건드리겠다는데 허락을 받아야 해?"
"필멸자시잖아요. 저흰 아니고."
신이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을 토했다. 연구원은 그가 가만히 텐트 앞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불빛 속에서 초록색과 하늘색이 섞인 홍채가 기이하게 반짝였다. 신은 대충 묶었던 꽁지머리를 풀고는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었다. 모래가 떨어져 내렸다.
"내가 이런 식으로 도태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정신 차려 보니까 다른 녀석들은 어디로 갔다고 하지, 도시엔 아는 놈이 하나도 없지, 이제 와선 신기술도 못 쓰는 퇴물 취급 받고 있잖아. 역시 늙으면 죽어야 한다 이건가?"
"일단 판테온에 가면 뒤처진 것도 아니게 될 텐데요, 뭐."
침묵 속에서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만 났다. 연구자는 맞은편에 앉은 이를 곁눈질했다. 그들의 길잡이를 찾은 건 두어 해 전의 일이었다. 찾았다기보단 발굴했다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었다. 먼 옛날 신들은 보통의 시민들과 달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 동족을 죽이는 존재에 대한 처벌을 확실하게 내렸다고 했다.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신들은 온기를 제거당한 채 아주 긴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 신도 '그런' 부류였다. 잠들어 있는 다른 이들도 있었으나 잠들기 전 깊은 병에 들어 있었던 경우도 많았다. 확실하게 건강한 존재를 고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악신이지, 우리를 이 상태로 몰아넣는 데 지대한 기여를 한 분이시니까.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해. 우릴 미치게 하는 저주도 내릴 수 있어. 떠나던 날 연구자에게 수석 연구원이 말했다.
선택할 수 있었으면 다른 이를 선택했을 거였다. 오랜만에 갇혀 있던 곳에서 빠져나왔겠다, 막말로 동행인을 토막내고 혼자 오아시스를 찾으러 가도 되는 상황인 것이었다. 아무리 연구자에게 정해진 수명이 없다지만 도움 받을 곳이 전혀 없는 이런 허허벌판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 게 분명했다. 유일한 희망은 신 역시 약하기 짝이 없다는 데 있었다. 낮의 열기도, 밤의 냉기도, 심지어 피조물들조차 신을 쉽게 죽였다.
"안 찾고 도망치진 않아."
신이 말했다. 그는 둘둘 말린 침낭을 끌어 와 품에 안고는 벨트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매끄러운 표면이 모닥불 빛을 노랗게 반사했다. 작은 쇳소리. 오는 길에 그가 밤마다 손댔던 물건이었다.
"알아요."
"하긴, 상식적으로 이 사막이 어디 혼자 살아남을 데야?"
연구자는 그의 손에서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봤다. 생명 창조가 누구만의 전유물은 아니라지만, 직접 만들어지는 걸 보는 건 여전히 낯설었다. 애벌레를 닮은 몸에 날개가 붙었고 더듬이가 돋아났다. 태엽을 감는 듯한 손동작을 두어 번 한 뒤 신은 은색 나방을 위로 날려보냈다. 나방이 별처럼 선명한 빛을 내며 주변을 날아다니다가 다시 손으로 돌아와 앉았다.
"이런 녀석들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 이 나방은 도시에서 만들어진 녀석보다 일찍 죽을 거야. 뜯어먹고 살아갈 만한 게 없잖아. 나비라면 사실 좀 더 자신이 있는데, 밤에 활동하는 동물들은 역시 아직 좀 어려운 것 같아. 나보다 재능이 많은 애들이야 이것도 알아서들 잘 했겠지."
"저기."
연구자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곧바로 다시 입을 다물었고 신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연구자는 상대의 표정을 살폈다. 신이 표정을 지우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리까는 눈, 낮은 목소리로 이어져 나오는 말.
"도착하고 얘기하면 안 돼요?"
잠시 그를 보던 신이 웃음을 터뜨렸다.
"실수로 죽일까 봐 그래?"
도착하려면 근데 한참 남았다고. 그때까지 말도 안 하면 지루해서 어떡해? 길게 이어지는 문장들 속에서 연구자는 입만 뻐끔거리다가 다시 낮은 목소리를 냈다.
"말하는 게 힘들어서요."
"하긴 너희는 나하고 얘기할 때 빼곤 말도 잘 안 하더라."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수습 연구원일 때 여행을 시작했더라면 더 참을성이 있었을 거였다. 아니, 정신만 더 맑았어도 이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윗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알랑거려야 하는 시절은 50년도 전에 지나간 뒤였고 익숙지도 않은 비위 맞추기를 계속 하기엔 지나치게 주변이 더웠다. 신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만들 때 주지도 않은 텔레파시 능력을 개발하더니 말을 듣지도 않게 되었다는 둥, 하여튼 또다시 실컷 떠들 거라고 연구자는 짐작했다. 그는 목을 문질렀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알다시피, 기도는 말로 하는 거잖아?"
연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은 머리를 다시 묶더니 흥얼거리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거 소리 마법에 대해 얘기할 차례인가? 우리가 쓰는 마법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어. 생명에 힘을 불어넣는 빛 마법과, 명령을 하는 소리 마법. 그렇게 생각하면 편할 거야."
진심으로. 가능했다면 다른 길잡이 신을 골랐을 거였다. 실탄이 든 총을 장난감마냥 휘두르는 녀석과 함께 다니는 게 차라리 안전할 거라고 연구자는 생각했다. 말마따나 언어는 마법이었다. 신들의 학살 사건 때 그렇게 많은 시민들을 움직인 것도 결국 음성 언어였다. 텔레파시 기술을 발달시킨 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 신은 모른 척 계속 이야기를 했고 연구자는 속으로 별을 셌다. 그 편이 더 견딜 만 했다.
"사실, 우리는 훨씬 전부터 너희가 우릴 없애려 들 거라고 믿고 있었어. 이 세상에 솔직히 우리는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잖아. 그래서 유난히 똑똑한 신들은 영원히 얼음이 녹지 않는 오아시스를 설계했지. 물론 다 갈 수 있는 건 아니었어. 세상엔 모래알만큼 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곳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거든. 그래서 가장 재능 있는 자들만이…."
낮이 오자 밤에는 나방이었던 나비가 길을 인도했다. '움직이는 별들'의 힘을 빌려 근처에서 가장 온도가 낮은 지역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면 별자리도 바뀌는 법이었고 오래 전에 잠들었던 신이 과연 현재의 별을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있었다. 귀찮아서 가만히 있을 뿐이었지. 창조주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밤에도 계속 가고 싶으면 횃불을 쓰면 돼. 이 나비는 빛이 있는 한 계속 움직일 거야.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다들 지칠 테니까 쉬긴 쉬는 게 좋겠지?"
"그래요."
그렇게 말이 많은데 소리의 마법이 아직도 오작동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게 신기한 노릇이었다. 신을 깨우기 전 다른 연구자들과 토론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세월이 워낙 오래 지난 탓에 그의 죄목이 담긴 자료는 날아가고 없었다. 어쩌면 신들의 학살 사건을 사주한 장본인이 그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 정도의 악신을 깨워서 데려갈 수는 없다는 속삭임들. 터무니없는 걱정이었던 걸지도 몰랐다. 사실 말이 많고 조언을 듣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동행자는 그리 성격이 파탄난 편이 아니었다.
연구자는 걸음을 내딛으며 옅게 이는 모래바람을 관찰했다. 나비는 그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했다. 모래가 들어갔는지 목이 버석거렸다.
"아예 사막의 지형을 바꾸는 게 낫지 않아요? 신이잖아요."
"나는 못 해. 그걸 할 수 있는 건 좀 더 실력이 좋은 애들이나…."
신은 잠깐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히 덧붙였다.
"우리의 신들 정도지."
아직도 당신들의 신을 찾아요? 라고 연구원은 텔레파시로 물었다. 잘못된 방식으로 '기도'했다는 걸 깨달은 그는 다시 질문할까 말까를 고민했다. 사실 비슷한 이야기는 오는 동안 종종 나온 바 있었다. 신은 왜 시민들이 자신을 신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고도로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그들이 보유한 기술이 자신을 압도할 텐데 왜 그런 이름으로 부르냐는 것이었다. 잠들어 있던 사이 신이라는 단어의 뜻이 바뀌었냐고도 물었다. 연구자는 자신이 아는 정의를 그대로 읊었다. ‘창조자.’
신은 자신과 그 동지들이 현재의 시민들을 만들었단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신들이 현재의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끌고 왔다는 사실에도 동의했다. 동의하면서도 그는 이 모든 것이 현 시민들을 향한 처벌이 아니라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했는데, 그걸 강조하든 말든 그가 신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 잊은 눈치였다.
그런 식으로 신은 종종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사실 연구자는 따로 진행한 연구를 통해 신들을 창조한 상위 창조주의 개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들과 그 상위 존재의 거리는 시민들과의 거리보다 멀었던 모양이었다. 시민들이 신들을 부모로 여긴다면 신들은 그 이상의 존재를 막연하게 숭배했다. ‘감히’ 그 이름을 사용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건 이해했다. 다만 하필이면 이 상황에 예의 상위 창조주 이야기를 입에 담는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무의식중에 신을 찾는 건 힘든 사람들 뿐이라던데. 연구자는 입에서 맴도는 말을 삼켰다.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무렵 그들은 작은 오아시스 하나를 찾았다. 그들이 찾던 오아시스가 아니라는 건 멀리서 봐도 확실했다. 그 방향으로 날아가던 나비를 좇던 신은 야자수의 모습이 선명해지자 우뚝 걸음을 멈췄다. 연구자는 그를 올려다봤다. 쨍한 머리색 때문에 눈이 아파 잘 보이진 않았지만, 썩 즐거워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가 탄 타조는 그 자리에서 몇 분간 멈춰 있다가 다시 천천히 발을 뗐다.
한때는 마을이 있었던 성 싶었다. 모래로 빚은 것처럼 생긴 건물들은 창문이 길고 좁았다. 한때 희었을 외벽은 먼지로 인해 누렇게 변해 있었고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발에 채였다. 전반적으로 그리 높은 집들이 아니었다. 신은 제일 먼저 오아시스로 향했다. 흙탕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수면 아래로 보이는 거뭇한 것들이 물고기인지 쓰레기인지는 판별하기 어려웠다. 신은 잠시 그대로 물을 관찰하다가 타조의 목을 밀었다. 새가 걷기 시작했다. 연구자는 나무 그늘 밑에 섰다.
“어디 가세요?”
“흔적 있나 보러.”
마치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 같았다. 찍힌 발자국을 따라 가면서 연구자는 혼자서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신은 드물다던 말을 떠올렸다. 무언가 잘못을 해서 냉동되어 있었고, 깨어난 뒤 상황 설명을 하자 캐묻는 일 없이 그러자고 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머리카락 따위를 채취해 알아보는 건 생물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몫이었고, 누가 여행을 떠날지 지정하는 것 또한 상관의 일이었다. 비유하자면 연구자는 자신이 탄 우주선에 대해 아주 기초적인 것만을 숙지한 채 달로 향하는 우주 비행사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좀 더 많은 것을 알려 달라고 하고 왔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상관은 어째서인지 그가 신에 대해 충분히 많이 알고 있다고 판단한 듯 했다. 과거의 연구자는 그의 판단을 신뢰했다.
신은 문이 떨어져 나간 어느 건물로 들어섰다. 따라 들어가는 순간 냉기가 훅 끼쳐 왔다. 묘지 위에 건물을 세운 것 같은 구조였는데, 맨땅에 누운 비석 같은 것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어두운 실내에서 몇 번 날갯짓을 하던 나비가 떨어졌다. 타조가 무릎을 꿇자 신은 나비를 살폈고 가볍게 혀를 찼다.
“날개가 핸드폰 액정보다 약했네.”
그는 더 가는 대신 나비가 떨어진 돌덩이 앞으로 몸을 내렸다. 연구자가 그 곁에 와서 섰다. 신은 먼지 쌓인 비석을 부드럽게 손으로 쓸었다. 새겨진 이름이 드러났다. …의 아담. 안에 든 게 남성체인 모양이었다. 신은 돌을 가볍게 두드리다가 손을 치웠다.
“이런 게 한창 유행이던 때가 있었어. 난 원래 할 생각 없었는데, 다들 이런 유행은 따라 주는 거라고 해서 하나 만들었지.”
“뭔가요?”
“타임캡슐. 알아?”
“신을 얼리는 거하고 비슷한가요?”
“어떤 의미에선 그렇긴 해.”
신은 생각하는 눈치였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 즈음에는 어린 신들을 데려다 놓고 이런 걸 많이 했어. 소중한 물건 같은 거 땅에 묻고 나중에 발굴하기. 학교 단위로 운동장에 타임캡슐 묻기 같은 것도 했는데, 실제로는 대부분 잊어버렸을 걸. 누가 10년 뒤에 자기 초등학교 운동장 땅을 파.”
“음.”
“아, 초등학교라든가 그런 거 모르나.”
“대충은 알아요. 옛날 신들의 학교.”
“그러면 됐어. 하여튼 그게 한창 유행이다가 또 금방 시들해졌거든. 근데 우리 중에서 유난히 뛰어난 친구가 나 자신을 묻는 타임캡슐을 만들어 낸 거야. 지금 생각하면 음침하기 짝이 없는데 당시엔 다들 좋아했어. 저렴한 가격으로 우리랑 똑같은 모습의 존재를 만들고…걔들이 최초의 ‘피조물들’이었던 것도 같네. 너희 같은 애들 있잖아. 어쨌든, 그렇게 만들고 나서 보관하고 싶은 기억을 넘겨준 뒤에 사막의 관짝에 넣는 거지.”
“해서 뭐가 좋은데요?”
“그런 식으로 잊고 싶은 기억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믿은 사람들도 있었겠고, 그게 영원히 사는 방법의 일종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겠고. 당시엔 돈 내고 목성에 땅 사는 놈들도 돌아다녔다고. 목성은 가스 행성인데 말야! 난들 아나?”
그는 돌 표면을 다시 한 번 쓸어 보더니 타조에 탔다. 하고 싶은 거 하고 놀아, 라는 그의 목소리는 텅 빈 공간에서 메아리쳤다. 연구자는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신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건물 외벽뿐 아니라 안쪽도 온통 희었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눈이 하얗게 멀어 버린 것 같아서. 연구자는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타조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아래의 사정 역시 확인하기 힘들었다. 하고 싶은 거 하고 놀라는 말은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거였다. 알긴 했다. 연구자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지하로 향했다.
내려갈수록 기온은 낮아졌다. 연구자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주변은 신들의 감옥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잠들어 있는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차이점이었지만. 냉각 탱크도 눈에 띄었고 빈 캡슐들도 보였다. 함께 온 신은 없었다. 연구자는 귀를 기울였다. 벽 너머에서 일종의 기계음이 들렸다. 어떤 버튼을 연타하는 것 같은 높은 삑삑 소리. 그는 주위를 살폈다. 벽에 버튼이 하나 있었다. 이 공간이 정말 신들의 감옥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면. 그는 버튼을 눌렀고 벽은 회전문처럼 돌아갔다. 점점 커지는 틈 사이로 연구자는 어느 캡슐 앞에 선 신의 모습을 보았다. 손에 리모컨 하나가 쥐여져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이브.”
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러나 연구자는 그 말이 분명히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드디어 소리의 마법이 사용된 거였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길 바랐고, 동시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았다. 주변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신은 리모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연구자는 캡슐 안의 얼굴을 보았다. 아마 어린 신이었을 거였다. 피가 다 빠져나간 채라도 갑자기 체온을 그렇게 올리면 그들의 몸은. 신이 명령했다. 사형 선고였다.
“기다려.”
하루 종일 연구자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나불거림은 동행인의 몫이었다. 너도 내가 모든 안드로이드들한테 인간 학살 명령을 내린 존재란 거 예측했잖아. 아니, 시민들한테 신 학살 명령을 내렸다고 해야 좀 더 이해하기 쉬운가? 원래부터 이 분야에서 유명했어. 죽고 싶다는 사람들 대신 죽여주기. 대체로 내 주변 사람들 위주로 해 주긴 했지. 신청을 받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평소에 죽고 싶다고 말하거나 객관적으로 죽고 싶어 보이는 사람들 목숨을 끊어 주는 거야. 아무리 빌어도 우리 신은 내 목숨을 끊어 주지 않았거든. 내가 또 한 공감 능력 해서 말야. 남들이 나처럼 힘들어 하는 걸 가만 두고 보기가 너무 지치더라고. 그래서 시작하게 됐어. 저기 저 애도 아마 깨어나면 죽고 싶어 했을 걸. 그래서 가장 편한 죽음을 준 거야. 너도 봤잖아. 거기 남아 있는 신은 단 한 명도 없었어.
신들이 같은 신을 죽이는 것에 왜 그렇게 충격을 받았는지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사실 이야기하기 힘들었다. 묻는다면 ‘로봇 공학의 3원칙’ 따위나 운운할까. 물론 그런 식으로 설명을 시도했다간 이 미친 악신에게 비웃음을 받을 게 분명하긴 했다. 그는 창조자였고 로봇 공학의 3원칙이란 소설에나 존재하는 원칙임을 알 거였다. 설명을 할 수 있든 없든 불쾌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그 불쾌함이 잘못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신들은 자신의 피조물을 자신들과 유사하게, 바꿔 말해 ‘인간답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었다. 그들 본인도 짐승이 짐승을 죽이는 것에 마음 아파하던 존재들이었다. 지금 연구자 본인이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 탓인 셈이었다.
“변명은 그만 하세요.”
마침내 연구자가 말을 꺼낸 건 이튿날 아침이 다 되어서였다. 더 입을 다물고 있었다가는 낡은 팔다리를 교체하는 시기까지 후회를 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는 말을 잇기 전에 짐을 챙겨 들쳐 멨다. 밤새 나비를 고친 걸 보아하니 판테온에 갈 의지가 있긴 한 듯 했다. 만일 정말 도착하게 된다면 이 신은 그들 역시 죽일까.
“날 죽이고 싶어?”
신이 말했다. 연구원은 그 말을 무시했다.
“그럴 때의 ‘죽고 싶다’는 정말 죽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쪽이라고 했어요.”
그날의 동행인은 상대적으로 조용했기 때문에 연구자는 그 전까지 들어왔던 정보들을 곱씹으면서 사막을 건넜다. 일전에 왜 시민들이 신을 찾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왔던 적이 있었다. 한참 만들어질 때만 해도 피조물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느니 뭐라느니 얘기가 많았다고.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상용화될 거라는 상상만큼이나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속으로만 대꾸했었다.
만일 그가 대학살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예상대로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로 시민들은 자신들의 창조자를 모르게 되었다. 많은 ‘인간’들은 알지도 못하는 신을 숭배해 왔었다. 마찬가지로 인간과 판테온에 대해 막연한 환상만을 갖고 있는 시민들이 딱히 그들에게 악의를 품을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과거에 벌인 만행이 있다는 건 알았으나 그 시기를 함께했던 지성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가 많은 신들이었다는 걸 알아도 추상적으로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신을 대체로 싫어했어.”
퍼뜩 놀랐던 연구자는 그게 아침에 건넨 말에 대한 대답임을 깨달았다. 잠깐의 침묵.
“당신들 신도 죽이셨나요?”
“아니. 찾지도 못했어.”
“판테온은 찾을 수 있으시겠어요?”
“해봐야지.”
신이 자신 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앞을 응시했을 때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눈은 초점을 잃었다. 연구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날은 밤이 될 때까지 오아시스가 나오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사막에 물이 많았더라면 애초에 이런 여행을 떠날 필요도 없었을 것이었으며, 나아가 이 모래밭을 사막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었을 거였다. 연구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신은 점점 더 몸을 많이 뒤척였다. 타조 위에서 팔짱을 끼고 괜히 혀를 찼으며 평소보다도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다.
명분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듯 했다. 연구자는 그렇게 판단했다. 무언가 남들이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한 뒤 어떤 ‘업적’을 내밀어 잘못을 덮는 경우가 있었다. 지성체들의 호와 불호에 대한 잣대가 단순하다고 믿는 이들. 성찰 없이 ‘좋은 일’을 함으로써 추한 부분을 가릴 수 있다고 보는 것들. 판테온을 빨리 찾으면 연구자가 신을 죽인 사건에 대해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연구자가 모닥불을 피웠고 타조에 기대앉은 신은 유리로 된 정사면체를 꺼냈다. 흐리게 들어온 모닥불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 햇빛에 두었을 때보단 좀 더 불완전한 무지개였다. 연구자는 담요를 두르며 상대를 넘겨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신이 프리즘을 흔들어 보였다.
“신기루잡이야. 보이는 게 진짜인지 아닌지 이걸로 판별할 수 있어.”
“그런 물건들을 그냥 저희 주지 그러셨어요. 지금 도시에서 그냥 쉬고 계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애꿎은 어린 신이 죽지도 않았을 거라고 연구자는 속으로 덧붙였다. 사실 척 봐서는 대체 그 유리 조각을 어떻게 써야 신기루 판정용으로 쓸 수 있을지 감이 안 잡히긴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만 들였으면 충분히 사용 방법은 익힐 수 있었을 거였다. 애초에 최초의 시민들은 신들의 대리자로서 태어난 게 아니었던가. 신은 다시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이면서 유리를 주먹 속에 숨겼다.
“이걸로 다 찾는 것도 아냐. 재능이 있어야지.”
“재능 있으신가 봐요.”
실상 가볍게 던졌던 말이었다. 농담처럼. 대답이 재깍 돌아오지 않자 연구자는 멈칫했다. 신은 무언가를 곱씹는 듯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도 했다. 연구자는 기다렸다. 주제넘은 말이었다, 불경스러운 소리였다 따위의 대답이 돌아올까. 아니면. 침묵 끝에 신이 말했다.
“있겠지.”
한참이 지나 연구자는 전에 혹시 만난 적이 있었냐고 물었다. 신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만나면 만난 거고,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그런 거지 모르겠다는 답변이 왜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일단 연구자 본인은 신과의 만남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거지들이 가끔은 너무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상하고 불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그와 같은 악신과 동질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모든 시민들은 대학살 사건을 기억했다. 그건 그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으나 의지를 갖고 행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있었던 어떤 대기업은 타임캡슐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해당 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고위 임원으로 고용했다. 꽤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천천히 인간과 닮은 안드로이드들이 상용화됐다. 회사는 인간의 감정, 그러니까 죄책감이나 애착을 느낄 줄 아는 기계를 만들고자 했다. 당시에 태어난 이들을 최초의 시민들이라 불렀다.
신들은 소위 말하는 ‘로봇 반란’을 아주 오래 전부터 두려워해 왔다. 사측이 중앙 통제 장치를 갖고 있었던 건 따지고 보면 아주 합리적인 일이었다. 회사 소속의 누군가가 그걸 해킹해서 조작 방식을 바꾸리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인류의 잘못은 아니었다. 실제로 초기엔 별 문제가 없었다. 회사는 일자리를 빼앗는 로봇이 아닌 사랑받는 로봇을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발도 미미한 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수익이 줄어든 일부와 기계에 의존하는 게 비인간적이라고 믿는 몇몇이 불만의 목소리를 냈을 뿐.
세월이 흘렀다. 그들의 생활 터전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망가졌고 고위의 신들은 자신들이 만든 쓰레기로 더럽혀진 땅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동행하고 있는 신의 말을 빌리자면, ‘남겨진 건 불행한 신들뿐이었다.’ 기계들은 동족을 스스로 생산하는 법을 배웠다. 연구자는 물론 그 시기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한때 비싼 값으로 만들어졌던 ‘구형’ 안드로이드였다. 인력이 부족해진 뒤 시민들은 동면하고 있던 그와 다른 동료들을 깨웠다. 신들이 사라진 땅에서 시민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기록해 넘겼다.
“정말로 불행해 보여서 살해하신 거예요?”
“그럼.”
“그냥 약자를 이용한 스트레스 풀이는 아니셨고요?”
사막 한가운데였다. 연구자가 말을 던졌다. 사실은 대리만족이라는 용어를 쓰고 싶었다. 죽고 싶은데 자신이 죽기에는 겁이 너무 많아서, 스스로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위하며 남들을 멋대로 죽여버린 건 아닌지. 거기에서 일종의 쾌감을 느낀 건 아닌지. 신은 프리즘을 들어올렸다. 지평선의 아지랑이 부근에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유리와 유리 너머를 가만히 관찰하다가 손을 내렸다.
“거짓말 아니라니까. 내가 더 지켜보기 힘들어서 죽인 거야.”
“일부러 그렇게 말하시는 거예요?”
“뭐가?”
일종의 동족 혐오일 수도 있었다. 연구자는 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본인도 비슷한 충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2와 3을 더하면 5가 된다는 식으로 상식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뿐이지, 공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공감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만. 지켜보기 힘들어서 죽였다는 말의 비겁함은 너무 명확했다. 책임을 회피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을 해 대는 부류가 흔히 쓰는 화법이었다. 연구자는 그의 신이 꽤 똑똑한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죽여도 괜찮아요?”
“응. 근데 가능할까? 나는 날 못 죽였는데.”
“질문은 잊어버리세요. 됐어요.”
“그래, 충분하다니 기뻐.”
연구자는 콧잔등을 일그러뜨리고는 계속 나아갔다.
그날도 오아시스는 나오지 않았다. 한낮 무렵 지평선을 바라보던 신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타조를 몰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말리려던 연구자는 천천히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이전에 그가 한 말처럼 그들이 있는 사막은 생물이 제대로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원래 필멸자들은 생에 집착한다고 했다. 완전히 서로를 잃어버리기 전에 돌아올 거였다. 실제로 그는 저녁 무렵 망연히 모래밭에 앉아 있는 신을 발견했다. 곁에 타조가 쓰러져 있었다.
“이 기계 타조는 고물이야.”
그가 말했다. 연구자는 타조의 부리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은 여전히 예의 신기루잡이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너무 몰아붙이셨어요.”
“그래도 좀 더 빨랐다면 잡을 수 있었을…아냐, 아니다. 이번엔 실수한 게 맞아. 이상해, 분명 이걸 통해 봤을 때 그게 진짜인 것처럼 잡혔거든. 그렇지만 피곤하면 실수할 수도 있지. 난 원래 이런 기술적인 문제에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거든. 피곤해서 잘못 봤나 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져. 진짜 이상하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유사한 현상이 반복됐다. 아무 것도 나오지 않거나, 기껏 달려갔는데 아무 것도 없거나. 신은 여전히 무언가를 발견하면 뭐가 있다느니 곧 갈 수 있을 거라느니 떠벌렸지만 더 이상 돌진하진 않았다. 또 그는 목적지가 가짜로 보이면 갑자기 멈춰 서서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 떠들어 대곤 했다. 무지개니 신기루니 하는 것들이 세상에 있어서 괜히 사람들이 그걸 뒤쫓게 된다고. 처음부터 헛된 희망, 어중간한 재능, 닿을 수 없는 롤모델이 없었다면 이런 식으로 고통받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는 가끔 정말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연구자가 돌아가는데 필요한 날들을 세는 횟수 또한 늘어났다. 이쯤 되면 원래 있던 도시로 바로 돌아가는 것보다 사막 어딘가에 있을 다른 도시를 찾아 들어간 다음 준비해서 돌아가는 게 나을 거였다. 본인은 괜찮았다. 신이 먹을 음식이 부족해져 가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시체는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정작 신 본인은 그걸 계산하지 않는 듯 했다. 학자는 차마 그에게 판테온을 찾을 수 있겠냐는 질문을 재차 하지 못했다. 여전히 말은 많았지만 나오는 표현들이 점점 자조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저기."
연구자가 앞을 가리킨 건 예의 그 사건으로부터 보름 정도가 더 지난 후였다. 모래 바람 틈으로 흐릿하게 번쩍이는 돔이 있었다. 돔의 아래 부분은 철로 된 행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말이 좋아 행성이지 기계 타조를 타고 쉽게 뛰어넘을 법한 야트막한 철 울타리였다. 신은 대꾸하지 않았다. 연구자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인상을 썼다. 돔의 모양새가 퍽 익숙했다. 새 도시를 발견한 것이었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신은 무언가를 찾았다는 사실 자체에 기분이 들떠 보였다. 최소한 연구자의 눈에는 그래 보였다. 빛나는 눈. 타조의 깃털을 세게 쥔 손. 연구자가 주위를 제대로 둘러본 건 성문 앞까지 온 뒤였다. 그는 혼자였다. 기다렸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는 잠시 주변을 살피다가 성문을 두드렸다. 몇 번쯤 두드린 뒤에야 문이 열렸다. 그때까지도 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물이 부족해서 쓰러졌는지도 몰랐다. 연구자는 간단한 음식과 물품을 받아 온 길을 되짚어 걸어갔다. 얼마쯤 걸었을까, 빙빙 도는 것은 아닌가 싶어진 순간에야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연구자는 다가갔다. 신이 모래밭에 앉아 있었다. 연구자는 타조의 상태를 확인했다. 멀쩡해 보였다.
“어땠어? 가짜였어?”
“아뇨, 진짜예요. 들렀다 가요.”
“들렀다 안 가.”
“식량도 떨어진 건 아세요?”
“그러니까, 안 간다고. 만신전 찾는 건 포기야. 내가 더 이상 진짜랑 가짜를 구분 못 해. 너무 많이 실패해서 이젠 진짜를 봐도 꿈이겠거니 하고 지나간다고. 이젠 능력이 없어. 애초에 처음부터 판테온엔 고개도 못 디밀어 본 날 데리고 가겠다고 한 게 웃긴 일 아닌가?”
그나마 있는 희망이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연구자는 발뒤꿈치로 모래밭을 찍어 눌렀다. 그래도 가다 보면 희망이 있다는 소리를 하면 될까. 그런 소리를 해서 들을까.
“왜 네가 이 여행을 오게 됐는지 알아?”
“위에서 절 골라서요.”
“내가 너로 해 달라고 했어. 지금의 나는 이렇게 무능해도 과거의 나는 분명 똑똑했었으니까. 과거의 날 데리고 가면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기껏 자라서 내가 될 널 데리고 뭘 하겠다고.”
연구자는 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의 복제품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것 또한 두려워했기에 자신과 비슷한 형태의 안드로이드를 만들면 스스로에게 특정한 표식을 새겼다고 했다. 문신이라든가, 염색 같은 방식으로. 그가 마침내 말했다.
“제 미래가 찾아와서 네 인생은 망했다고 알려 주길 바란 적은 없어요.”
“미안하게 됐네.”
"그리고 망하지도 않을 거고요. 전 자라서 당신이 되지 않아요."
"확실해?"
"네."
"천재라고 고용된 주제에 천재들만 간다는 판테온엔 가지도 못하고 남겨진 사람들을 죽인 뒤 얼마 남지도 않은 인간들한테 검거돼서 백 년은 얼어붙어 있었던, 그리고 결국 판테온에 갈 재능도 없는 이 꼴을 보고도?"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제 와서."
연구자는 모래밭에 나동그라진 프리즘을 곁눈질했다.
"가요."
"어디로. 절망 속으로?"
대답은 없었다.